소설리스트

87화 (87/148)

00087 여위열기자용 (女爲悅己者容)   =========================

 아직도 잊지 못하는 날이 있다.

 천둥번개가 치던 날, 이 작교의 앞에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가진 모후가 손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아교, 나의 아교..."

 힘없이 말을 하는 소성황후 보국 씨가 손을 들어 작교의 관옥같은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힘든 일이 생길 때 꼭 어미가 알려준 통로를 이용하세요."

 그리고 작교의 앞에 나타난 것은 머리를 틀어올린 애교 넘치는 찬란한 미모의 여인이었다.

"내가 이제 태자의 모후예요."

 그러나 작교는 인온황후의 웃음에 불길함을 감출 수가 없어서 연교를 꼭 끌어안아 마음을 다독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경이 태어났고 인온황후와 문종은 그를 무척 귀여워했다.

 어린 동생이 품에서 쓰러졌다. 창백한 얼굴에 손을 덜덜 떨면서 연교는 연신 피를 뿜어내고 있다. 황태자의 용이 그려진 복식이 피로 물들였다. 작교가 울부짖으면서 연교를 끌어 안고 소리를 질렀다.

"연비(燕飛)야! 연비야, 정신 차려라!"

 작교가 몸을 덜덜 떨면서 궁인들에게 말한다.

"물을! 물을 내오거라!"

 이미 삼킨 독을 어찌할 수 없어 중화라도 시키려던 작교는, 그러나 차가운 궁인들의 시선에 무언가를 눈치챈 작교가 울부짖으면서 우물가로 뛰쳐나가 직접 물을 길으려고 했다. 그러나 우물이 폐쇄되고 두레박이 깨져 작교는 모든 궁의 우물을 뒤져도 물을 길을 수가 없어서 결국 통곡을 하면서 연교를 끌어 안았다.

 작은 작교의 혈육이 그렇게 품에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경련을 일으키며 딱딱하게 굳어진 연교의 몸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작교는 그 다음날 태자 자리를 내놓는다는 말을 했었다.

"안돼, 저 자가 그 당왕이다."

 귀족 사회에서 당왕 이 작교가 꺼려지고 그가 이 경의 눈초리에 교분도 끊고 숨을 죽인다. 모든 것을 조심해야하고 모든 것이 그의 감시자였다. 이 작교는 자신이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자식을 볼 용기조차 못내고 불임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형이 언제까지 그렇게 죄인처럼 지내야 하지?"

 사촌 동생인 보국 요리가 이 작교에게 화를 내면서 소리친다.

"잃은 황위를 되찾지는 못해도 사람답게 살아 갈 최소한의 존중이라도 받아야지!"

 수회지에서 가을 연꽃을 닮은 아름다운 청년이 속삭였다.

"아교, 진아가 그대를 연모합니다."

 작교는 이 경의 오만한 얼굴을 생각하면서 웃었다.

"아교도 진진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를 품에 안으면서 작교는 이 경을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죄인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살아야했던 지난 세월. 이 작교는 심지어 복수도 할 수 없이 숨만 붙어 있었고 오직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작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는 이 경의 마음을 상처입히는 것이었고 그의 후손의 정통성을 갉아먹는 것이었다.

 이 작교는 이 경이 그를 보길 원했다. 그리고 이 경은 배신감에 치를 떨어 격분하여 정사를 보고 있었다. 이 작교는 웃음을 삼키지 못했고 처음으로 느끼는 상쾌한 감정에 시원하게 웃었다.

 곧 쩌렁한 목소리가 종수궁을 울렸다.

"저 요(妖)를 짐이 직접 죽이겠다!!"

 이 경이 문을 열고 들이닥친다. 견 진이 이 경의 존재를 알아채기도 전에 시야가 반전된다. 이 경이 견 진의 머리채를 잡아 당기고 뺨을 힘을 다해 내리쳤다.

 짝!!

"아악!!!"

 하얀 얼굴에 피가 터지고 비명을 지르는 견 진의 시야에서 분노에 사로잡힌 이 경이 보인다. 극히 노여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부릅 노려보는 이 경이 주먹을 견 진의 얼굴에 내리치곤 극히 노여운 목소리로 소리친다.

"네가 이딴 짓으로 나를 망신을 주려해?!?!?!"

 이 경이 격분하여 견 진을 내팽겨치고 발로 배를 걷어 찼다. 악 소리를 내면서 벽에 부딪힌 견 진이 몸을 웅크리고 떨자 이 경이 그에게 다가가 발로 그의 몸을 몇번 짓밟았다. 미친듯이 견 진을 폭행하는 이 경이 극노하여 귀신이 들린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장차 태자의 아비가 될 놈이 감히 사통을 해?!?! 이 작교랑 흘레 붙어??"

 견 진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얻어맞아서 정신을 잃는다. 피가 튀기고 견 진의 궁인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얼굴을 가린다. 얼굴에 피가 묻은 이 경이 견 진의 멱살을 잡아 끌어 올린다. 고개를 덜렁이도록 격하게 흔들은 이 경이 부릅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짐을 십년이 넘도록 따랐으면서 나를 배신하느냐?!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 형과 사통을 하다니!!"

 이 경이 참다못해 분개하여 견 진을 내팽겨치며 소리쳤다.

"너와 네 아들을 죽여버리겠다! 갈기 갈기 찢어 여섯조각을 내어 죽이겠다!!"

 그리고 발로 다시 견 진을 짓밥으려는 것을 이 작교가 다급히 이 경에게 기어가 그의 발목을 잡아 말린다. 이 작교가 비틀거리면서 갈라지고 빗나간 목소리로 말을 했다.

"폐하,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견 진이 말을 못하고 몸을 연신 꿈틀거린다. 이 작교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떤다. 아름답고 우아한 사내였던 견 진이 참혹한 몰골이 된 것과 이 경의 잔인한 폭행에 덜덜 떨면서 견 진을 손을 대려고 한다. 이 경이 그 때 이 작교를 밀치고 싸늘하게 말했다.

"왕형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소!!"

 째지는 목소리로 말을 한 이 경이 날카롭게 웃었다.

"왕형은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그저 방관하면 되니까!"

 이 작교가 그에 소름이 끼쳐 이 경을 멍하게 바라본다. 피와 살점이 튀기는 손을 털어버린 이 경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차가운 눈으로 반시체가 되어 정신을 잃은 견 진을 바라본다. 이 경은 덜덜 떨고 있는 이 작교를 벌레보듯이 바라보면서 웃었다.

"이렇게 복수를 하다니? 평생 그저 그런 범부처럼 살다가 뒈질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사내라는 건가? 칭찬해 줘야겠군! 그러나 대가는 비쌀 것이다. 이 작교."

 이 경은 입술을 비틀면서 음울하게 웃는다.

"종수궁을 유폐한다. 그냥 여기서 비참하게 죽어버려."

"폐하!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이 경이 그 때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를 죽여서 짐의 후사가 비웃음을 당하라고? 짐이 세간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네 원하는 것이지? 어차피 넌 죽을 목숨인데 네 값싼 목숨으로 흥정을 하다니."

 뚝, 끊긴 목소리와 함께 이 작교의 머리 위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이 작교의 숨이 멎었다.

"견 씨가 죽고 왕형은 재촉하지 않아도 죽소."

 이 경이 너무나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이십년 전부터 정해진 왕형의 운명이었소."

 그 순간 이 작교는 기운이 빠져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이 경이 음습한 웃음을 흘리면서 그 둘을 바라본다. 잠시 어지러진 방 안을 둘러보던 이 경이 짧게 혀를 차면서 자리를 빠져 나왔다. 어느새 이 경 안의 화기는 증오로 변화하여 그의 잔혹성을 깨우고 있었다.

 이 경이 열등감을 가지고 증오하던 이 작교. 연민했지만 크게 경계하던 이 작교. 조국의 도발에 황실의 권위가 손상되면서 쌓여온 원한.

 그리고 첫아들을 낳아준 아름다운 견 진. 이 경의 호흡이 가빠온다. 빠르게 걷는 이 경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견 진은 영선이 오기 전에 총애를 독차지한 총비였고 무척 아끼던 비(妃)였다. 그리고 견 진이 아름답다며 이 작교를 쓰다듬는다. 외모에 열등감이 있는 이 경이 분노를 죽이지 못해서 비명을 지르면서 옆에 있던 시위의 칼을 뽑아서 종수궁의 기둥을 내리쳤다.

"으아아아!!"

 이 경이 결국 부러진 칼을 내팽겨치고 발을 구른다. 이 경이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이제부터 종수궁에 그 누구도 들이지 마라! 궁인을 비롯한 그 어느 것도 들이지 마라!"

 머릿 속이 진탕이 되고 기혈이 어지러워 시야가 흔들린다. 이 경이 증오에 잠식되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둥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그리고 그런 이 경이 순간 자신의 손목을 감싸는 손길에 놀라서 옆을 보았다. 이 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결국 굳은 목소리로 말한다.

"귀비.."

 영선이 조용히 이 경을 도닥이면서 말을 하지 않는다. 이 경이 그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이윽고 분기를 간신히 억누르고 시선을 피했다. 영선이 이 경의 손을 잡고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손이 상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고 있는 영선의 얼굴은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저 아프지 마세요."

 영선이 한숨을 쉬곤 이 경의 옷길을 잡아 끌었다.

 이 경이 순순히 관저궁으로 향하고 오랜만에 영선의 침대에서 누워 잠을 자는 것을 직접 토닥여주던 영선이 궁인에게 일을 보고 받는다. 일을 다 듣던 영선이 짧게 한숨을 쉬면서 손을 들어 그를 내쳤다.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로 잠을 자는 이 경을 잠시 바라보던 영선이 조용히 손을 들어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일그러진 미간을 누르던 영선이 이윽고 중얼거렸다.

"이 경, 너는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필요한건가?"

 그는 잠시 이 경을 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 경에게서 밴 피비린내가 영선의 마음을 크게 어지럽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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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난 이 경의 표정은 극히 평온했다. 어제 그 폭풍같은 일이 환상인 것처럼 이 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영선에게 아침을 함께하자고 말했고 근 삼개월 만에 처음 함께하는 식사는 그 전처럼 오순도순했고 다정했다.

 그러나 영선은 이 경이 식사 중간에 젓가락을 멈추고 잠시 눈에 잔인한 기운을 일렁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화가 나면 극도로 냉정해지고 잔혹해지는 성품을 알고 있는 영선이 말없이 조기를 젓가락 끝으로 발라서 이 경의 입에 넣어주었다. 이 경이 아기새처럼 입을 벌려서 그것을 받아 먹었다.

 입가심으로 차를 마시는 이 경의 얼굴이 조금 굳어져 있었다. 영선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경에게 수회지를 같이 걸을 것을 제안했다. 하루 정도는 그의 곁에서 붙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죽기 직전이라는 견 진의 상태를 상기시키면서 이 경의 노화를 죽이고자 한다. 이 경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은 수회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살피면서 다정하게 손을 붙잡고 걸었다. 얼마만에 연인과 같은 광경인가. 새삼 감격할 법도 했지만 둘은 아무 말이 없었고 그러나 손만은 놓지 않고 있었다.

 쌀쌀한 풍경을 보던 이 경이 중얼거렸다.

"여름 더위가 늦게 오는 구나."

 영선이 픽 웃으면서 말한다.

"더위가 찾아 오면 전 몸이 약해서 쓰러져요."

 이 경이 그에 씩 웃다가 중얼거린다.

"그럼 원양행궁에 다시 가면 되지."

 그 말에 영선이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 경도 그에 과거를 더듬거렸다. 이 경이 홀린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여름이 되면 또 가자."

 영선이 뜸을 들이다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경이 멍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영선이 미미하게 웃으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제법 그 둘 사이의 분위기는 온화했다. 과거를 상기시킨 그 둘은 각자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와의 추억을 상상하고 있었다. 붉은 옷을 입고 이 경과 영선이 엉성하나마 혼인식을 했었다. 낙교라 칭하면서 작은 다리에서 영선이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 극을 했었다. 이 경이 나직히 웃고 영선이 빙그레 웃었다. 말을 신나게 타면서 웃던 영선이 있었다. 이 경이 그를 자랑스럽고 대단해하면서 박수를 쳤었고 영선이 사랑스럽게 웃으면서 그를 모과라 불렀었다.

 그렇게 먼 기억이 아님에도 어쩐지 아련하고 달콤한 추억이다. 싸웠던 추억도 있으나 전국옥새를 품으면서 달렸던 영선은 그 기억마저 사랑스러워 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다정한 분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청객에 의하여 깨지고야 말았다.

 이 경이 영선과 함께 수회지를 걷다가 걸음을 멈춘다. 분개한 관평공주가 그들을 향해서 달려온 탓이였다.

 관평공주 이 미아는 이제 애티를 서서히 벗어나가고 있었는데 배가 눈에 뜨일 정도로 불러 있었다. 이 경은 침묵하면서 딸의 방문을 받는다. 미아의 등장이 이 경의 부드러운 표정을 딱딱하게 굳게 만들었고 그의 기분 좋고 나른한 숨을 멈추게 했다. 미아의 부른 배를 바라보던 이 경의 눈에 아주 찰나간 증오가 스쳐지나갔다.

"폐하!"

 관평공주가 손을 잡고 있는 그 둘을 발견하더니 이윽고 이성을 잃어 발을 구르면서 소리쳤다.

"영경이 미친 것을 아시나요?!"

 이 경이 그제서야 영선의 얼굴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미아에게 맡겼구나."

 영선은 대답하지 않았고 이 경의 성질을 그대로 닮은 이 미아가 분개하여 소리친다. 영경이 미쳐서 칼로 하인들을 죽이거나 동물을 학대한다. 그 착하던 아이가 밤에 귀신을 보고 난동을 부린다. 누나인 자신에게 욕을 하면서 때리려 든다. 결국 동생의 상태를 본 관평공주가 경악하여 이 경에게 뛰쳐나가 크게 항의하더니 흐느끼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황. 부탁입니다. 아바마마의 위패를 만들어주세요."

 이 경의 분노가 지극하여 그는 약영의 장례식도 허용하지 않았고 곡도 금지하였다. 위패를 만드는 것도 허용하지 않아 제사조차 지내지 못하게 하니 죽은 민도공주가 어떻게 추모받는지 이야기를 들은 이 미아의 속은 끓을 대로 끓어오라고 있었다. 아무리 황손을 죽였다 할지라도 아비는 아비인 것인데 이토록 차갑게 돌변한 이 경의 태도가 관평공주는 믿기지가 않아서 통곡한다.

 쓰러지면서 무릎을 꿇은 관평공주가 애처롭게 빌었다.

"미아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요. 제발 아바마마의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부른 배를 강조하듯이 관평공주가 배를 만지면서 눈물을 흘린다.

"외손주를 보아서라도 용서해주세요. 부황."

 그리고 이 경은 그토록 사랑하고 아꼈던 관평공주를 피로한 눈으로 바라본다. 진주처럼 아꼈고 금처럼 사랑했던 딸인데 이 경은 어쩐지 그에 대한 마음이 차갑게 식어 그 전처럼 미아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 경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일단 오 씨는 대역죄인이지 너의 아바마마가 아니다. 지금 네 적부는 음월전 하나뿐이다."

"부황!"

"음,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이 경이 한숨을 쉬면서 영선의 손을 꼭 잡는다.

"주례에 시집간 여자가 친정에 오는 것은 육친이 살아있을 때 일 년 중 두 번뿐이라고 적혀 있는데 공주라고 해도 친정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옳지 않다."

 관평공주가 충격을 받아서 그를 멍하게 바라본다. 이 경은 딱히 대꾸할 필요성을 못느끼고 영선의 손을 꽉 잡고 다정하게 말을 했다.

"오늘은 좋은 술을 같이 나눠 마시자꾸나. 몸도 나아졌으니 맛있는 것도 먹자."

 영선이 무덤덤하게 그에 고개를 까딱인다. 발걸음을 떼려는 둘을 잠시 바라보던 관평공주가 분기에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떤다. 한참을 그리 있던 이 미아는 결국 소리지르고야 말았다.

"그 아이가 그렇게 소중하여 영경을 죽이시려 했나요!"

 영선이 갑자기 뻣뻣해진 이 경의 손을 눈치채고 호갑투를 낀 손으로 이 경의 팔을 잡고 나직히 말한다.

"폐하."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이 경의 눈이 충혈되었다. 관평공주가 다급히 이 경의 옷깃을 부여잡으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영경을 저렇게 만들고도 여동생이 기뻐할 것 같습니까?!"

 그 순간 이 경이  옷깃을 잡는 관평공주의 손을 떨구며 이 미아의 어깨를 밀었다. 찰나에 비틀거리는 이 미아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이 경이 극히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대저 이렇게 죄인의 자식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말을 하는 것이 내 치세의 부덕이지."

 이 미아가 차가운 물에 빠져서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몸을 부들 떨면서 손발을 허우적거리나 화려한 장신구와 옷의 무게가 무거워서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꺄아악!!"

"관평공주를 구해라!"

 영선이 그를 단조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류 태감이 황급히 궁인들을 불러 그녀를 구조하는 동안에 이 경이 뒷짐을 지고 차가운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이 경이 잠시 영선을 힐끗이다가 말한다.

"안 구하느냐?"

"왜 제가 구할 것이라 생각합니까?"

"너라면 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선이 손에 낀 호갑투를 매만지다가 지극히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수영을 못하는데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경이 그 말에 영선의 안색을 살핀다.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영선의 말은 침착했으며 얼굴은 잔인할정도록 평화로웠다. 잠시 그 얼굴을 살피던 이 경이 이윽고 어두운 표정을 하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발코로 흙을 파던 이 경이 수회지의 진흙을 뭉게다가 이윽고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널 볼 때마다 사랑하면서도 희가 생각나 증오를 참을 수가 없다."

 영선의 몸이 움찔 거린다. 이 경이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이며 덜덜 떠는 이 미아를 잠시 바라본다. 이 미아가 겁에 질려서 태감을 부여잡고 이 경을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단조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 경이 결국 한숨을 쉬었다.

"이 미아."

 이어지는 말은 감정 없이 무덤덤한 목소리였기에 더욱 더 잔혹한 말이었다.

"너를 참으로 예뻐했지만 사실 이제 짐은 너를 보아도 별로 감흥이 없다."

 이 미아가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겁에 질려서 울음을 터트린다. 부른 배를 잠시 보던 이 경이 한숨을 쉬면서 그 자리를 벗어난다.

 몇 발자국 뒤에 영선이 그 뒤를 따랐다.

 앞서서 한참을 걸어 나거던 이 경이 갑자기 우뚝 서자 곰곰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영선이 그를 보았다.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던 이 경이 영선을 노려보듯이 강렬하게 응시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이 경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해 보거라."

 영선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이 경이 속삭인다.

"경아."

 영선이 유려한 발음으로 중얼거린다.

"경아."

 이 경이 눈을 감고 그 말을 잠시 음미하다가 중얼거렸다.

"나의 경."

 영선이 그 말을 순순히 따라했다. 말은 수회지의 강물처럼 부드러웠고 속삭이는듯 깃털 같았다. 시를 외는 듯한 목소리였다. 깊은 목소리가 그 말을 왼다.

"나의 경."

 이 경이 울컥한 감정을 잠시 억누르면서 격동에 휩싸인다. 마음을 고르면서 어지러진 심기를 살피는 이 경이 한참 후에 침착하려 노력하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나의 경은 정말 아름다워요."

 자신이 말하고도 우스꽝스러워 이 경은 얼굴을 붉히고야 만다.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회피하는 이 경이 이윽고 말을 후회하는 마음을 품고야 말았다. 그러나 영선은 이 경의 손을 잡고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했다.

"나의 경은 정말 아름다워요."

 뺨을 부여잡자 이 경은 울음을 참기 위해서 노력했다. 따스하고, 반짝이는 보석같은 두 눈이 보인다. 황색 묘안석같은 두 눈이 이 경을 온전히 담고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천금을 주어도 못살듯한 반딧불이의 빛과 같은 눈이었고 그 광채가 찬란한 눈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울 것 같이 일렁거리는 눈이 이 경을 담고 있었다 .이 경이 그 손을 쓰다듬고 눈물을 참았다. 떨리는 이 경의 몸을 다잡으면서 영선이 속삭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그러나 영선의 일그러진, 어째서인지 울 것 같고 또 슬퍼보이는 얼굴에 이 경은 답답함을 느꼈다. 무언가 쓸쓸해보이는 그 얼굴은 결코 견 진처럼 행복해보이지 않아서 이 경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국 말을 삼키고야 말았다.

============================ 작품 후기 ============================

영선이는 육궁분대무안색 편에도 언급된 바가 있지만 자기 앞에서 사람 때리는 것을 진짜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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