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3 여위열기자용 (女爲悅己者容) =========================
지키기로 하였지 않는가.
이 경이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는 입을 막고 욱욱이는 울음을 참으면서 병풍 뒤에 숨겨진 벽장 안에 숨어 몸을 웅크렸다. 지키기로 했었다. 그 아이가 허약하여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이 경이 부른 배가 이제는 원망스럽다가도 소리를 죽여 눈을 꾹 감고 몸을 떤다. 이 경은 지금 전력 외로 오직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영선이 옳았다. 이 경이 참고 견뎌서 목숨을 연명하는 것만이 바로 승기를 잡는 일이었다.
아주 미미하게 소리가 들린다. 진동이 들리고 창과 칼, 방패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소리가 들려올 때 이 경은 뛰쳐 나가서 바로 그들 사이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이 경의 눈매에 눈물이 고여 흐른다. 이 경의 사람들이 저기서 죽어가고 있었다. 어림군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웃는 청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영선이 자신을 위해 낭인들을 따돌리려고 하고 있다. 죽음을 각오하여 전장에 갔는데 이 경은 장에 웅크린채로 있었다.
이 작교의 계획이 소수정예로 황궁을 장악하는 것이니 이 경의 생사가 이 반란의 승패를 가른다. 이 경도 그걸 알지만 절망감에 떨고 있었다.
'너만 아니라면..'
령만 아니라면 이 경은 영선을 그렇게 무기력하게 보내지 않았다. 이 경은 그러나 이를 악물고 숨을 죽였다. 어쩔 수가 없었다. 영선은 돌아온다고 했다. 그리고 영선은 이 경에게 약속한 것을 단 한번도 어기지 않았다.
지킨다고 하였음에도 검 한번 들어보지도 못했던 아이가 저기에 있다. 이 경이 속으로 절규한다. 그들이 죽이려는 것은 이 경이고 노리는 것도 이 경이고 이 작교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도 그에게 있다. 모든 것은 이 경에게 책임이 있는데 그 아이가 왜 저곳에 가야하지.
왜 나 대신에 죽어야 하지. 아니다. 이 경이 화들짝 놀라서 심장을 쿵쾅거린다. 영선은 죽지 않는다. 돌아온다고 했다. 무심코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간다. 이 경은 그러나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이 경이 그제서야 인정했다.
'넌 왜?! 넌 왜 하필이면 나에게 와서 그를 괴롭히는거야.'
령을 원망한다. 영선을 괴롭히고 자신에게 절망을 안겨준 령을 무심코 원망하던 이 경이 머리를 쥐어 뜯었다. 충혈된 눈에 분노가 서렸다. 저기 밖에 어둠을 뚫고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던 사랑하는 정인이 밖에 홀로 있었다. 이 경을 대신하여 그 칼날이 향할 곳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하여 망설임없이 뛰쳐 나갔다.
'황룡을 허용하지 않았어야 했어, 그에게 황룡을 주어서는 안됐었어.'
이 경이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뜯는다. 헝크러진 차림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면서 핏발 선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태웠다. 이 경이 과거를 처절하게 후회한다.
'황룡패용을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래서 영선이 아예 꿈도 꾸지 못하게 했었어야 했다. 이 경은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 경이 아무리 무시하려해도 현실이 그를 옥죄고 있었다. 그조차 목숨을 보존하기 힘든 상황에서 영선이 그를 행세하여 돌아다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경이 소리내어 통곡하고 싶으나 영선과 상환, 그리고 어림군들이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숨을 죽인다. 이 경은 시간과 싸워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모진 목숨을 버텨야 했다.
이 경이 배를 쥐고 헐떡인다. 배가 아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 경이 이를 악문다. 발바닥을 오므리고 이 경이 온몸에 힘을 주고 입을 막았다.
"...결국 죽었다고."
"간발에 차이로... 어쩔 수 없었다는군."
묵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린다. 한숨을 쉬는 소리도 들렸다. 두 사내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쨍그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건을 부수는 소리가 났다. 이 경은 그들이 병풍을 스쳐갈 때 머리털이 서는 긴장을 느끼며 숨을 멈췄다. 사내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왕이 그걸 알고 미친듯이 분노해서 황제를 끌고 오라고 명령한 상태다. 정 안되면 죽이라지만 어쩔 수 없지."
감히 왕과 황제를 무례하게 칭한 야인이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돈을 받았으면 그 값은 해야지. 그저 끌고 가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손수 칼로 찌르라고 해."
이 경은 그 말이 종수궁을 뜻하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시려온다. 결국 견 진이 죽었는가. 이 작교가 그에 분노하였는가. 이 경은 복잡한 심경이 되어 멍한 눈을 한다. 그토록 수모를 당하고도 몸을 웅크렸던 이 작교는 한낱 사통한 이의 죽음에 분노하여 반역하였는가. 이 경은 그동안 이 작교를 경계했던 자신이 우스워져 헛웃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 이 경은 눈을 감고 몸을 떨었다.
방을 쓸고 뒤지고 신발로 짓이기던 사내가 혀를 차면서 문을 박차는 소리가 들린다. 발자국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더 여기에 있어야하지?'
이 경이 불안에 가득차서 빛 한점 없는 어둠 속에서 더듬인다. 이 경이 그 순간 오한이 들어 이를 악물었다. 배가 아파오고 있었다. 이 경이 신음성을 죽였다. 아픔이 그를 장악할 때 이 경은 손바닥에 손톱을 피가 나도록 파고들게 하여 힘을 준다. 이 경의 눈에 핏줄이 터졌다. 몸을 웅크리면서 고통을 참는다.
"으..."
인기척이 사라졌는가. 발자국 소리가 없다. 간간히 천자를 죽이라는 함성이 나올 뿐이었다. 이 경이 고통을 끙끙 거리며 참는다. 어둠 속에서 시간 감각이 엉망이 되고 있었다.
아프다. 미친듯이 배가 아려온다. 미칠 듯한 고통 속에서 이 경이 눈물을 죽죽 흘렸다. 전장터에서 느껴본적이 없는 고통이 그를 스친다. 이 경이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윽.."
죽인 신음에 화들짝 놀라서 이 경이 입을 가린다. 온 몸에 긴장이 서려 근육이 팽창되고 눈을 굴린다. 이 경이 촉각이 서서 불안한 마음을 삼킨다. 아니다. 인기척이 없었다. 그리고 이 경의 생각대로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고 벽장은 열리지 않았다. 이 경이 긴장이 갑자기 풀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때 이 경의 배에서 강렬한 충동이 느껴졌다. 이 경이 또다시 미약한 신음을 흘린다.
"으윽.."
동시에 어둠 사이로 빛이 맹렬하게 헤쳐 들어온다. 이 경이 눈을 크게 뜬다. 빛과 동시에 무언가가 번쩍인다. 이 경이 팔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충격에 비명을 죽였다. 칼이 파고 들고 있었다. 이 경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팔을 움켜쥔다.
"으읏!!"
이 경이 넋을 잃고 정면을 바라본다. 삿갓을 사내 하나가 음침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 경이 멍하게 그를 보다가 곧 배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배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으으윽..."
이 경의 부른 배를 보면서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 낭인 하나가 중얼거린다.
"즐거운 유흥거리가 하나 생겼군. 좋은 선물이야."
그리고 즐겁게 말한 낭인이 그의 머리채를 잡아 확 끌어 당긴다. 비명을 지르면서 이 경이 벽장에 허우적 거리면서 떨어진다. 간신히 발을 딛은 이 경이 배를 움켜쥐면서 고통에 신음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은 사내가 우렁차게 소리지르면서 그의 머리를 잡아 흔들었다.
"황제를 생포했다!!! 이 경이 여깄다!!! 내가 잡았어!!!"
공을 세워 즐거워하는 사내가 이 경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어 복도를 걸었다. 이 경이 머리채보다 배의 통증을 느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곧 무기력하게 이 경이 대전에 던져졌을 때 이 경은 바닥에 손을 짚고 배에 손을 대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는 옥좌 위에 앉은 사내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백학을 닮고 매화의 향이 나는 사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경이 고통 속에서 의식을 잃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본다. 이 경이 멍하게 그를 보곤 저도 모르게 중얼인다.
"아이를 살려줘..."
당왕 이 작교가 옥좌 위에서 이 경을 핏줄이 터져 증오를 담은 눈으로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진진이 죽었다."
이 작교가 침을 삼키고 메마른 목소리로 말한다.
"결국 일각의 차이로 진진을 살리지 못했어."
몸이 떨린다. 이 경이 귀가 멍멍해 그가 무어라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해 바닥을 긁었다. 이 작교는 벌레처럼 바닥을 기는 이 경을 담는 핏발 선 눈에 소리없는 눈물을 흘린다.
"진이 나 때문에!! 그 아이를 결국 이용만 하다가 놓아 버렸어!"
증오를 담아 소리치는 목소리가 결국 이 경의 귀에 들렸다. 이 경이 죽은 신음을 흘리고 몸을 멈춘다. 이 경이 고개를 들어 이 작교를 바라본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익숙한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울고 있었다.
"너와 나는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고 너는 나에게 너무 잔혹했다."
이 작교의 힘빠진 목소리가 이 경의 귓가에 울렸다.
"너와 그 뱃속의 아이가 진진, 그 아이를 위한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이 경이 처음으로 이 작교에게 공포심을 느껴 배를 더듬었다. 이 작교가 슬프게 웃으면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곱게 보내지는 않아."
============================ 작품 후기 ============================
생각보다 너무 길어지네용 2~3편은 더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