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여위열기자용 (女爲悅己者容) =========================
"그 아이가 내게 사과한다면 바로 용서해주겠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말하는 이 경에게 류 태감도 오 상환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 상환이 속으로 쓰게 웃으면서 생각한다. 신귀비가 과연 먼저 숙이고 들어갈 사람인가. 오 상환은 자신의 속으로 목을 벤 자식을 생각했다. 착하고 충성심이 강한, 오히려 자신보다 더 충직했던 약영은 후궁전에서 괴물이 되어 주군을 해하려고 했다.
후궁이란 그런 곳이다. 사악한 독들이 쌓이고 쌓여서 배출되지 않아 부패한 독이 되어 사람을 잔혹하게 만드는 곳이다. 상환은 신귀비가 궁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언뜻 천박해보이고 헬렐레한 그 여우상의 청년은 심지어 자신의 아들보다도 대쪽같은 성품이라 꺾이면 꺾였지 절대로 휘지는 않을 성품이었다. 신귀비는 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 그 날 신귀비는 이 경에게서 마음이 떠났다.
침의에 갇혀진 몸이 떨리고 있다. 이 경은 마른 침을 삼키다가 말을 했다.
"영선이랑 아이도 가질 거다."
이 경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 애가 똑똑하니까 그 애 핏줄도 분명 영명하고 애교가 많겠지."
류 태감이 망설이다가 애써 웃으면서 대답했다.
"분명 귀엽고 영특하신 아기씨일겁니다."
이 경이 얼른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 경의 손이 떨리는 것을 두사람 다 알아채고 있다. 류 태감도 오 상환도 작금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손을 놓고 있었다. 정말 그 어떤 수도 쓰지 못하고 엉켜버린 실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날 밤 차마 이 경은 영선에게 아무 변명도 하지 못했고 영선은 홀연히 그 자리에서 사라져 처소로 들어갔다. 환궁하자마자 이 경은 옷을 껴입고 몸을 떨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이 경이 중얼거렸다.
"신귀비가 보고 싶다."
이 경이 우울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상환아, 사자야. 정말 영선이가 그런 걸까?"
궁궐에 오랫동안 몸을 담은 두 사람은 입을 떼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기에 입을 열지 않았고 이 경은 멍하게 밖을 바라보다가 갈라지고 지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런데 왜 희를 죽이려고 했었지? 내게 변명하지 않느냐."
이 경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분노인지 증오인지 애정인지 모를 여러 감정이 뒤섞인 음성을 낸다.
"영선이 내게 사과하지 않을 거야. 그 아이는 진심이 아닌 것을 입 밖에 내지 않으니까. 희의 위패에 소금을 넣은 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하지. 그리고 내 희에게 그렇게 말한 것도 용서할 수가 없어. 하지만 그 애가 사과하면 용서할거야. 그게 내 마지막 양보다. 더 이상 선을 넘게 할 수는 없어."
이 경이 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류 태감이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폐비 견씨가 유폐에서 풀어준 영 답응이 고발한 내용입니다. 종수궁이 이 작교와 연락하다가 발각되었습니다."
그 때 이 경의 표정이 무섭도록 차가워졌다. 이 경이 류 태감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면서 이를 악문다.
"종수궁? 폐비가 이 작교와 또?"
"예, 영 답응의 아비와 견 씨의 아비가 멀게 나마 피가 섞여 있어서 폐비가 그를 도와준 것인데 그것을 믿고 영 답응에게 이 작교와 연락할 것을 부탁해다가 걸린 모양입니다."
이 경이 그 때 날카로운 웃음을 짧게 흘리더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 작교!"
증오에 타오르는 두 눈으로 이 경이 그 이름에 격정을 담아 꽉꽉 짓누른다. 이 경이 주먹을 쥐고 핏발이 선 두 눈으로 허공을 노려본다.
"크흐흐.. 이 작교는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 구나."
안 그래도 심기가 어지럽던 이 경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걱정을 하여 다가오는 류 태감을 소매를 휘둘러 멈추게 한다. 이 경이 창백하게 웃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견 진은 신귀비가 아니다. 이 작교도 신귀비가 아니다."
심호흡을 하던 이 경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보국 량천의 여동생이 올해 몇살이라고?"
"열 여섯으로 작년에 가례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혼시켜서 조 가랑과 결혼시켜."
지금 조국으로 섭정대신으로 보낸 조 가랑의 나이가 근 육십이었다. 조국의 반발을 누르는 것에 정략혼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 이 경은 일말의 양심으로 자비를 베풀고 있었으나 증오심이 폭발한 것이다. 열여섯의 신혼의 여인을 중늙은이의 재취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이 경은 짜증을 내면서 그 사건을 거론도 하기 싫어했다.
"그리고 영 답응은 미인 작위로 복위시켜줘라."
영선이도 술수가 뛰어나고 채요도 영악한데 똑같이 잔머리가 있어도 영 가도는 무언가 찝찝하고 혐오스러웠다. 이 경이 바로 그 사건을 처리하고 손으로 탁자를 톡톡 치다가 한숨을 쉬었다.
"영선이가 많이 아프냐."
영선이 휘장 너머의 사내에게 말했다.
"아프지 않아."
그는 잠시 웃으면서 말을 가리다가 중얼거렸다.
"그저 가뿐하지."
휘장 너머로 사내의 신형이 잠시 흔들린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영선이 심유하게 가라앉은 눈을 한다. 잠시 말을 고르던 영선이 이윽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그 말은 거칠게 갈라지고 끝이 떨리고 있었다. 영선은 울컥함을 참고 목 멘 소리로 말을 했다.
"내가 미안해."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으나 영선은 눈을 질끈 감고 말을 하고 있었다. 믿어주지 않아서, 그가 힘든 것을 모르고 매도해서, 그를 미치광이 취급하고 욕을 했던 일, 경계하고 적으로 삼으려 했던 것, 그 자잘구레한 모든 것들을 입에 담지 않고 오로지 말을 했다. 숨을 삼키고 영선이 눈을 뜨고 말을 한다.
"미안해, 치아. 많이 힘들었지?"
휘장의 사내는 말을 하지 않았고 영선은 눈을 휘면서 휘장 너머의 오랜 벗을 바라본다. 영선이 고민하다가 입을 연다. 영선이 아련한 목소리로 과거를 더듬여 말했다.
"이제 십년이 넘은 일인가?"
영선이 피식 웃더니 말한다.
"남준이 그 당시 탐관 여 형일을 습격하고 네가 그것을 막았던것? 그 때 내가 사정을 알고 얼마나 기막혀 했는 줄 알아? 나는 네가 제대로 돌아버린줄 알았어."
희 치가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영선이 잠시 휘장 너머를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영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갈께."
음월전의 앞에서 가마를 준비하는 계자에게 손짓을 해서 멈추게 한다. 영선이 쾌적한 날씨와 쨍쨍한 햇살에 기분이 좋아 손을 까딱이면서 앞서 걸어갔고 계자가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따랐다.
"마마! 아프다고 소문이 나셨단 말이예요."
영선이 웃으면서 말한다.
"상관없어."
너무도 날씨가 좋아서 잠시 걷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나 영선은 곧 그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말았다. 관저궁으로 돌아가려던 영선이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우두커니 멈춰선다. 음월전은 동육궁과 서육궁 사이에 있으므로 태양전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고 길이 트인 곳이었다. 이 경도 영선을 눈치채고 멍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려 아, 소리를 낸다.
이 경이 머뭇거릴 틈에 영선이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소매를 올려 절을 했다. 이 경이 다급하게 손짓을 하여 말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몸도 안좋은데 일어나라!"
영선이 천천히 일어나서 소매를 모으고 얼굴을 가린채 이 경을 마주한다. 이 경이 그런 영선의 얼굴을 힐끔거린다. 백옥같이 부드러운 피부는 생기가 없었고 소문처럼 비를 맞아서 다 죽어간다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아파보였다. 이 경이 죄책감에 침을 삼키다가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러움과 안타까움 사이의 그 어느 목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왜 많이 아프냐?"
이 경은 참지 못해서 애탐이 섞인 목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내 얼굴도 보지 못할 만큼 많이 아프던?"
이 경은 영선의 눈치를 보다가 한발자국 나아가 영선의 손을 꽉 쥐어 당겼다. 영선은 그러나 이 경의 어깨를 잡아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곤 중얼거렸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경이 그에 잠시 시커매진 낯이 되어 영선을 노려본다. 영선을 잡아 먹을 듯이 노려보던 이 경이 순간 착잡한 얼굴이 되어 중얼거린다.
"너는 어떻게 중간을 모를까?"
영선의 보드러운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그것을 매만진다.
"이 예쁜 입으로 달콤한 말을 하면 나는 네게 못해줄 것이 없다."
영선이 한발자국 물러나서 손길을 피한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말이 없다. 그에 이 경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윽고 사나운 얼굴이 되어 영선을 노려본다.
"영선아!"
영선이 눈을 꾹 감고 말이 없고 이 경이 화가 나서 영선의 팔을 꽉 붙잡고 말을 한다.
"너 정말!"
눈썹이 파르르 떨리다가 열린다. 두 눈은 보석과도 같아 황옥(黃玉)을 다각면체로 가공해놓은 듯이 빛이 여러 방향에서 찬란히 반짝이고 있었다. 항상 눈을 볼 때마다 이 경은 감정마저 죽인 채로 그에게 넋을 잃고야 말았다. 놀랍게도 아름답고 빛나는 두 눈이었다. 이 경이 홀린듯이 눈가를 더듬거리다가 영선에게 그 손이 잡혀 천천히 떼어지고야 만다. 잠시 어두운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이 경이 조용히 말한다.
"너 정말 결백하냐."
영선은 답을 하지 않았다. 이 경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넌 왜 나를 그토록 기만한거냐? 응?"
영선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자 이 경이 화가 나서 영선의 턱을 붙잡아 올리며 겁박하듯이 몰아 붙힌다. 으르렁 거리는 짐승처럼 이 경이 격한 기운을 뿜으며 영선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네가 말을 하지 않고 끝까지 짐에게 그런다면 짐도 생각이 있다!"
영선이 꿋꿋하게 입을 다물고 있자 이 경이 화가 나서 손을 움찔 거렸다. 성질상 당장에 손이 올라가고도 남을 것인데 이 경은 그 전에 영선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한 바가 있었다. 그것을 상기시키며 이 경이 거칠게 호흡을 하다가 결국 영선의 부드러운 뺨에 갈라진 입술로 도장을 찍곤 중얼거렸다.
"짐이 너를 아낀다."
이 경이 아주 작게, 아주 작아서 영선도 간신히 들을 수 밖에 없는 미약한 목소리로 그 끝을 떨며 말한다.
"네가 짐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 경이 자세한 생각을 하면 울컥할 것만 같아서 이를 악물고 몸을 떤다. 눈을 우아하게 내리깔고 있는 영선에게 뺨을 부비면서 그가 영선을 끌어 안고 거칠게 숨을 토한다. 우아한 긴 목덜미에 입을 연신 맞춘다. 영선이 굳어져서 서있는데 이 경이 일주일도 되지 않았건만 마치 칠천년과 같이 길었던 이별 끝에 맡는 영선의 체취에 이성을 잃고 영선을 끌어 안고 놓아주지를 안았다.
이성을 잃고 그 과일의 향기가 나는 달콤한 살을 빨고 코 끝으로 문댔다. 이 경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렀다. 사랑하는 정인의 살결에 도취한 이 경이 자신도 모르게 황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선아, 영선아.."
그 허리를 단단히 껴안고 엉덩이를 움켜쥔다. 등을 꽉 끌어 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그를 단단히 틀어쥐고 목을 깨물고 연신 살을 핥아 그 맛을 보았다. 이 경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리고 헐떡거리면서 영선의 부드러운 뺨에 거친 뺨을 비볐다. 영선의 뺨이 격한 접촉에 긁혀서 피가 송글 맺히고 있었다.
영선이 자신을 끌어안고 몸을 비비는 이 경에 몸을 간간히 움찔거리다가 이윽고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분명히 성욕이 아닌 목덜미가 물린 짐승같이 비참하고 가련한 음성에 영선의 어깨 아래로 흘러 내려온 옷 사이, 그 쇄골 부분을 빨던 이 경의 멈칫거린다. 이 경이 잠시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이 경이 천천히 입술을 떼고 한 발자국 그에게서 물러난다. 영선이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서있다. 쇄골이 드러나게 밀려 내려온 옷은 아슬하게 팔에 걸쳐져 있었고 속살이 그대로 보여 있었다. 흰피부에 울혈과 물린 자국이 가득한데 영선의 표정은 평소처럼 애교있다기 보다는 고통스러운듯 미간을 찌부리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연인의 애무를 당했다기 보다는 겁간을 당하고 희롱을 당한 모양새에 가까웠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이 경이 숨을 거칠게 쉬다가 이윽고 펄럭이는 소매를 떨치며 그 자리를 박차고 빠져나온다. 이 경이 감정이 거친듯 그 자리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가자마자 숨죽이던 계자가 흐느끼면서 영선의 팔을 잡아 주었다.
"마마, 마마.."
잇자국이 난 목을 더듬 만지던 영선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다.
"아니야. 아무 것도.."
영선은 그 말을 흘리듯이 말을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내 영선이 목에서 손을 떼고 짤막하게 말을 했다.
"관저궁으로 돌아가자."
그 때 영선이 아련한 목소리로 다시 되뇌었다.
"관저궁.."
그러나 퍼득 정신을 차린 영선이 걱정하는 계자에 씩 웃어보이곤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울먹이는 계자가 쪼르르 영선의 뒤를 아기오리처럼 따라 붙었다.
============================ 작품 후기 ============================
덧. 위패는 귀신을 모시는 곳인데 소금은 귀신을 내쫒을 때 쓰이니...
이 경이 원래 스토리라인대로 갑니다. 원래는 영선이가 방 안에서 무릎을 꿇고 그 이후 ㅇㅇㅇ하는 전개인데 밖에서 무릎을 꿇고 ㅇㅇㅇ 전개를 사이다로 전환하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전에 한 독자분의 댓글(너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댓글인데 삭제를 하셨ㅠㅠㅠ 혹시 복사를 따로 하셔서 보관하고 계신다면 쪽지로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안된다면 답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을 보고 정신을 차렸어요. 답답해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여기서 사이다를 갑자기 날리는 것은 캐붕인 것 같습니다. 원래 스토리라인대로 갑니다. 서툰 이 경이의 꼰대짓이 조금 이어질겁니다. 본의아니게 낚시를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