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여위열기자용 (女爲悅己者容) =========================
희 치가 황후의 일을 위임하여 내명부를 비롯한 외명부, 국가대사를 영선이 처리한지 오래였다. 도 요소가 황후 인새를 가지고 있어 그저 도장을 찍을 뿐이었고 이미 영선은 해산이 얼마 남지 않은 이 경과 비통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희 치를 대신하여 궁중의 제일의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영오. 이 영오를 떠올린 영선의 얼굴이 크게 굳어진다. 장성한 아들 중에서는 대안이 없으니 오직 한왕만이 태자로 점찍어져 있으나 이 경은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영선이 딸을 가지고 싶다고 한 것이 그 이유였다. 이 경이 영선의 말에 응했으니 그 말에는 영선의 핏줄로 황자를 가질 때를 염려한 것이다.
결코 황제의 아비가 될 생각이 없었다. 영선이 한참을 고민하다. 국본의 일은 그 영선 또한 그 답을 찾기 어려워 하여 그 여파를 두려워해 심사숙고하는 일이었다. 영선은 초야 때부터 함께하여 쭉 그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던 견 진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어리고 똘망한 눈을 가진 황자를 생각한다.
영오를 품에 안은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영선이 크게 탄식한다.
"황궁이 이렇듯 비정하구나."
선택의 가지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영선이 눈을 꾹 감고 안타까운 얼굴을 한다. 견 진은 너무나도 일을 크게 벌였고 선을 지독히도 넘었다. 그 상대는 더욱 좋지 않았고 영선은 이 경이 이 일을 알고 충격을 심히 받을 것을 알기에 그에게 알리지 않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길 원했다.
종수궁에서 콧대가 내려 앉고 광대가 부서져 그 찬란했던 미모를 잃은 사내가 말없이 앉아 있다. 견 진의 전아유려한 얼굴은 움푹 내려 앉아 있었고 그 두 눈 안은 감정 없이 공허함만이 가득 차 있다. 종수궁은 엄히 통제되어 그 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단정했으나 풀빛이 가득하던 소담한 경치가 아닌 장초(長草)가 무성히 난 귀곡산장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궁인들도 죽고 없어 견 진이 산발이 되어 그 자리에 허망한 표정을 지어 빈 껍데기 처럼 앉아 있다. 영선이 그에 다가가면서 씁쓸함을 삼켰다.
"견 형님."
멍하게 있던 견 진이 이윽고 천천히 목을 꺾어 영선을 바라본다. 용케도 모진 목숨을 이어가 그 몰골에도 숨이 붙어서 오직 육신만이 남아있다. 시체와도 같은 몰골에 영선이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꺾어 견 진의 어깨를 잡았다. 점취와 벽옥, 담수 진주로 장식한 화려한 전자에 새의 날개가 떨리고 있었다. 옥패가 스치고 영선이 견 진과 눈을 마주했다.
"영오는 태자가 될 겁니다."
견 진의 눈에 그제서야 생기가 돈다. 영선이 그에게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오가 총명하니 대안이 없고 지금 아이를 낳아 보았자 나이 차이가 심합니다. 제국을 잇고 훗날 황제가 될 것입니다."
창살 사이로 빛이 아주 조금 스쳐 들어온다. 견 진이 몸을 떨면서 그를 본다. 영선이 몸을 일으켜 손을 공손히 모은 상태에서 견 진을 단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한참을 망설인다. 견 진이 이윽고 흐느끼더니 말했다.
"아교는 아마 죽을 것이겠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사내의 흐느낌이었다. 정말로, 진실로 사랑했다. 자신을 희롱하고 버린 사내를 서방으로 두어 그 총애만을 원하다가 오직 우연으로 발견한 연인이였다. 그가 이 경에 대한 복수심으로 일을 꾸민 것을 알았다. 이 경을 증오하여 그의 것을 탐하고 결국 이 경에게 사통의 모습을 보여 견 진을 이용한 것을 안다. 처음부터 알았다. 하지만 견 진은 그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를 버릴 수가 없었다.
아교는 부드럽게 웃었고 항상 온화하게 그를 맞이했다. 나의 아교. 견 진이 과거를 생각한다. 영오를 위해서라도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채찍을 쥐어 고삐를 당겨 길을 돌아가려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독배를 삼켰다. 아교의 향이, 아교의 몸이, 아교의 목소리가, 아교의 그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젠 아교 또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파멸을 알면서도 사랑했었건만 드디어 최후가 오고 있었다.
절망하는 견 진의 머릿 속에 영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아교를 위하여 젖혀 놓았던 영오에 대한 부성애가 솟아 오르고 있었다. 견 진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깔끔히 갈 수 있는가."
영선이 품에서 옥자기를 내놓은다. 견 진이 그것을 몸을 떨면서 잠시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그것을 받는다.
뽕, 소리와 함께 뚜껑을 연다. 견 진이 눈을 감고 잠시 상념했다. 영선이 그를 인내심이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견 진이 그 불길한 향을 맡고 침을 삼킨다.
한줄기 빛이 견 진을 비추고 있었다. 영선이 눈을 묵묵히 감고 그 사내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영선이 이윽고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아교를..."
견 진이 흐느끼면서 자기를 내려놓는다. 영선이 견 진을 창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교를 한번만 보게 해주시게..."
견 진이 절망하여 몸을 웅크린다. 피를 토하는 음성으로 견 진이 절규하여 영선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교를 한번만! 한번만!"
영선이 순간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소매를 떨쳤다. 견 진이 나뒹굴면서도 엉엉 울면서 바닥을 내리쳤다.
"한번만!! 제발 한번만!! 귀비! 제발 한번만 내게 온정을 베풀어 주세요! 내가 그를 한번만..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게..."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영선은 그 어느 말도 할 수 없었다. 비통하게 우는 견 진이 가구를 붙잡고 손톱에 피가 나도록 그를 긁는다. 울음을 터뜨린 견 진이 충혈된 눈을 하여 헐떡거리면서 아교를 부르짖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아교를 찾고 있었다. 영선은 그 모습이 익숙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랑에 모든 것을 버리고 미쳐버린 사내의 모습이 누군가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지독히 어린 사내에게 더 냉정하게 말을 하지 못해 영선은 그저 그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흘 내로 끝내시오."
종수궁 밖을 나간 영선은 태양빛을 피하여 그늘로 들어가 어둠에 얼굴을 숨겼다.
마음에 칼날이 가득찬 날이었다.
감금당한 영오는 몇번이고 파발을 보내 영선에게 빌었다. 영선은 그를 무시하고 이 경의 몸을 끌어 안고 있었다. 이 경이 냠냠 거리면서 포도를 먹고 영선이 단 과즙을 닦아 준다. 영선이 이 경의 입 앞에 손을 내밀자 이 경이 씨와 껍질을 뱉어 낸다. 이 경이 숨이 색색거리고 있었다. 산처럼 부른 배를 다정하게 쓰다듬은 영선이 눈을 휜다.
"령이가 건강하게 자라려나보다."
"응?"
"이렇게 어미가 많이 먹는 것을 보니.."
입맛이 떨어진 이 경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에 영선이 황급히 이 경의 뺨에 입을 맞추곤 변명했다.
"복스럽게 먹는게 예뻐서 그래요."
이 경이 영선을 뚱하게 보다가 다시 포도알을 세개나 뜯어서 입에 한꺼번에 털어 놓았다. 이 경 답지 않게 식탐을 드러내는 행동이었으니 이 경은 알을 으깨고 쪽쪽 빨면서 포도를 이미 다섯통째 먹고 있었다. 속으로 영선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생각한다.
'원래 이렇게 살이 많이 붙나?'
볼이 탐스럽게 통통해진 이 경은 산부치고도 매우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그것이 싫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촉감이 물렁해서 좋은 영선이지만 그 전에도 기승위나 성교를 할 때 고생을 많이 했는데 앞으로 더 어떨지에 관한 불길한 상상을 하며 어색하게 이 경을 바라본다.
이 경이 우물거리다가 씨를 뱉더니 잠시 눈빛을 날카롭게 하여 입을 다문다. 영선의 어깨를 살짝 밀어 떨어트린 이 경이 입을 수건으로 닦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궁궐에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영선의 몸이 움찔거린다. 이 경을 위해서라면 거짓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은 침착한 목소리를 하고 있었고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영선은 국사를 돌볼 때의 이 경임을 깨닫고 조용히 말했다.
"종수궁에서 폐비가 탈출하였습니다."
이 경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포도를 침상 옆 탁상에 달그락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떼어 낮게 울리는 소리를 내었다.
"어떻게 처리했지?"
영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사에 관련된 일이므로 그 하나로 끝낼 생각입니다."
영선이 손수건을 품에서 꺼내어 이 경의 턱을 잡아 들어올린 뒤에 자주빛이 물든 입술을 톡톡 건드려 닦는다. 이 경이 말을 하려다가도 순식간에 힘이 풀려 눈을 동그랗게 뜨곤 영선을 바라본다. 영선이 꼼꼼하게 입을 닦곤 손을 물리고 작게 웃었다.
"됐다."
이 경이 엉겹결에 마주 웃다가 아차하여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영선의 앞에서 웃음이 헤픈 바보가 되었다. 영선이 그에 살폿 웃음을 흘리고 이 경이 애써 황제의 위엄을 찾으려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잘했다. 견 진은 그저 신경쓸 필요도 없는 그저 하찮은 종자이다. 영오가 비록 그 핏줄이지만 대안이 없고 영명하니 어쩔 수가 없지. 뿌리를 뽑을 수야 없는 노릇이다."
이 경이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이 작교를 이제 죽일 때가 되었는가."
이 경은 한참을 생각하는 듯 했다. 미안함과 증오, 열등감이 교차하는 이복형을 천천히 생각한다. 이 경의 눈은 어느새 과거를 헤치고 있었다. 영선이 그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인 동생이 모후에게 죽고, 그를 응원하고 지원해주던 든든한 사촌 동생도 죽었으며 자식처럼 아끼던 조카 또한 결국 짐이 암살했고 어린 여조카는 노인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냈으며 불임의 여인과 강제로 혼인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처가가 내게 대들자 이번에 박살냈지."
숨을 짧게 들이킨 이 경이 짤막하게 말한다.
"나는 이 작교에게 원수다."
영선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고 이 경은 한숨을 쉬고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배를 더듬어 만지는 이 경이 고요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나는 그를 증오하지 않는다. 안타까울 뿐이지."
일련의 사건이 지나고 이 경은 그제서야 이 작교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군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강남귀족과 얽힌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이 경은 더 이상 후회할 수도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이 경이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보국의 병권이 내가 파견된 섭정 대신에게 넘어가고 이 작교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이젠 실제로 운용할 수 없는 병력도, 세력도, 그 아무것도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교에게는 희망이 없어."
문득 이 경이 실없는 생각이 들어 농담삼아 말했다.
"내가 모르는 황실의 비밀통로라도 있으면 혹시 또 모르겠지만."
영선이 씩 웃으면서 이 경의 농담을 받았다.
"그 때는 내가 지켜주면 되지, 안 그래요?"
이 경이 영선의 코를 비틀면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참 믿음직스럽다, 요 놈!"
영선의 마른 팔을 꽉꽉 누르면서 이 경이 장난을 치자 영선이 팔을 빼내면서 샐쭉한 표정을 했다. 이 경이 잠시 웃더니 나직한 목소리를 낸다. 눈이 아득히 가라앉아 있었다.
"해산하고 정사를 돌보기 시작할 때 가장 처음으로 이 작교를 편히 보내줄 것이다."
이 경이 입술을 달싹인다.
"이젠 돌아가기는 너무 먼 곳이지. 너무 멀리 와버렸어. 이 작교는 존재 자체로 나의 보위 간에 항상 가장 큰 위협이었다."
영선이 이 경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이 경이 웃으면서 영선의 손을 잡아 당겼다. 영선이 이 경의 배를 피해 그 옆으로 굴러 자리하며 고양이처럼 얄상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 경의 몸을 끌어 안았다.
"걱정하지말고 한숨 자요."
달콤한 숨을 이 경의 귀에 불어넣자 이 경이 파득 몸을 떨면서 웅크리며 눈을 말똥히 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영선이 다정하게 그 뺨을 쓸면서 말했다.
"모든 일은 령을 보고난 후에 결정해요. 푹 자고 일어나서 내일은 오랜만에 원소병을 해줄게요."
이 경이 고개를 끄덕였고 영선이 웃으면서 이 경의 목에 손을 둘렀다. 이 경이 영선의 팔을 베고 몸을 꿈틀 거리면서 영선의 품에 파고들었다. 배에 손을 올리며 이 경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윽고 졸음이 들어 입을 움찔 거리다가 새근거리는 소리를 낸다. 영선도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를 쓰다듬다가 이윽고 눈을 꾹 감았다.
새벽에 소란이 일었다.
예민한 영선의 눈이 먼저 번쩍 뜨여졌다. 영선이 금새 정신이 들어 날카로운 눈을 빛내어서 상체를 일으키고 휘장 밖을 바라보았다. 발자국이 쿵쾅이는 소리와 함께 우르르 무언가 부딪히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고양이 같은 영선의 두 눈이 세로로 길게 빛났다. 비명소리가 찌를 듯이 들려오고 매캐한 냄새가 나자 영선이 황급히 이 경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폐하, 폐하!!"
"으음?"
이 경이 눈을 부비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멍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해사하게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으나 그 마음을 표현할 틈도 없이 영선이 무섭도록 창백해진 얼굴로 이 경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잔뜩 굳어진 얼굴을 한 오 상환이 산발을 하여 들어와 그 둘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경이 옷을 가다듬어 흐트러진 차림을 정비하고 정신을 못차려 말을 한다.
"무슨 일이냐?!"
오 상환이 우렁찬 목소리로 황급히 답했다.
"당왕입니다!!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신을 따라 오시옵소서!!"
이 경의 얼굴이 뻣뻣히 굳어져 가고 팔을 잡은 영선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이 경이 대답도 하기 전에 오 상환이 무례하게 휘장을 찢고 그 둘의 팔을 잡고 일으킨다. 오랫동안 그를 모신 충정을 아는 이 경이 화를 내지 않고 오 상환의 말에 따라서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한 손은 배에 가져다 대고 이 경이 영선을 그의 뒤에 숨긴채 손을 꾹 잡고 있었다. 이 경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영선이 이 경의 팔뚝을 꽉잡고 있었다. 이 경이 영선을 안심시키려는 듯 그의 손을 꼭 붙잡는다. 오 상환이 궁궐의 문을 열고 매캐한 연기를 헤치고 앞장서서 길을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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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후에 챕터 완결입니다 흑흑 너무 기뻐요
비밀통로 견진외전이랑 중간중간 언급되어있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