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9 화조풍월(花鳥風月) =========================
어떻게 살았냐하면 정말 빈한하게 살았다. 대궐같은 집을 떠나 먹을 것을 굶어가고, 체면이 상한 본가에서 몇번이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오라 사람을 보내도 돌아가지 않았다. 투쟁이라 말하는 것이 옳을 만큼의 처절한 삶이었다.
양모가 죽은 기루에도 돌아가지 않아 그는 빌어먹지 않고 도시 외곽에서 나무뿌리를 잘근 먹으면서 살았다. 간간히 그가 기루에 들러 누이처럼 돌봐주었던 은인들을 보며 인사를 해도 그는 그녀들의 안타까움이 섞인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지독한 가뭄이면 도시의 사람들은 멀쩡했으나 성 밖의 이들은 손을 쓸 수 없어 굶어죽곤 했다. 거지나 비렁뱅이 같은 자들이 셀 수도 없이 죽는 것을 눈에 보았다. 흉흉함도 보았으나 삶을 놓지 않았다.
조금 크기 시작하자 물을 깃고 장작을 해다주어 어린 시절을 버텼으나 나중에는 토끼를 잡아 내다팔고 향후에는 청루의 기녀들이 가르쳐준 얕은 문자를 조합하여 쉽고도 유려한 문장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부터는 돈 석푼을 받아가면서 기루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영선은 지나가던 중에 퇴기 하나가 창가에 앉아서 구슬프게 노래하는 것을 보았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영선은 돈 대신에 비파와 악기를 배우기를 원했다.
루주가 사양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늙은 퇴기라 쓸모가 없었다. 영선은 단지 마음에 있는 한마디의 말을 표하고자 했다. 담긴 마음을 몸 밖으로 표현해 내보내면 이 가득찬 한이 좀 줄어들까.
영선이 악기를 연주했을 때 설움과 슬픔은 죽고 이윽고 평안함이 그에 자리했다. 영선은 악기를 다룰 때마다 고요함을 느꼈다.
석 형일이 다시 그를 보았을 때는 영선은 열다섯의 나이였으며 호리하지만 또래보다 제법 키가 큰 소년이 되어 있었다. 석 형일은 어릴 때의 얼굴이 남은 여우상에 눈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소년을 보고 당황하여 서 있었다.
"피는 꽃으로 화려하게, 지저귀는 새로 능란하게, 부는 바람으로 산뜻하게, 달돋이로 황홀하게."
소년이 중얼거렸다.
"살아보니 내 인생에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씩 웃는 미소는 장난기가 넘쳤으며 그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저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저렇게도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더라. 석 형일은 그에 그 소년이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으나 그가 살고 있는 환경에 기염하여 그를 추궁했다.
그리고 형일은 이어지는 소년의 말에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몸을 두는 곳에 마음이 가야하는데 제 마음이 그곳을 떠나는데 제가 있어야 합니까."
또랑한 눈으로 바라보자 형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소년은 말을 하지 않았으나 형일은 이제 어떤 말로도 소년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소년은 스스로 성장했고 형일은 소년이 원하여 검을 가르쳤다. 곧 형일은 소년이 원래부터 검을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석 형일은 그가 백리 세가의 자제임을 뒤늦게 알았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장강 남쪽에 대대로 이름을 날리던 가문은 민초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던 의가(義家)였다. 그러나 얄궂은 장난인가. 가장에겐 의로운 세가 떠나니 가세가 기울고 가문의 명성이 사라졌지만 막상 박대한 장남에겐 선조의 기품이 이어졌으니 석 형일은 묘한 감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늘은 존재하는가."
창문에 앉아 다리를 꼬고 비파를 켜는 소년의 눈이 유려하고 밝았다. 석 형일은 생각한다. 저 나풀거리는 속눈썹을 깜빡이며 비파를 연주하는 소년에겐 열살이 될때까지 그가 본가에서 보았던 검술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한번 본 검은 잊지 않는다라. 품성이 정심정명하고 성실한 그에게 선조의 검술이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석 형일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어려운 자를 내시면 동시에 그를 구원하기 위한 선한 자를 내는가.
석 형일은 그 후에도 때때로 생각하곤 했다. 진흙탕 속에서 꽃피워 결국 남준이 된 그 소년의 존재가 하늘의 뜻이 아니한가. 그리하여 어려운 사람을 구하고 빈한한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올바른 사람을 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가끔씩 석 형일은 소년의 고향을 들렸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소년과 교류하였다. 어느새 성장한 청년이 이제는 고급 홍루에서 초빙하려 노력하는 유아한 시문을 읇고 아름다운 비파를 켠다. 기루에서 선생 노릇을 하던 청년을 처음에 비웃던 본가는 가세가 기울어 완전히 망해가는 시점에서 그에게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저 옛날의 가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은 양심이 없구나!"
석 형일이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영선은 묵묵히 앉아서 상념하고 있었다.
"어찌 할거냐?"
영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준 돈으로 무능하고 멍청한 아버지를 부양한다. 영화당의 큰마님이 비참함에 처음에 그 돈으로 연명하지 않겠다고 악다구니를 썼으나 곧 어쩔 수가 없어서 체념하고 원을 보내 돈을 받았다.
"원아."
"형님!"
영선이 비단주머니를 그에게 올려 놓은다. 원이 그것을 받곤 잠시 걱정어린 눈을 했다.
"매번 감사합니다. 그런데 형님은 끼니를 잘 챙기고 계신가요?"
영선은 원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일곱살 어린 이복동생과는 사이가 무척 돈독했다. 부모대의 원한을 자식에게 내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물며 영선은 이젠 원한도 있지 않았다. 그저 그것은 지나간 일일 뿐이다. 이제 파산한 가족에게 화를 내기도 뭣하지 않은가. 이제 영선에게 남은 건 그저 유려한 시 뿐이었다. 영선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이 형님은 누구보다 잘 지내고 있단다."
원이 잠시 그를 노려보면서 중얼거린다.
"또 술을 진탕 마시고 토하고 그런건 아니죠?"
영선이 밖에서 하도 나돌아다니니 체면이 떨어진 본가에서 하도 영선을 붙잡은 적이 있었다. 영선이 그 때 술을 먹고 진상을 부리니 질색하여 그를 놔주었는데 집안에서는 그것을 몇번이고 반복해서 잘근 씹곤 하였다. 애초에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술이 몸에 잘 받아 토한 적도 별로 없다. 영선이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밤에 빛나는 구슬이라 할지언정 어찌 술을 마시며 시름을 잊는 것에 미칠 수 있으랴."
영선이 빙그르레 돌자 흰 옷이 펄럭인다. 원이 웃음을 참으려 입가를 씰룩거리면서 말했다.
"이제 곧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문득 원이 하는 말에 영선이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 왜? 형은 부담이 되지 않는다."
영선은 홀홀단신이니 소식을 하고 잠도 기루에서 자서 돈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좋은 비파는 그를 알아보는 악인이 선물하고 제자들이 앞다투어 옷을 사주니 영선은 돈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형님도 결혼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혼기가 지났는데도 영선은 가례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영선이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긴긴 머리카락처럼 깊은 인연으로 얽매여, 절대로 끊기지 않아 믿고 의지할 나의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런 사람을 찾으면 결혼할겁니까?"
"*한가닥 소문에 매달려 내 사랑의 집을 찾아야지."
그 능청스러운 말에 원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조고의 은혜를 입어 교분을 깊게 맺었던 관리와 혼담이 오가고 있습니다. 마침 그에게 제 나이대가 비슷한 손녀딸이 있다고 하군요."
영선의 표정이 굳자 원이 황급히 말했다.
"저는 좋습니다. 집안도 좋고 미녀라고 하니 제가 꺼릴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저에게도 좋고 양친께도 좋은 일이니 기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영선은 탄식했다.
"그래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니지."
그렇게 말하는 영선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원은 곧 그의 말벗이 되어 몇마디 말을 나누다가 홀연히 돌아갔다. 영선은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비파와 검으로 누더기가 된 손을 바라보고 느릿한 한숨을 쉬었다. 비파를 탁탁 건드리면서 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는 누이같은 네가 내 마음을 달래주었건만 왜 요즘엔 비파를 켜도 마음이 편치 않는 거지?"
영선이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변덕이 심해 긴 밤 어둠 속에서 누이를 열렬히 원하던 마음이 변해버린 걸까."
비파에게서 농삼아 말한 영선은 멋쩍어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영선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화조풍월을 읇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꺄르르 웃는 기녀들에게 엄한 표정을 지으면 동년이라지만 찔끔대면서 조심히 그 앞에 앉아 비파를 만졌다. 영선이 비파를 켜면 기녀 하나가 청아한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 *임의 대문 앞, 사람의 출입은 적고 날마다 푸른 이끼만 자라요.
빙글 도는 여인의 미소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데 영선은 말없이 비파를 켤 뿐이었다.
- 이끼가 짙어져도 다 걷어내지 못하고 가을바람은 일찍 불어 낙엽은 우수수.
춤이 끝나고 영선이 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좋아요."
여인이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본다 .엄하던 영선이 처음으로 칭찬을 한 것이다. 영선은 싱글 웃다가 이윽고 정자에 삐죽 들어온 매화가지를 꺾어 그녀에게 건냈다.
"누이. 정말 잘했어요."
그 말에 단순호치의 미인이 하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수줍어한다.
"노력을 아주 많이 한 모양이군요."
매화를 곱게 든 여인이 문득 중얼거렸다.
"선생에게 칭찬받을 뛰어난 재주라 한들 보여줄 사람을 가리지 못하니 그게 슬프군요."
영선이 그 말에 의아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무슨 말인가요."
여인은 얼버무리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러나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영선이 계속 추궁하자 여인이 마지못해 사실을 털어 놓았다.
"소문이 자자한걸 모르시나요. 새끼 기생 하나가 열셋 나이로 관리의 첩으로 들어갔는데 바람을 폈다고 맞아 죽었어요."
여인은 딱딱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표령이는 그럴 애가 아니예요. 그 애를 기른 할아버지가 통곡을 하면서 관아에 갔다지만 기생을 위해 관리를 처벌할 수는 없는 법이죠. 그게 세상 이치예요."
영선이 굳은 얼굴로 그를 보고 여인이 한숨을 쉬면서 자리를 떴다. 정자에 앉은 영선이 잠시 매화가 흐르는 광경을 보았다.
"기생을 위해 관리를 처벌할 수는 없는 법이라."
영선이 중얼거렸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한가. 아니예요. 누이."
측은한 마음이 든 영선이 표령을 홀로 키운 할아범에게 가서 없는 살림에 돈을 나눠주고 그를 위로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등이 굽은 노인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방성통곡을 하여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엉엉 우는 노인의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 아이가 예쁘다고 데려가놓곤 정부인이 질투를 했다네. 청년. 표령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
노인이 하염없이 울면서 영선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영선이 비틀거리다가도 노인을 쓰다듬으면서 말헀다.
"울지마세요. 할아버지."
영선이 작게 중얼거렸다.
"억울하다고 말 못할 것도 없죠."
그 날부로 영선이 머리를 검게 물들여 흐트러 트리고 얼굴에 하얀 흙을 바른 뒤에 벼린 칼을 품에 넣고 시내를 걸어 그 관리를 찾았다. 당장에 그 옷깃을 붙잡고 벌린 영선이 맨 가슴에 섬뜩하게 벼린 칼날을 꽂아 넣었다.
곧 피가 비산할 때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뛰쳐 나갔으나 영선은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포졸이 오자 영선이 순순히 그에 끌려가 포승줄에 묶였다.
관원이 이름을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가문이 망할까, 그래서 원이 다칠까 두려워 굳게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관원이 그를 수레에 태우고 북을 치며 저잣 거리를 돌아다녔으나 관리의 죽음을 통쾌하게 여긴 저자의 사람들이 모두 굳게 입을 다물었다. 영선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드물게 있었지만 모두가 추악한 늙은 관리를 위해 증언하려 하지 않았다. 개중에 영선의 가족만이 그를 알아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려워 했으나 영선은 그 때 오직 버럭 소리질러서 말할 뿐이었다.
"사람은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숨을 쉬며 산다 하여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리둥절한 관원들이 무어라 추궁했으나 영선은 그 이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언뜻 부모의 불안한 표정이 보였다. 영선은 쓰게 웃고 생각을 비웠다.
저자에 기둥이 세워지고 그에 묶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얼굴을 확인하게 했다. 하지만 삼년이 지나도 말할 것인가. 그들은 몰라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원수를 갚아주었으니 그들은 그를 의인이라 여겼지 죄인이라 여기지 않았다.
낮밤으로 엄히 자리가 통제 당하여 영선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뛰쳐나가 영선의 가슴을 단도로 찔렀다. 피를 토하는 영선의 머리가 툭 떨궈졌다. 경악한 병졸들이 그를 잡으려고 했으나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가 않았다. 현령이 혀를 차면서 시체를 북문에 버렸을 때 한무리의 사내들이 영선의 시체를 거뒀다.
영선이 눈을 떴을 때 석 형일이 있었다. 기침을 힘없이 하는 영선을 석 형일이 혀를 차면서 바라본다.
"심장 바로 옆을 찔렀다."
형일이 말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죽을 상처는 아니지만 죽기 직전 까지 갔지. 현령이 속을 수 밖에 없었어. 갈비뼈 사이를 교묘히 찔렀거든."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진다. 형일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네 부모가 암살자를 보낸 것을 바꿔치기 했다."
영선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밥을 주고 옷을 입혀주었다고 키운 것이 아니지요. 사람은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영선이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형일이 그를 잠시 바라본 뒤에 말했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영선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석 형일이 치료를 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의 상처에 영선이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저 아래 일화는 서서 일화입니다. 이 때부터 남준 일 시작! 다음편엔 희치와의 첫만남이 나옵니다.
주석 1. 만엽집 中
주석 2,3 겐지모노가타리 中
주석 4. 돌아가신 할아버지
주석 5. 이백 장간행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