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0 여위열기자용 (女爲悅己者容) =========================
강 채요가 이 경에게서 외면받은지도 벌써 몇개월이다. 이 경과 신귀비가 항상 그렇듯이 팽팽한 기싸움을 하더니 이번에는 판이 커져서 기대를 걸고 이었는데 결국 이 경이 신귀비의 자식을 가지는 것으로 일이 끝났다.
강 채요가 쉰 목소리로 말을 했다.
"무슨 약은 듣지도 않아! 쿨럭, 컥.."
초췌한 얼굴을 한 강 채요의 볼이 움푹 파여있다. 거의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줄 알았는데 이 경이 이렇게도 쉽게 자신의 품에서 떠난다. 결국 소 재도도 연락이 없어 향도 떨어지고 강 채요가 신경이 예민해지고 화기가 솟아 몸의 기혈이 어지러져 엉망이 된 채였다. 태의가 약을 써도 몸은 좋아지지 않고 있었다. 강 채요가 한탄하면서 말한다.
"어떻게 하늘은 주유를 낳고 제갈량을 낳았는가."
나연이 채요를 살살 달래면서 말한다.
"마마. 후일을 도모하셔야지요. 몸을 살피시옵소서."
강 채요가 충혈된 눈을 하다가 이를 으득 다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강 채요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신귀비가 아들을 가지면 분명 정정하신 황상께서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들으실 것인데."
강 채요가 그 생각만해도 겁이 나서 몸을 벌벌 떤다. 아무리 담이 크고 교활한 채요라도 그 생각만 하면 몸이 떨려왔다. 소생없이 총애만으로 귀비까지 오른 신귀비이다. 감히 아들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 짐작도 하지 못한다. 강 채요가 두려움에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후와 친한데다가 이 경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거기다가 나라를 이을 황태자를 가진다. 그것이야말로 채요의 파멸의 길 아닌가.
채요가 두려움에 질려 있을 때도 그 이상으로 심란한 이가 있었다. 신귀비의 임신에 가장 촉각이 선 것은 바로 현재 태자 책봉이 미뤄지던 한왕 이 영오였다.
"아바마마께서는 생사가 불분명하시고 본왕은 혼인조차 미뤄지고.."
이 영오가 쓰게 웃었다.
"꼴이 참 좋군."
"왕야.."
측근 호위의 걱정어린 말에도 이 영오가 손을 휘젓는다. 소 재도가 한왕비로 자신의 오촌조카를 밀었다가 격분한 이 경에게 욕지거리를 얻어 먹은 것이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간다. 그 사건으로 영오의 혼례가 흐지부지되고, 현재 이 영오는 혼기가 찼는데도 이 경의 회임에 밀려서 혼담을 듣지도 못한 상태였다. 영오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왕 전하와 비슷한 꼴인가."
"왕야!"
"그나마 관저궁께서 선하신 분이여서 다행이구나."
그러나 영오의 얼굴은 착잡했다. 황제의 분노는 용이 일으키는 자연재해에 비유한다. 그만큼 그의 권위가 높고 창대하며 그 누구도 거스를 수가 없다. 황권은 모든 것에 앞서서 하물며 부모자식이나 인륜의 관계마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영오는 이 경에게 납짝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는 그리할 수 밖에 없었다.
영오는 침묵하면서 아비가 갇힌 종수궁을 바라본다. 그런 영오에게 이 경은 불효하고 겁이 많다며 실망한 상태였다. 영오는 속으로 반문했다. 그러면 자신이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저 종수궁을 열어 아비를 당장 구해와야 하는가.
그리고 그 순간 영오가 관저궁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친하고 따르던 분이라고 하지만 영오의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 관저궁에서는 창문을 닫고 문을 엄밀히 밀폐한 쪽방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영선이 조용히 보고받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정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수은이 불로환단에 쓰이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게 독인줄은 다 알지요. 쌓이고 쌓여서 수은중독이 되면 서서히 고통스러워 하여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다가 이년 후에 자연스럽게 사망하게 될겁니다."
영선이 묵묵하게 그 보고를 듣는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영선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잠시 호갑투로 책상을 도독이던 영선이 느릿하게 한숨을 쉰다.
"지금 채요의 상태가 어떻다고?"
아정이 나직히 말했다.
"제 옷고름도 못맨다고 합니다."
영선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까딱였다.
"수고했다."
채요에게 직접 손을 썼으니 아정이야말로 원수를 죽이는 것에 희열을 느껴 날라갈듯한 행복감을 느껴 복명했다. 싱글벙글 웃는 아정이 물러가고 영선이 어두운 얼굴로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상념한다. 영선은 크게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여서 표정이 좋지 못하고 어두웠는데 가끔씩 호갑투 끝을 탁상으로 긁다가 어느 순간 한숨을 흘린다.
기본적으로 영선은 독살과 암살을 꺼린다. 그 어느 상황에서라도 그는 암살로 후궁을 뒤에서 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략과 다른 성질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영선이 크게 기분이 상하여 눈을 꾹 감았다. 마음이 껄끄러워 영선은 한참을 기분을 풀지 못했다.
물론 영선이 탐탁치 않아 하는 것은 채요를 동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급박하여 궁 내에서 법도 내에서 일을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선은 대부분의 일은 수습이 가능한 선에서 모략을 했는데 이 경우는 아예 암살이라 들킬 시에 그 처리가 심히 힘들고 복잡했으며 법도를 거스르는 일 자체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어.'
각인을 하면 희락기 때 상대를 갈망하게 되고 그를 잃는다면 몹시 괴로워하여 크나 큰 고통에 휘말리게 된다. 거의 오할의 가까운 확률로 목숨이 위독하니 희락기가 삼개월에 한번로 더 잦은 음인의 각인이 더 위험하다. 이 경이 각인까지 하겠다고 하는 것을 영선이 출산을 한 후에 이야기를 하자면서 달래어 놓은 참이었다.
각인은 수천번이고 더 생각할 문제였으니 다만 그 마음을 알기에 마음을 놓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영선은 이 경의 마음 속에 오직 저뿐인 것을 잘 알았다. 떠나가고 오가는 이는 많았건만 오직 자신만이 그 다툼 끝에 그 자리에 온전히 남았다. 혹여 회임 중에 잘못이 될까 두려워 영선은 강 채요의 처치를 아정에게 명령했고 그는 꾸준히 홍리당에 하독하고 있었다.
영선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궁궐은 예외가 많은 곳이니 융퉁성이 필요하겠지.
'그나저나 초 나연이라.'
문득 영선이 소 재도의 지원이 끊겨도 사저에서 약을 챙겨먹고 명의를 부른다는 보고를 떠올리고 의아해한다. 궁에서 치료가 안되어 불안한 채요가 밖에서 사람을 몰래 불러 진찰했는데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영선이 의심을 사지 않으려 허락해준 것이다. 수은은 몸에 겹겹히 쌓이는 것이라 편작과 화타가 살아나도 치료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영선은 그곳에서 의심을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가난한 낭중의 딸 같지 않게 그녀의 옷은 귀중한 것이다. 화려하지 않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으나 눈썰미가 좋은 몇몇은 그것이 무척이나 질기고 견고한 비단임을 알았는데 영선은 그 자금줄을 캐다가 그녀의 궁인이 무척 아름답고 뛰어난 자수를 지을 줄 아는 자수 명인임을 알게 되었다. 영선이 빼돌린 그 자수 손수건 위에 곱게 수놓아진 '초 나연(草羅硏)'의 이름을 본다.
상념을 멈추고 영선은 이 경에게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천천히 방금 전의 일을 상념했다.
이 경이 영선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끙끙대고 얼굴을 부비는 것에 영선은 다정하게 이 경의 얼굴을 쓸고 배를 쓸어 주었다. 오랜만에 안심을 한 이 경이 감격에 엉엉 울다가 지쳐서 잔 참이었다. 영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간다. 새근거리면서 자고 있는 이 경의 표정이 놀랄만치 순했다. 이 경의 땀에 젖은 이마를 쓸고 퀭한 얼굴을 본다. 고생이 심한 얼굴을 한 이 경을 강렬하게 응시하던 영선이 입술을 달싹인다. 소리내지 않고 무언으로 하고 싶은 말을 입 안에 머물게 한다. 영선이 소리내어 말한다.
"나는 천그루의 벚나무에 얽혀 미망(迷亡)에 휩싸인다 한들. *여순강에 흩날리는 벚나무에 묻혀 웃을 것이다. 하나의 끝을 보지 못할지라도."
영선이 스륵 손을 떼고 창문으로 다가간다. 문을 들어 창문을 닫은 영선이 문 밖에 기척없이 서있는 석 형일을 바라본다. 석 형일이 말했다.
"그대는 그리하여 하고 싶은대로 하였습니까?"
영선이 손을 모아 흰 손등 위에 금색 호갑투를 올려 놓는다. 영선 나직히 말했다.
"그리하였습니다."
형일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는 아직도 크나큰 흔들림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에게 파편이나마 보여주십시오."
영선이 웃으면서 유려하게 말했다. 혀 끝에 말이 감아 독특하게 얽힌다. 운율이 감미롭게 형일의 귓바퀴에 맴돌고 있었다.
"천그루의 벚나무가 밤에 뒤섞여 뜻이 가지에 얽혀 나뭇가지가 단단한 우리가 되어 나락의 문이 되어 삼천세계의 꼭대기에서 십팔지옥의 아래로 떨어질지라도 이 미망에 휩싸인 사내는 하늘 위를 올려다 볼 것이다. 푸른 하늘 벚나무에 걸린 구름을 보아, 오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의 삼천대천세계를 지나친다 하여도 나는 천본앵을 잊지 못할 것이다."
형일은 눈을 감고 입을 떼지 않았다. 영선은 각오하여 푸른 빛을 띄는 눈을 반짝였다. 영선이 그를 지나쳐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살짝 열린 문을 닫으며 형일이 다시 칼을 잡아 주위를 경계한다.
이 경이 부스스한 얼굴로 움찔거린다. 하품을 하는 이 경이 기지개를 피면서 말한다.
"왔어?"
그것을 웃으면서 바라본 영선이 이 경의 볼을 쓰다듬고 귀애하는 것을 만지듯이 다정하게 속삭인다.
"깼어요?"
이 경이 그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
이 경의 모습에 영선은 그에게서 한동안 떼지 못했다. 한참 후에 이 경에게 물이 들은 사발을 건낸 영선이 침대에 걸터 앉아서 이 경의 배를 쓸었다.
"령이의 성별이 뭘까?"
영선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다.
"여자라면 좋겠는데."
이 경이 물을 꿀꺽거리면서 마시다가 사발을 탁상에 올려 놓곤 말한다.
"그 편이 좋지."
영선이 눈을 느릿하게 내리깔곤 이 경을 바라본다. 이 경이 배에 손을 올려 쓰다듬는다. 영선이 그 손 위에 호갑투를 낀 손을 올렸다.
"당신을 닮아 귀여운 황자도 좋아요."
영선이 중얼거렸다.
"못생긴 맛이 있지."
이 경이 화를 발끈 내려다가 참고 이익 소리를 내며 영선을 본다. 영선이 손을 떼고 이 경을 마주보면서 풋, 웃는다. 이 경에게 손을 뻗어 코를 잡아 가볍게 비튼 영선이 중얼거렸다.
"다행으로 생각해요."
이 경이 욱씬거리는 코를 잡고 버럭거린다.
"뭐가!"
그러고도 눈치를 보는 이 경에게 영선이 묘한 시선을 던지면서 입가를 움찔인다. 결국 영선이 입을 열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같은 *무염이 나와 같은 재주 많고 예쁜 청년의 마음을 얻은 것을."
이 경이 그 말에 이이 거리면서 영선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저도 피식 웃고 영선에게 손을 뻗어 뺨을 문댔다.
"영선아."
이 경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본다. 영선이 그 손을 잡고 조용히 눈을 감고 손바닥에 뺨을 비빈다.
"꼭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주마."
이 경이 중얼거린다.
"내가 어차피 나이가 많으니까 얼마 시간이 되지는 않을거야. 내가 죽기 전까지.. 읍?"
영선이 쓸데없는 말을 하는 이 경의 주둥이를 치고 새침하게 말한다.
"가는데 순서 없고 세상사 어찌될지 안다고 불길한 소릴해요? 그리고 걱정마세요. 먼저 가시면 재가할겁니다."
"뭐?!"
이 경이 곧 눈을 부라리며 성질을 낸다. 바로 이불을 걷어찬 이 경이 발악하면서 말했다.
"나 죽으면 바로 장가간다고?!"
"그 때쯤에도 앞날이 창창한 중년일텐데 그럼 독수공방하라고?"
"너, 너, 익!"
이 경이 혈압이 올라 얼굴이 붉어진 것을 잠시 재밌게 바라보던 영선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그러면 재가하지 않고 령이랑 우리 또 다른 아이들과 함께 오순하게 지낼게요."
이 경이 그 말에 주춤하여 화를 가라앉힌다. 순식간에 온순한 양처럼 변한 이 경이 배를 매만졌다. 장난기 가득하여 그를 놀리는 영선에게 화를 내기는 했으나 이 경은 영선이 자신이 죽으면 재가하는 것이 싫기도 했으나 사실 그랬으면 하는 마음도 그 한켠에 있었다. 그러나 차마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우물쭈물하던 이 경이 결국 말을 못하고 동그란 눈으로 영선을 바라본다.
영선이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 경이 마음이 놓여서 곧 영선의 손을 잡고 그에 깍지를 꼈다.
곧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고 이 경이 아홉달 쯤에 입조하지 않고 관저궁에 머물러 몸을 뉘였다. 두 사람이 곧 세상 빛을 볼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 그 어느날, 계자가 급하게 달려들어 영선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의아해하는 이 경을 뒤로하고 영선이 무언가를 눈치채고 말을 둘러대곤 쪽방으로 간다. 계자가 몸을 조아리면서 말했다.
"한왕 전하께서 종수궁 폐비 견씨를 풀어주어 빼돌릴려다 발각되었답니다."
영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호갑투 끝이 꺾여서 부러진다. 계자가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지금 궁에서 가장 권위가 높으신 책임자는 귀비 마마이십니다."
영선이 한참을 말없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 작품 후기 ============================
주석 1. 여순강은 벚꽃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벚꽃은 지는 모습이 더럽고 꽃잎이 화려하여 천박한 꽃으로 인식되었다.
주석 2. 못생긴 사람.
2. 유치하지 않게 멋진 장면을 쓰는 것이 진짜 어렵네요ㅠ.ㅠ 내일이 챕터 마지막인가요. 하이라이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