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4 여위열기자용 (女爲悅己者容) =========================
"백번 빨아도 그 향이 가시지 않고 오히려 더 진해진다. 전설 속에서만 나오는 향으로 연원을 알 수 없으니 해로움도 입증되지 않아, 사내를 꾀고 미치게 만들며 백년 백호의 향과 천년 잉어의 눈물을 섞어 사향노루 왕의 향주머니를 융합한다. 이지를 잃게 만들어 향의 주인을 탐하고자 한다라."
찌를 듯한 목소리에 웅크린 중년인의 몸이 벌벌 떨린다. 이윽고 날카로운 음성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쏟아져 나왔다.
"든든한 후사의 아비였던 견 진이 무너지고 탐욕으로 폐하의 신임마저 잃고 작위도 뺏겨, 영오의 혼례에 간섭하다가 분노한 폐하께서 그대를 꾸중하셨으니 두려울 만도 하겠지."
음산한 목소리가 중년인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허나 사람이란 분수를 알아야 되는 법이지. 소 재도."
까득, 팔걸이를 부술 듯이 잡는 소리가 들린다. 늘어진 대나무로 만든 발 뒤에서 귀비의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은은하고도 청명한 향이 흘러 나왔고 그것은 여지의 향이었고 달콤한 과육의 향이었다. 향을 태우고 분을 지니지 않아도 과일을 즐겨 먹는 귀비의 궁에서는 은은한 과일의 냄새가 나왔다. 소 재도가 절망하여 질린 얼굴을 하여 지표면에 오체투지하고 머리를 쿵쿵, 찧었다.
"살려주시옵소서! 살려주시옵소서!"
귀비는 말이 없었고 숨을 꺽꺽 쉬면서 두려움에 휩싸이던 소 재도가 이 교활하고 위세 높은 귀비에게 굴복하여 흐느끼며 말했다.
"후궁에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는 후궁과 영합하지 않겠습니다."
"자네는 비열하고 더러운 작자지만 재주가 좋아 기용하였다."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그 너머로 들려왔다. 그 때마다 소 재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서 벌벌 떤다. 귀비가 창대한 목소리로 쩌렁하게 소리친다.
"그러나 노비는 노비일뿐! 주인을 해하려하면 언제든지 목을 쳐버려 저잣거리에 내다버려야지!"
그리고 귀비가 차가운 목소리로 읇조렸다.
"최근에 존전께서 당왕의 처가가 불손하자 처벌하셨지."
잠시 말을 멈추는 귀비가 소 재도를 차갑게 내려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벌벌 떨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것을 바라본다. 좁은 그릇에 넘치는 재능이 있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소 재도가 그런 경우이니 탐욕스럽고 속좁은 인사가 재상이 된 것에는 그의 재능이 무척이나 쓸모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경은 아직까지 소 재도를 버릴 수 없었다. 귀비가 뜸을 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탐욕도 탐욕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신의 안위라는 것을 잊은 모양인가."
소 재도가 땀을 흘릴 때 귀비의 나른한 목소리가 편전에 깔렸다.
"초심으로 되돌아가 보시오. 무엇이 가장 중요할지 생각해보란 말입니다."
소 재도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머리를 찧어 피를 질질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어리석을 소신을 깨우쳐주신 것에 감읍드립나이다. 소신이 미련하고 어리석었습니다. 강 채요와는 완전히 연을 끊겠습니다."
물러가는 소 재도를 바라보는 발 안의 귀비의 눈이 시퍼렇다. 침묵 끝에 귀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러가셔서 국사에 집중해 주세요."
영선은 독방에 앉아 손을 만지작 거린다. 채찍을 맞은 상처가 아직도 욱씬거리고 있었다. 곤욕을 치루었어도 고신을 당하지 않은 궁인들이 빠르게 일상에 적응하여 몸을 바삐 움직인다. 어둠이 가득한 방 안에서 홀로 무언가를 상념하여 방 구석을 바라보고 있던 영선이 미간을 찌부렸다.
"아정이 그 아이가 이번에 공을 세웠군요."
궁인들을 보호해하느라 유일하게 간수에게 집단으로 얻어맞았던 석 형일의 입술이 터져 있었다. 영선이 감옥에 있던 때에 아정은 받은 명을 충실하게 행하여 채요의 뒤를 캐는 것에 전념했다. 아무래도 절이 수상한 영선이 따로 명령을 내렸으나 배신할줄 알았는데 그는 영선의 말을 따랐다.
아정은 눈치가 빠르나 비열하고 권세를 따라 몸을 이리저리 처신하는 영악한 소인배에 가까웠다. 그러나 영선은 어쩐지 찝찝하여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영선이 고뇌하다가 문득 말한다.
"그저 채요가 그의 적이니 나에게 영합한 것이겠지."
잠시 생각하던 영선이 흔들리는 눈을 한다. 고민하던 영선이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고 아정에게 가자."
그래서 푸른 옷을 입고 영웅건을 두른 고 아정이 관저궁의 바닥에 엎드린다. 어느덧 백수 시골의 건달은 보이지 않고 몸이 탄탄하고 영걸해보이는 귀공자의 모양새를 했다. 옷이 테가 좋으니 비열한 눈매만 어떻게 흠이지 청사로 구름이 그려진 옷을 걸친 모습이 제법 근사했다. 무릎을 꿇고 조금의 경외와 조금의 두려움, 그리고 미미한 의문을 담아 고 아정이 영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영선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한참을 아정을 보고 있었다.
아정이 눈치를 슬금 보면서 입을 뗄까 말까 고민해을 때 영선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운정아."
아정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영선이 그를 묘한 시선을 잠시 바라보다가 중얼거린다.
"형일에게서 얘기는 들었다."
아정이 숨을 멈추고 호흡을 고른다. 입매가 뻣뻣하게 굳어지고 손이 떨려온다. 애써 괜찮은 기색을 보이려던 아정이 꽤나 볼만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은 무슨 말씀이신지?"
영선이 잠시 그를 보다가 힘빠진 웃음을 짓는다. 어쩐지 아정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해 굳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정이 손을 말아쥔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고 있었다.
"너는.."
영선이 황갈색 눈동자에 감정을 알 수 없는 무언의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아련한 목소리가 곧 고 아정의 귓가에 맴돌았다.
"인생에서 후회가 남을 짓이 몇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정이 말하기도 전에 영선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세가지가 있다."
잠시 생각하던 영선이 아정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길이 여러갈래고 그 중에서 너에게 맞는 길이 있을테지. 하지만 곧은 길은 위태롭고 굽은 길은 부딪히고야 말아 가끔씩 사람은 마음을 꺾을 때가 있다. 방향이 옳다면 어느 길이든 좋을 테지만 운정아, 너는 정말 후회하지 않니?"
"......"
아정이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을 때 영선이 속삭이듯이 말한다. 운무와 같이 흐릿하고 형체가 희미한 목소리였다. 귓바퀴에서 감돌아 사라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번민이 있고 고뇌가 있으되 나는 그 가운데에서 헤매어 나의 길을 찾고자 했다. 나는 개중에서 끊임없이 나의 위치를 가늠하여 내가 가야할 곳을 찾고자 했어. 운정. 너는 길을 잃었고 네 마음이 꺾였지.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너의 잘못임을 알것이다."
"예."
아정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오직 제 탓입니다."
영선은 그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잖아. 아정아. 너는 영오를 살렸잖니."
아정이 그에 침묵한다.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뇌했으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바닥으로 향하여 무언가를 상념했다. 문득 아정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석 형일의 얼굴과 아비의 얼굴을 교차시켰다. 그리고 저택에서 일어난 살육을 떠올린다. 아정이 창백하게 웃었다. 얼마나 멀리 와버린 것인가. 이제 되돌릴 수 있는 것인가. 귀비는 권세가 높고 교활하여 아정은 그에게 영합하고자 했다. 그러나 감옥에 간 귀비의 말을 따른 것이 곧 그의 권세를 위함인가 아니면 석 형일을 떠올린 까닭인가. 은혜를 갚고 향수를 느끼고자 하는 까닭인가.
형일이 아정을 말없이 바라보고 아정이 그 때 다시 옷을 정돈하고 정중하게 영선의 앞에서 절을 했다. 땅에 머리를 댄 아정이 손을 바닥 위에 대고 몸을 조아리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채요를 물리치겠습니다."
그를 영선이 잠시 바라보았다. 영선이 곧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더니 가뿐한 웃음을 지었다.
"석 호위."
아정이 나가고 영선이 고개를 들어 석 형일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을 한 영선이 조용히 속삭였다.
"다음은 음월전이지."
그는 아직까지도 비통함에 휩싸여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태의가 여전히 음월전에 들락거리면서 그를 진맥하고 있었으나 마음의 병이 심하여 쉽게 몸이 낫지 않는다고 하였다. 영선이 비단 휘장 앞에 앉아서 말을 가다듬었다.
희 치는 영선이 그동안의 일을 보고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휘장 아래 촛불로 인한 인형의 그림자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희 치가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영선은 뛰어난 눈썰미로 희 치의 몸이 상당히 좋지 않은 것을 눈치가 챘다. 실전으로 다져진 근육이 붙은 팔은 그 전과 다르게 뼈가 보이고 있었다. 강골이라 티는 나지 않았으나 영선은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한숨을 쉰 영선이 손목에 낀 염주를 다른 손으로 매만져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그 고통을 어찌 내 입으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영선이 침묵하다가 말했다.
"내가 너의 고민을 덜 수 있다면 언제든지 그리하겠다. 치아. 내가 너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어 슬픔을 받아주마. 너가 나를 의지하여 마음이 편해진다면 언제든지 그리하겠다."
휘장 뒤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 전 아이에 관하여 내가 이야기했던 것은 신경쓰지마라."
영선이 애틋한 눈으로 휘장 뒤를 바라보았다. 그 특유의 울림이 깊은 목소리가 그윽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네 아이를 기대하지. 너희가 많은 일을 겪어 둘 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지만.."
말을 잠시 멈추고 휘장 뒤에서 이어진 목소리가 고요히 들려왔다.
"그 사랑스러운 아이가 태어나고 언젠가 내가 안아보았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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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이 경이 내 궁에 왔을 것 같은 기분이야."
그리고 영선은 관저궁의 마당에 시립한 한무리의 궁인을 보곤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 봐. 나는 그가 어디있는지 다 알 수 있다니까."
형일은 아무 말 없이 묘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영선이 보보하면서 관저궁의 문 앞에 서고 궁인이 문을 연다. 영선이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 경이 말간 눈을 멀뚱이며 그를 보고 있었다. 강 채요와 영 가도와 함께 영선을 모욕주고, 장미원에서 윽박지르고, 채찍을 휘둘렀던 잔혹한 사내가 어디 갔는지 금새 영선을 보자 두려워서 몸을 빳빳히 굳히고 눈을 크게 뜨고 멍하게 바라본다. 영선이 손을 흔들어 문을 닫게 했다.
이 경이 영선을 흔들리는 눈으로 보면서 끙끙댄다. 잠시 배에 손을 올리고 머뭇거리던 이 경이 주눅이 들어 다가오지 않는 것에 영선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겉옷을 벗어 탁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 경이 영선이 움직이는 동선을 쫒아 그를 유심히 응시한다. 마치 자신의 기분을 살피려는 듯한 모습에 영선이 신경을 쓰지 않는 척 하면서 호갑투를 빼고 치장하던 보석을 합에 넣었다.
이 경이 풀이 죽어서 실망한 눈치를 한다. 그리고 영선이 마지막으로 귀찌를 빼고 이 경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이 경의 귀가 움찔 거리는 것에 영선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엔 왜 왔죠?"
그 말에 이 경이 눈을 크게 뜨면서 그를 본다. 영선은 차가운 목소리를 하더니 시선을 그에게 주지 않고 있었다. 이 경이 충격을 받아 멍하게 그를 보다가 이내 시선을 회피하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손가락을 말고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향.. 맡고 싶어서."
영선이 북풍한설같이 눈바람이 몰아치는 얼어붙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 경이 숨을 죽이고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에 손을 댄다. 영선이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영선의 그림자가 이 경을 덮자 이 경이 움찔하여 영선을 올려다보았다. 영선이 시선을 무시하곤 이 경의 머리를 끌어 안고 품에 안았다.
"어, 어?"
"......"
이 경이 당황하여 머뭇거리고 영선이 그를 꽉 끌어안고 손을 움찔거린다. 고민하던 영선이 손을 들어 이 경의 부드러운 머리를 매만지고 쓸었다. 이 경이 움찔거리다가 슬그머니 눈을 데굴 굴려서 영선의 안색을 살피려고 했다. 그러나 영선의 얼굴은 이 경이 품에 가둬졌기에 보이지 않았고 이 경은 포기하여 머뭇거리다가 영선의 소매자락을 슬그머니 잡았다.
영선이 이 경을 끌어안고 잠시간 서있는다. 한참을 영선이 그렇게 끌어안아주니 눈치를 보아 마음이 편치 않던 이 경도 슬그머니 그의 배에 뺨을 비비고 눈을 꾹 감았다. 영선에게서는 단 과일 냄새가 독하지 않게 나고 있었다. 이 경이 숨을 크게 들이키면서 영선의 옷자락을 잡아 매달린다. 푸른색 뻣뻣한 비단옷이 굳어지고 이 경이 옷 사이로 얼굴을 넣어 체취를 맡았다.
영선이 무감정한 눈으로 이 경을 내려보고 있다가 이윽고 복잡한 얼굴을 한다. 영선이 손을 들어 이 경의 등을 쓸고 토닥거렸다. 이 경이 한참동안 영선의 품에 안겨서 그의 향을 맡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새하얀 눈이 마른 가지에 쌓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0년- 입궁
2년- 구화사건 & 방래산
3년- 재회 및 망중요고번혹희, 희치 애 임신
4년- 연초에 임신 사건, 현재 겨울.
+) 도원향가+ 수라악도+ 현대 au... 합쳐서 세질의 소설을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