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48)

00100 여위열기자용 (女爲悅己者容) =========================

 영선이 자리에 일어났을 때는 이 경이 자리하지 않고 있었다. 영선은 멍하게 정면을 바라보다가 곧 헛웃었다. 그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통증 속에서 날카롭게 웃으면서 손목에 남은 붉은 손자국을 노려본다.

'경아!'

 비참한 상황에 영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그는 분노할 수도 없었다. 영선은 그저 웃고, 또 웃을 뿐이었고 그 끝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용히 옷을 챙겨 입을 뿐이었다.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영선에게 내관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무릎을 꿇는다. 영선이 그를 잠자코 바라보자 내관이 머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말을 했다.

"영화원 정자로 오시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영선이 그에 몸을 잠시 굳힌다. 영선이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

 계자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나 아무 말도 못하고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며 그를 따르고 있었다. 영선은 덤덤한 얼굴로 보보를 했고 욱씬거리는 몸의 통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념하고 있었다. 이 경의 우는 얼굴이 떠올랐다. 크게 떠진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면서 울고 있었다.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영선의 가슴이 욱씬거린다. 영선이 말없이 웃는다.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지? 그 누구도 아닌 네가?'

 자박이면서 눈이 밟히고 있었다. 영선이 땅을 보면서 발걸음을 걷고 있었다. 하루새에 날이 이렇게 싸늘해지던가? 변덕스럽게도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정자에, 이 경이 가만히 앉아 있다. 영선은 이 경을 바라본다. 아직은 영선이 온 것을 알아채지 못한 이 경이 멍하게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겨울이라 그새 첫눈이 왔는지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고 이 경이 망토를 입지 않은 채로 홑옷을 입고 차분하게 앉아 있다. 이 경의 머리에 화단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떨어져 묻어 있었다.

 사박이며 영선이 계단을 밟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해 발걸음 소리도 듣지 못한 이 경의 뒤로 다가간 영선이 어깨에 두르고 있던 토끼털로 덧댄 망토를 벗어 손에 쥐었다. 이 경의 어깨에 망토를 두른다. 두툼한 망토가 이 경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제서야 인기척을 눈치챈 이 경이 고개를 들어 동그란 눈으로 영선을 바라본다. 두 눈을

 꿈뻑이며 영선을 바라보는 이 경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의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곧 영선이 덮어준 망토의 끝자락을 꾹 잡은 이 경이 해사한 얼굴이 되었다. 이 경의 두 눈에서 잠시 희망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손을 들어 망토가 벗겨지지 않도록 잘 잡아 당긴 이 경이 머뭇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괜찮으냐..."

 영선이 말없이 손을 들어 이 경의 머리에 가져다 댄다. 이 경이 눈을 감고 움찔할 때에 영선이 검지와 엄지로 새까만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눈을 떼어 주었다. 이 경이 주눅이 들어 시선을 피하면서 탁자 위에 올려진 함을 만지작거렸다. 영선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몸은 괜찮습니까?"

 이 경이 침묵하다가 말한다.

"괜찮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그것이 고통스럽지만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없는 이 경이 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영선이 눈을 다 털고 이 경의 앞에 놓여진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이 경이 고민하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어서 네 마음이 풀릴 수 있다면 자결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 경이 멍하게 함을 바라본다. 한참을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던 이 경은 그것을 밀어 영선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영선이 함을 열자 황옥으로 만든 진귀한 피리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선이 피리를 들어 손에 어루어 만진다.

 침묵하던 이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고의 물건이다."

 영선은 피리를 쓰다듬고 이 경은 잠긴 목소리로 말을 잇고 있었다. 이 경의 주먹이 꾹 쥐어진다. 떨리고 있었다.

"황고께서 피리를 부시면 모후께서는 금을 타셨지."

 이 경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내가 잘못했다."

 영선은 침묵하며 피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 경은 울컥임을 참으면서 간신히 말을 이으려 노력했다.

"내가 금을 배울테니, 언젠가 같이 연주할 수 있을까?"

 눈시울이 붉어지고 이 경이 애원한다. 겁에 질린 새까만 두 눈에 물기가 서려왔다. 영선이 그것을 멍하게 바라본다. 무척이나 사랑하던 이 경의 두 눈이다. 저렇게 겁에 질려서 자신을 저렇게 빤히 바라볼 때 영선은 항상 이 경을 사랑하는 마음을 참지 못해서 사랑을 속삭이곤 했었다. 영선이 피리를 손을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저는 피리를 부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이 경이 그 말에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영선이 공허한 웃음을 짓다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절을 한다. 탁자 위에 황옥 피리를 올려놓곤 격식에 맞게 크게 절을 했다. 이 경이 눈을 감고 그것을 외면한다. 목울대가 움직이고 이 경이 침을 삼키고 몸을 떤다. 영선이 다시 소매를 모아 얼굴을 가리면서 공손히 절을 했다.

"부디 안녕히.."

 허리를 편 영선이 그 즉시 정자를 빠져 나왔다. 이 경이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영선이 욱씬거리는 가슴에 입술을 깨물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빠져나갔다.

******************************

 이 경이 새벽에 일어났을 때 숙취에 두통이 심하게 일어 미간을 찌부렸다. 손을 더듬거리다가 누군가가 만져지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이 경은 자신의 허리가 찌르르 아파오는 것과 다리 사이의 질척한 느낌에 멍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았다. 몸을 웅크려 만 영선의 등이 보인다. 그제서야 이 경이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 둘씩 떠올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여 그를 본다. 피가 식어 차갑게 내려 앉았다. 이 경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

 영선의 몸이 얼룩덜룩하다. 순흔과 손톱자국, 그리고 이 경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붙들려 손자국이 이리저리 나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이 경이 공황상태에 빠져 벌벌 떨다가 이윽고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난다. 침대 밑으로 비틀 거리면서 떨어진 이 경이 바닥에 옷을 대충 주워 껴입고 그 자리를 박차서 달려 나갔다.

"폐하?!"

"입 닥쳐."

 이 경이 영선이 잠에서 깰까봐, 깨서 자신을 볼까봐 두려워 이를 악물고 중얼거린다. 충혈된 눈이 쓰라렸다. 궁 밖으로 뛰쳐 나간 이 경이 비틀거리면서 기둥에 손을 짚고 서서 몸을 추스릴 때 류 태감이 망연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이 경이 눈을 꾹 감더니 기둥에 몸을 지탱하여 어젯밤의 기억을 하나 하나 되집고 있었다.

 이 경이 영선의 입술을 강제로 헤치고 몸을 주무른다. 이성을 잃고 뺨을 비비고 혀로 살을 핥고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불었다. 맥없이 흔들리는 영선의 몸이 기억난다. 유리알 같은 두 눈으로 자신을 말없이 보던 영선이 떠오른다.

 이 경이 망연한 눈을 하다가 곧 벌벌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내가, 내가..."

 이 경이 울음을 참으면서 기둥을 발로 쾅, 찬다.

"내가 신귀비를 그, 그렇게...!"

 자신을 말없이 올려보던 호박색 두 눈동자를 떠올린 이 경이 울면서 머리를 쥐어 뜯는다. 류 태감이 그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막았다.

"폐하, 폐하!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이 경이 절규하면서 말했다.

"영선이를 내가 그렇게 대했다. 내가 그 애에게 그토록 잔인하게 굴었다!"

 이 경이 흐느끼면서 기둥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내가 왜 그랬지? 내가 왜 그렇게 그에게 잔혹하게 굴었지?!"

 이 경이 엉엉 울면서 주먹을 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류 태감이 그 허리에 잡고 그에게 매달린다. 류 태감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기 젖은 목소리로 류 태감이 통곡하여 말한다.

"폐하, 폐하! 용서를 구하세요! 진솔되게 그에게 다가가십시오!"

 고개를 흔들며 이 경이 머리채를 쥐어 잡는다. 발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듯 숨을 죽여 말햇다.

"영선이는 용서하지 않을거야. 영선이는 그런 아이니까."

 류 태감이 그에 울면서 이 경의 팔에 매달렸다.

"아닙니다. 그것은 모르는 말입니다. 정(情)이 한순간에 그렇게 멀어질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이 경이 충격에 빠져서 류 태감의 말을 듣지 못하고 벌벌 떤 몸을 진정시키지 못해 헐떡인다. 이 경이 눈을 감고 애타게 연신 말을 반복한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 경이 망연하게 그 말을 반복했다.

 손톱으로 기둥을 긁어 나무 조가리가 그 사이에 박힌다.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른채 이 경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곧 충격이 가시고 이 경이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떨었다. 영선의 곧은 두 눈이 이 경의 뇌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몸을 웅크린 이 경이 짐승처럼 흐느낀다. 벌벌 떨던 이 경의 등을 쓰다듬으며 류 태감이 한없이 애타는 목소리로 다독였다.

"오직 진실만이 답입니다. 진솔한 말 한마디만이 답일뿐입니다."

 류 태감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말을 되뇌었다.

"다가가십시오. 부디 속에 담은 말을 전하세요. 전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모릅니다. 폐하, 신귀비에게 마음을 터놓으세요."

 한참을 어룸받던 이 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황실의 비고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찾던 이 경이 이윽고 어느 한켠에 있는 상자를 품에 소중히 안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 경이 탁자에 올려진 황옥 피리를 잠시 바라본다. 이 경이 눈물이 멈춰 멍하게 그것을 보았다. 이 경이 한참을 황옥 피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폐하?"

 강 채요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궁인 나연의 팔을 잡고 더듬거리면서 걷던 강 채요가 정자에 부축을 받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 경이 지쳐서 대꾸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채요가 부축을 받으면서 절을 하고 그 자리에 앉는데 문득 황옥 피리가 손에 걸려 떨어졌다. 채요가 다급히 피리를 잡고 놀라서 묻는다.

"피리입니까?"

 이 경은 대답하지 않았고 채요가 머뭇거리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제가 피리를 불어도 될까요?"

 이 경이 대답하기 전에 채요가 피리에 입을 대고 숨을 고른다. 채요가 부드럽게 입매에 호선을 그리고 청아한 소리를 냈다. 지저귀는 새같이 낭랑하고 짜릉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경이 구름 위로 솟는 것만 같은 고고하고 청아한 소리에 문득 생각했다.

'영선이라면 분명 더 잘 불었겠지.'

 이 경이 문득 욱씬이는 고통에 가슴을 손으로 할퀴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참새처럼 가볍게 자리를 벗어간 영선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경이 고통스러워 숨을 헐떡이면서 눈을 질끈 감는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채요가 무어라고 하는 것이 들리지가 않아 이 경은 자리를 박차고 그 자리를 뛰쳐 나갔다.

 이 경이 미친듯이 달려가다가 곧 우두커니 멈추어선다. 이 경이 날카롭게 웃곤 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갈 곳이 어딨단 말인가!'

 음월전에 잠시 시선을 하던 이 경이 비틀거리면서 발걸음을 돌린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온 몸에 격통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선이 슬픈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도 곧 사라져 말없이, 그저 창백한 얼굴로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보석 같이 예쁜 두 눈에 자리하던 다정함이, 따뜻함이 사라진다. 부드러운 눈매가 휘어지고 사랑하는 것을 볼 때 환하게 웃었건만 영선은 웃지 않고 딱딱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내가 갈 곳은 모두 내 손으로 없애버렸는데.'

 이 경이 격통 속에서 중얼거렸다.

"예쁜 화원을 만들 거야. 류 사자. 그 아이가 장미를 좋아하니 겨울에도 온실을 만들어 그 아이에게 주면 기뻐할까?"

 류 태감이 목이 막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이윽고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귀비 마마께서 틀림없이 좋아하실겁니다."

 이 경이 발코로 땅을 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래야 겠다. 장미를 구하자. 온실을 만들고 장미를 채워서 그 아이에게 주자. 류 사자. 영선이가 얼마나 꽃을 좋아하는지 아느냐?"

 잠시 말을 멈춘 이 경이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주 자그마히 말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류 태감이 한참을 몸을 떨며 답을 하지 못하다가 울음을 참으며 연신 중얼거렸다.

"틀림없이 좋아하실겁니다. 폐하, 귀비 마마께서는 틀림없이 폐하의 선물을 받고 그 마음을 알아차리실 겁니다."

============================ 작품 후기 ============================

졸면서 써서 오타 작렬. 약 4kb 추가하여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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