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여위열기자용 (女爲悅己者容) =========================
'오늘이었나?!'
품에 안은 강 채요의 몸이 차갑게 식는다. 아픈척을 한다기엔 너무나도 괴리감이 있는 몸이었다. 얼굴이 파르스름하고 식은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하루는 죄책감에 찾았고, 또 하루는 기절한 채요에게 놀라서 찾았고 또 마지막 하루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에 경악하여 그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자꾸 떨어지는 손목에 이 경이 불안감을 느끼면 태의를 재촉했다.
"대체 량사부인이 왜 이런 것이냐?!"
이 경의 험악한 얼굴에 태의가 쩔쩔매면서 변명을 했다.
"량사부인께서는 민도공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먹지도 않으며 죄를 뉘우치고 추모하느라 몸이 많이 약해져있는 상태였습니다. 거기다가 번개에 놀라고 비에 젖으니 몸이 무척 좋지 않아졌습니다."
이 경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무거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알겠다. 물러가라."
그리고 종종 걸음으로 물러가는 태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강 채요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 경의 눈에 죄책감이 스쳤다. 눈을 질끈 감고 창문 밖을 보고 관저궁을 보던 이 경이 불안하여 중얼거렸다.
"설마 기다리진 않겠지..."
아니다. 그는 기다릴 것이다. 이 경은 알고 있었다. 영선이는 그런 아이였다. 경박하게 보이나 그 누구보다 신의가 깊은 자였다. 이 경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여 가만히 있었다. 이제 돌이킬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 자정이 지났고 관저궁에 불이 꺼진 것이 보였다. 이 경이 침음성을 내다가 이윽고 발작을 일으키는 강 채요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채요!"
이 경이 식은땀을 흘리는 채요를 바라본다. 몸을 떠는 강 채요의 눈가에서 눈물 한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이 경이 채요의 눈물을 닦아 내린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채요가 말을 했다.
"위패.. 위패는..."
이 경이 울컥하여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 경이 어지러운 정신에서 몸을 바르작대는 채요를 다독이면서 말한다.
"위패는 너가 구했다. 공주의 위패는 무사하다."
강 채요의 얼굴이 순간 평온해졌다. 그 때 채요가 더듬거리면서 말을 했다.
"위패를... 구하여 공덕을 쌓으면..."
흐느끼면서 말을 한다.
"제 죄를.. 죄가 사라져 앞을 볼 수 있습니까?"
이 경이 멍하게 채요를 본다. 채요는 가련하게 울고 있었고 진심을 담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초점이 없는 눈이 보인다. 이 경이 몸을 떨다가 잠시 후에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했다.
"채요. 눈은 보지 못해도 내가 더 대신해서 더 큰 것을 주겠다. 민도공주의 위패를 지켰으니 내가 그 대가를 치루겠다."
채요가 그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 경은 채요가 눈이 멀어 표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기에 그대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영선과 약속했던 날 밤이나 이 경은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아무리 영선이 달랬어도 이 경은 그 날 위패 앞에서 영선과 짐승처럼 얽혔었다. 그리고 채요는 위패를 지키려고 목숨을 내놓았으니 이 경은 차마 그녀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전 채요는 화려하여 천송이 모란꽃을 모은 것과 같았고 요염하고 풍만한 자태가 자염했다. 그러나 지금 채요는 마르고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하여 연민이 절로 들만큼 가련해보였는데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으니 이 경은 그저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못할 뿐이었다.
"채요야."
아직도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둑한 구름이 하늘을 덮어 해도 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밤새도록 이 경은 채요의 깡마른 손을 꼭 붙잡으며 그녀를 걱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채요의 차갑게 식은 몸은 이 경과 같이 있어서인가 천천히 굳은 몸이 풀리고 혈색이 돌아왔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크게 건강이 상하여 거동을 하지 못하였다.
"몸을 추스리거라."
이 경이 아침에서야 피곤한 얼굴로 말을 했다. 강 채요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마음 쓰지 말거라. 안녕사가 무너졌으니 그동안은 예불하지 말거라."
강 채요가 머뭇거리는 것에 이 경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민도공주도 그것을 원할 것이다."
이 경은 그리고 품속에서 잘그락거리는 봉황비녀의 무게에 쓰게 웃었다. 그는 밤새도록 강 채요를 간호했으니 영선과의 약속을 어기고야 말았다. 황금색 나비가 눈에 아른거린다. 호박을 깎아서 정성스럽게 만든 두 눈에는 보석이 가루처럼 반짝여 휘날리고 있었고 나비가 우아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토록 어여쁘게 눈을 마주하면서 느릿하게 웃었다.
"정무가 바빠서 나는 이만 가야겠구나.."
강 채요가 속삭였다.
"얼른 가보세요. 저 같은 것에 신경쓰지 마시고요."
이 경은 홍리당을 빠져나와 그 처마 밑에서 잠시 서있었다. 류 태감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 경이 불안한 얼굴을 하여 작게 말했다.
"영선이한테 사과하면 빌까?"
그리고 입을 잠시 열지 못하던 이 경이 고개를 설레 저으면서 발걸음을 뗐다. 곤룡포의 소매를 떨치면서 이 경이 짧게 말했다.
"그 애는 용서해 줄 것이다."
자식을 잃은 이 경을 다독였던 영선이다. 희를 가졌을 때 고립된 상황에서 얼마나 이 경이 괴로웠는지 이해해주었던 영선이었다. 희가 어떤 의미였던가. 죽은 희에게 이 경이 어떤 미안함을 품고 있었던가. 영선은 적어도 이 경 앞에서 희의 죽음을 폄하하지 않았다. 이 경은 영선에게 결백했고 희의 위패를 지키느라 죽어가는 채요를 두고볼 수가 없었던 것 뿐이었다. 그러하기에 이번에도 영선이 이 경을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관저궁에서 말없이 앉아 있는 영선의 머리는 보관으로 감싸져 있었고 이 경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 한참을 변명하는 이 경에게 영선은 추궁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간단하게 말을 했다.
"괜찮아요."
다만 영선은 실낱같이 웃고선 이 경의 품에서 끄트머리를 보이는 봉황비녀를 빼어내곤 손에 쥐었다.
"이렇게 다시 비녀를 얻었군요."
그러나 이 경은 무언가 불안하여 영선의 안색을 살폈다. 너무 순순하게 용서를 받은 이 경이 잠시 머뭇거리던 찰나에 영선이 그를 보면서 다정스럽게 말했다.
"옆에서 앉으세요."
이 경이 그 말에 고민하다가 영선의 옆에 앉았다. 영선은 그를 보지 않고 한참을 정면을 보고 있었다. 이 경이 눈치가 빨라 자리가 불편하여 안절부절하다가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영선은 창 밖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구름 사이의 교교한 달빛과 저렇게 나뭇잎 속에 화사한 꽃이 있는데 좋은 한때야 어찌 없겠습니까."
이 경은 그 함의를 눈치채지 못하였으나 불안하여 영선의 손목을 꽉 잡아챘다. 영선이 그 때 몸을 돌려 고양이를 닮은 미려한 두 눈으로 이 경을 담았다. 이 경이 문득 숨을 멎었다.
"황후 마마와의 약속은 이제 없습니다. 저는.."
영선이 중얼거렸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영선이 무거운 눈을 한채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때 이 경이 불안감을 느끼고 영선의 손을 잡고 연신 그에 입을 맞추었다.
"밖에 나가고 싶으냐? 답답하냐?"
영선은 대답하지 않았고 이 경이 침묵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영선은 아련한 눈을 하고 있었고 무언가 회상하듯이 넋을 잃고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이 경이 그에 눈을 떼지 못하고 표정이 굳어져 그를 본다. 차라리 화를 내고 앙칼지게 굴면 안심했을 것인데 어쩐지 영선은 화를 내지도 않고 무언가를 깊게 상념하여 넋을 빼고 있었다. 이 경이 그것이 참을 수 없이 불안하여 영선의 손을 꽉 쥐고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다시 영선이 그를 보자 이 경이 그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이 경이 에잇, 소리를 내면서 영선에게 입을 맞춘다. 영선의 눈이 잠시 크게 떠지다가 이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 경이 탁자를 가운데에 두어서 불안하게 입술을 탐하는 것을 영선이 허리를 감싸 그를 지탱해준다.
이 경이 그에 마음을 놓고 힘을 풀고 부드럽고 따뜻한 혀가 제 안을 헤집는 것을 즐겼다. 몽롱해져서 풀어진 얼굴을 한 이 경이 영선의 팔뚝을 잡고 음, 소리를 낸다. 영선이 작게 미소를 짓곤 이 경의 어금니 살 안을 파헤쳤다. 이 경이 그 때 몸을 휘청거리고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영선이 그를 잡고 입술을 떼고 이 경의 콧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영선의 휘어지는 입꼬리에 이 경이 멍한 눈으로 그것을 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안녕사가 무너졌으니 황궁 근처에 커다란 절을 하나 세울 거다."
이 경이 중얼거렸다.
"같이 나가서 구경하려느냐?"
영선이 그에 잠자코 이 경을 보다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이 경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 경이 손길이 기분 좋아서 저도 모르게 손에 뺨을 비비면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영선이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경은 황성 바로 옆에 절을 세웠다. 애초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절을 세울 생각을 가졌는데 도교를 숭앙하는 귀족들과 유학자들이 난리를 치니 성격이 드센 이 경은 더욱 화가 나서 크고 화려한 절을 지으려 마음 먹었으나 영선이 말려 그나마 있던 도교 사원을 정비하여 정천사(貞天寺)라고 하였다.
아무리 아끼는 후비라고 하지만 궁 밖으론 황후마저 함부로 나갈 수 없기에 이 경은 그 주변 민가를 통제하여 길을 닦고 사람을 막아 영선을 어가에 태우고 함께 했다.
달그락 거리는 마차에서 영선은 빼꼼거리며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마차를 타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다며, 자기만 욕을 본다며 말을 할 영선은 그저 가만히 창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 경이 가만히 보다가 한순간 굳어진 얼굴을 하였다.
'밖이 그리운가?'
영선은 분명 어딘가 아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꺄르르 웃는 여인들의 웃음도, 호객행위도 멈춰 행차길에는 사람들은 근엄하게 오체투지하여 어가를 배알하고 있었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영선의 눈길에 실망이 스쳐 이 경이 다급하게 영선을 어루어만지면서 말했다.
"불당 옆에 작은 연못이 있는데 파란 연꽃이 난다."
영선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이 경을 멍하게 바라본다.
"예?"
불안해하는 이 경의 얼굴을 보고 상황을 깨달은 영선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아."
영선이 그럼에도 묘한 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그것 참 신기하군요."
흥미롭지 않은 듯 말을 하는 영선에 이 경이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두운 표정을 하여 입을 다물었다. 영선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는 영선의 눈은 어딘가 아련한 과거로 향하고 있었다. 이 경이 그것을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크게 불안한 마음에 손가락을 말아 주먹을 꾹 쥐고야 말았다.
정천사에서 그나마 푸른 연꽃이 영선의 마음을 뺏게 만들었다. 연못 주변에 앉아서 턱을 두 손으로 받치고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는 모습은 어린애 같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이 경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연꽃의 잎이 넓고 생생하여 영선은 그것을 한참을 보고 있다가 문득 말을 했다.
"연꽃은 연인과 발음이 비슷해 사랑을 뜻하지요."
이 경이 뒷짐을 지고 있다가 대답했다.
"응? 그래."
영선이 잠시 생각하다가 헛웃었다.
"그래요. 폐하는 꼼꼼한 사람은 아니지요."
이유를 몰라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는 이 경을 보던 영선이 씩 웃었다.
"얻은 것이 있으면 버린 것이 있는 법."
영선이 연꽃을 바라보면서 이 경의 소매를 잡고 끌었다. 휘청거리는 이 경이 간신히 중심을 잡자 영선이 이 경의 손에 깍지를 끼고 씩 웃었다. 이 경이 그 웃음에 마음이 안도하여 시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기분이 좋다면 나는 좋다."
"폐하."
영선이 묘한 눈으로 이 경을 보다가 눈을 감는 이 경을 보고 작게 웃었다. 영선이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면서 자상하게 말했다.
"다음에도 저를 데리고 와줘요."
이 경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언제든지! 영선아 보름 후에도 같이 나오자."
영선이 그를 보면서 말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주석 1. 도연명의 의고. '구름 사이의 교교한 달빛 나뭇잎 속에 화사한 꽃, 좋은 한 때야 어찌 없으려만 오래 가지 않으니 어찌 할거나' 영선이가 돌려까서 경고함.
격려 감사드립니다! 완결까지 열심히 달릴게용ㅠㅠ 아마 음.. 본편은 120편 쯤에 끝나지 않을까.. 이번달이나 다음달 첫째주 내로 끝나지 않을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