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0 화조풍월(花鳥風月) =========================
"*장강 하류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 밤인데도 어찌하여 꿈길이 사람 눈에 띌까?"
장난스럽게 말하는 꾀꼬리 같이 맑고 쾌청한 목소리에 곧 웃음기 섞인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교한 달빛 아래 몸을 돌려 생각하라. 잃어버린 청운의 꿈."
곧 꺄르르 웃는 소리가 났다. 소매로 얼굴을 가리면서 느릿하게 극을 하던 여인이 웃으면서 청년의 팔에 찰싹 달라 붙었다. 청년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자신 또한 소매를 내린다. 봉사가 눈이 번쩍 뜨일 듯이 아름다운 여인이다. 이가 희고 머리가 흑단처럼 검어 사락 흘러 나오는 나비같은 옷자락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향기로운 바람이 불었다. 폐월수화의 아름다운 여인이 청년의 팔짱을 끼며 교태를 부렸다.
"선생의 시는 역시 정말 뛰어나군요. 어떻게 이리 바로 제 말을 받아 치지요?"
여성이 뜸을 들이다가 눈을 휘면서 말했다.
"시문으로 명성 높은 관리들도 그리하지 못했어요."
주황색 머리의 청년이 웃으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여인이 영선에게 아부를 하고 애교를 부리면서 마음을 표현했다. 결국 청년이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할 때, 여인은 그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아효(兒曉), 지금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가야 해. 살을 뺀다고 굶는 것은 아니겠지?"
"선생, 저는 원래 몸이 가벼워요."
여인이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뒤로하고 영선이 자리를 빠져나간다. 그것을 정자에서 말없이 바라보던 여인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그 어여쁜 여인들이 교태를 부려도 밤을 잡지 못하는구나."
한탄하듯이 말한 여인이 입을 곧 다문다. 청년의 몸은 호리하고 얼굴은 여우상이라 가벼워 보여 언뜻 기생오라비와 같았다. 그러나 다정하고 섬세한 저 사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선은 기루에서 밤을 보내지 않으니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물과 같고 바람 같은 청년을 더욱 가지고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여인이 아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영선의 뒷모습을 쫒았다.
마을과 떨어진 외곽에 강이 흐르고 있었다. 영선이 말없이 벚꽃이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욱씬거린다. 영선이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다가 곧 인상을 펴고 아득히 말한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듣지 못했다. 흘러가는 저 강 진홍에 물들었다는 것은."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뒤에서 익숙한 사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여전하시군요."
영선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석 형님."
삿갓을 쓴 석 형일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주변에 한무리의 검을 든 사내들이 있었다. 영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삿갓을 썼다.
"벚꽃이 아름답군요."
무심하게 말하는 석 형일의 말에 영선이 바로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벚꽃은 썩을 때 악취가 나지요."
영선이 중얼거렸다.
"그리하여 피와 눈물로 이루어진 영화가 본디 칼날에 베어 스러지는 것처럼.."
형일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영선이 칼을 고쳐 쥐어 말을 탔다. 형일과 무리들이 그를 따라 고삐를 당겼다.
영선이 방랑한지 이년이 되던 해에, 남준이라는 이름이 명성을 알렸다. 인온황후가 부리던 환관들이나 외척들이 가혹하게 백성들을 수탈하는 일이 많았다. 영선은 사적인 복수를 행했고 관아에서 그에게 현상금을 걸었으나 곧 이듬해에 황제에 오른 이 경이 남준을 사면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영선은 여전히 의롭지 못한 이를 죽였고 이 경은 그들을 소탕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죽여야할 인간이 이토록 많은 것인가. 영선이 피가 떨어지는 칼날을 지그시 바라본다. 형일이 그 옆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밤에 움직여 찰나와 같이 목숨을 뺏어간 검이다. 그의 검에서는 종사의 자질이 느껴졌다. 고아하고 바른 검술은 수도 없이 많은 악인의 목숨을 빼앗았지만 영선의 검은 계속해서 피를 먹어야 했다.
담담하게 검을 수건으로 닦은 영선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한동안 자리를 비울 일이 있을 겁니다."
"음?"
의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영선이 바로 답을 했다.
"교가라악라이 누님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영선과 함께 자주 보이던 이국적인 얼굴을 가진 삼십대의 여인을 떠올린 형일이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 중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분의 기마술이 엄청 뛰어났지."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돌궐인이 말을 타는 것은 한인보다 낫긴 하다."
영선이 대답없이 검을 닦았다. 홀로 돌궐을 가겠다는 말에도 이들이 그를 만류하지 않는 까닭은 그를 믿기 때문이었다. 형일만이 잠시 그를 보았으나 이윽고 시선을 피했다. 영선은 그 정도로 사람에게 믿을을 얻고 있었다.
영선이 북방으로 향했다. 품에는 서찰을 넣은 채였다. 삼십대 후반에 곱게 머리를 틀어올리고 바지를 입은 교가라악라이는 돌궐에서 중화로 도망친 사연 깊은 여인이었다. 그녀가 영선에게 돌궐의 승마술을 가르쳤으니 영선은 곧 말을 타고 자유롭게 날라다녔으나 교가라악라이만큼은 아니었다.
그녀가 영선에게 서찰을 주어 남편에게 정해주기를 부탁하여, 영선은 그에 길을 나섰다.
사브작 대는 낙엽 밟는 소리. 곧 기척 하나 숨길 수 있는 칼날 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영선이 생각을 하기도 전에 검을 뽑아 흘렸다.
온 몸을 찌르는 날카로운 살기가 감각을 예민하게 했다. 숨도 쉬기 전에 영선이 칼날을 돌려 목을 베었을 때 빠르게 망토가 시야를 휘감았다. 챙! 하는 소리가 울린다. 영선이 망토를 베는 사이에 뒤늦게 사내가 칼날을 뽑아 힘을 실어 검을 튕겼다.
검을 타고 느껴지는 아릿한 진동. 손바닥이 저릿한 힘. 그리고 사내의 입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를 공격하지?"
붉은 선혈이 백비단같은 볼을 타고 흐르고 창백한 얼굴에서는 죽음마저 경이로 승아시키는 절대미가 있다. 영선은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슬픔이 없고 오직 잔혹하게 죽음을 선사하는 비정한 모습이었기에 사신과도 같앗다. 붉게 물든 신발과 뒤덮은 혈향. 무심하게 내려보는 모습은 냉정하기 짝이 없다. 검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의 끝에서는 피가 흐르고 길고 가는 흑창 끝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사내가 어떻게 저리 생길 수 있지. 그러나 영선은 그 잔혹한 아름다움보단 그가 만들어낸 참상에 경악했다. 영선이 격분해서 소리친다.
"그렇게 잔혹하게 사람을 죽일 필요가 있나?"
북방군이라는 사실은 갑옷을 입은 것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영선은 나서지 않을 수 있었다. 으적으적이는 소리가 나고 살과 뼈가 갈라지고 관절이 튀기는 소리가 났다. 살아 있는 사람을 금새 공처럼 둥글게 말아, 사람이 아닌 것처럼 우그러트린 사내는 눈하나 깜짝 않고 그 짓을 저질렀다.
사내가 숱많은 눈썹을 내리깔고 말했다.
"누구냐."
창을 늘어트리고 사내는 살기를 풀었다.
"민간인을 건들지 않는다."
영선은 잠시 고민하다가 중얼거렸다.
"백리 영선."
사내가 되뇌었다.
"영선."
그 사내는 금새 무료한 표정을 지었다. 영선은 황당해서 그를 보았다. 언제 그 죽은 사신처럼 강렬한 기세를 뿜던 이는 이름을 듣자마자 기세를 풀고 나른한 기색을 취했다. 영선을 잠시 바라보던 사내가 입술을 달싹인다.
"여기 주변은 위험해."
잠시 생각하던 사내가 조용히 말한다.
"너에겐 상관 없겠지만 그래도 물을 것은 물어야겠군. 여기엔 왜 왔지?"
영선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사내의 고요한 두 눈 안에서 또다시 위험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에서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영선이 입을 떼서 말했다.
"나에게 승마술을 가르쳐주시고 많이 친절을 베푸신 교가라악라이라는 돌궐인 출신의 누님이 계셔. 돌궐의 장수가 그녀의 남편이었고 그녀의 언니가 돌궐 가한이 아끼는 장수의 아내였지. 곧 가한이 교가라악라이의 형부를 의심해서 죽였는데 교가라악라이가 남편에게 언니와 조카들을 살려달라고 빌자 남편이 가한의 화를 부를까 거절했다."
사내가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영선이 멋쩍은 듯이 볼을 긁었다.
"누님이 비겁한 남편에게 화가 나서 절연을 선언하고 저기 저 끝 대륙 강남으로 갔는데 아들과 딸은 보고 싶은 모양이야. 서찰을 전해줬고 받아 왔어."
아무리 보아도 의심받을 상황이라 산등성이를 타서 넘어가려 했는데 하필이면 정규군에 들키고 말았다. 영선이 이 상황에 쓰게 웃으면서 편지를 넘겼다.
"자 여기."
"음?"
"태워."
어차피 편지 내용은 알고 있었다. 문자를 모르는 교가라악라이의 남편이 부르는 글을 영선이 받아 적었기에 그 내용은 외우고 있었다. 사내는 묘한 시선으로 영선을 보면서 편지를 품 안에 넣었다.
"그런데 너는 누구지?"
정확하게 급소를 노렸는데 망토로 기민하게 대처하고 검에 힘을 실어 칼을 떨구는 실력은 들어본 바가 못되는 것이었다. 정규군이라도 탐관을 죽이던 영선은 그를 수도없이 많이 상대했으나 그 만한 자를 찾지 못했다. 호기심어린 영선의 말에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희 치."
울림 좋은 목소리가 산을 울린다.
"희 치다."
영선은 희 치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눈 뒤에 타오르는 순간의 광기가 그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어쩐지 영선은 발을 떼지 못해 그는 결국에 강남으로 바로 가지 않고 북방에 체류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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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대체 왜 그렇게 잔혹한거지?"
영선이 막사에서 밥을 짓고 허드렛일을 도우는 한편 전장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돌아오는 희 치가 갑옷에 살점을 가득 묻힌 채로 저벅 걸어온다. 영선은 참지못해 말했다. 아무리 오랑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희 치는 정말 비정상적으로 잔혹했다. 영선이 닦는 무기의 찢겨진 살점은 전투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유희로 사람을 곤충을 가지고 놀듯이 잔혹하게 괴롭힌 흔적이다. 광기의 소산이었다. 영선이 희 치를 바라본다. 고요한 두 검은 눈이 영선을 바라본다. 그가 망토를 벗었다.
"뭐가 너를 그렇게 일그러트린거냐."
희 치가 갑옷의 끈을 푼다. 영선이 다가가 매듭을 풀었다. 희 치가 고개를 숙여 영선이 갑옷의 끈을 푸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갑옷의 앞면에 뭍은 살점의 비릿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희 치가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알고 싶어?"
탁. 갑옷이 땅에 떨어지고 희 치가 땀에 몸에 달라 붙은 흰색 면옷을 손가락으로 집어 살에서 떨어지게 만들었다. 희 치가 그를 보면서 묘한 웃음을 흘렸다.
영선은 화주를 가져왔고 간단한 돼지고기 볶음을 안주삼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묵묵히 그 얘기를 듣던 영선이 한탄하듯이 말했다.
"너는, 어떻게 그런 인생을 살아온거냐."
영선이 희 치를 가여운 눈으로 본다. 영선은 맑은 눈으로 희 치를 보았고 희 치는 무언가 그 시선을 마주하기 힘들어 묵묵히 술을 마셨다.
"가여운 것."
영선이 그 말을 하고 측은히 그를 보았을 때 희 치는 동요를 참을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처음으로 희 치는 그를 가여워하는 사람을 앞에 두었다. 희 치가 묵묵히 청아한 달을 본다. 독주가 목 뒤로 넘어갈 때의 싸한 맛이 그의 머리를 맑게 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희 치의 몸이 얼어붙고야 말았다.
"같이 가자."
희 치의 숨이 멎는다.
"나는 남준. 관에 얽매이지 않고 방랑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영선의 고요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희 치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희 치가 곧 짧게 숨을 내쉰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식기 시작했다.
"나랑 같이 강남으로 가자."
희 치가 영선을 본다. 영선이 별빛이 흐르는 듯한 보석같은 두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희 치가 넋을 잃고 그를 보았다.
"나랑 같이 도망치자. 네 운명에서..."
영선이 그의 손을 잡을 때 희 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망간다고. 희 치가 상념했다. 아침에 그가 말을 타고 무슨 짓을 저질렀더라. 희 치가 끊임없이 생각한다. 창으로 사람을 죽이는데에서 그치지 않았지. 그는 괴물이었고 그리고 웃으면서 인외의 짓을 저질렀다.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일상이 어떤 것인가. 이제는 아득한 기억이다.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이름이 뭐였지. 얼굴이 생각이 나지 않아. 희 치의 머릿 속이 꼬여온다. 그 때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손을 단단히 옥죄는 손이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황갈색 두 눈이 생기있게 빛난다. 희 치는 그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희망이 그에게 다가와, 희 치를 격동하게 만들고 있었다.
희 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영선은 그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도 희 치는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희 치가 고민하던 끝에 그에게 강남의 일을 물었을 때 영선은 웃으면서 강남의 아름다운 달과 진홍빛 벚꽃이 흐르는 강, 왁자지껄한 시장과 흥정하는 사람들을 말해주었다. 희 치는 그 말을 들어주었고 그 때 희 치의 얼굴에 스치는 그리움을 발견한 영선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북방으로 온 것이 이유가 있었구나.'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 곳에 있었다. 영선은 그를 가만히 바라본다. 하늘이 과연 있는 것일까. 희 치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곰곰히 생각했다.
이토록 한 사내에게 잔인한 삶을 주고도 하늘이 존재하는 것일까. 영선은 의문을 가졌다. 왜 하늘은 사람을 낳고 그들이 버틸 수 없는 고난을 주어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란 말인가. 영선은 이유를 모르지만 눈 앞에 있는 이 아슬한 사내를 놓아 버릴 수가 없었다.
희 치는 곧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선이 희 치와 같이 탈영할 준비를 끝마칠 무렵에, 희 치가 막사의 입구를 가린 천을 젖혀 열었다.
영선이 고개를 든다. 희 치는 막사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드러나는 슬픈 얼굴에 영선은 무언가를 짐작하고 얼굴을 굳혔다. 희 치가 덤덤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지만 그 얼굴엔 체념이 가득했다. 영선이 탄식했다.
"결국 네가 이렇게 되는구나."
희 치는 처연하게 웃는다. 영선이 고통스럽게 말을 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희 치가 입을 연다.
"내가 떠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보다 떠나서 후회하는 마음이 더 지독할 것을 알기에 나는 떠나지 못한다."
영선이 눈을 질끈 감았다.
"위현인가."
희 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몸을 떨던 영선이 허탈한 얼굴로 늑대가죽 아래에 숨겨둔 행장을 연다. 희 치가 그것을 바라보았다. 건량과 지도, 부싯돌과 천, 술과 붕대, 그 외에 것들이 두 눈에 들어온다. 희 치가 그것에서 시선을 뗴지 못한다. 영선이 중얼거렸다.
"언제든지 네가 힘들고 지쳐서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때 남준을 찾아. 전장에서 다시 돌아오면 나에게 연락해."
희 치가 대답하지 않는다. 영선이 슬프게 웃으면서 그 오랜시간 정이 든 그를 바라본다. 희 치가 이를 악물고 주먹을 말아쥐고 있었다. 드물게 격동하는 희 치가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 아슬한 한숨을 쉰다.
영선은 그저 다정하게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북방을 떠나도 난 여전히 네 친구인 것을 명심해라. 희 치, 몸 건강하게 잘 살아야해? 알았지?"
희 치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영선은 그 다음날 바로 북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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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이 씁쓸함을 삼키고 강남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본 희 치의 떨리는 어깨가 그의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슬프게 웃는 희 치의 몸에선 항상 피냄새가 가득했다. 피와 쇳냄새. 항상 그 비릿한 냄새는 희 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영선은 애써 그의 생각을 지우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강남으로 돌아온 영선이 남준으로서의 협객행을 다시 이어나갔을 때 그는 문득 익숙한 이름을 듣고 반문할 수 밖에 없었다.
"영 고준?"
잊을 수가 없던 이름이다. 영선이 양모의 자매를 때려 죽였던 사내를 떠올린다. 양모는 결국 자매를 죽인 사내를 관아에 고발하다가 오히려 현령에 의하여 얻어맞아 죽고야 말았다. 영선이 침묵하더니 검집채로 검을 들곤 소식을 따라갔다.
그 사건 이후로 아비가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장안으로 보냈다던 사내는 어느새 추악한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다. 제법 위세 있는 귀족 출신이라 음서로 비서랑에 오른 사내지만 시기가 안좋게도 아부의 대상이 좋지 않았다. 인온황후의 환관들에게 아부했던 사내는 즉위한 이 경이 구시대의 것을 싸그리 정리하는 와중에 삭탈관직 당하여 내쫒기고 관직에 영구제명을 당하고야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삼대가 관직에 오를 수 없으니 가장 잔혹한 처벌이었고 젊은 나이에 기녀를 때려 죽였던 청년은 술주정뱅이가 되어 사람들의 혐오감을 사고 있었다.
죽이는 것은 간단했다. 그러나 영선은 그를 죽이고 후회하고야 말았다.
마당에서 사내를 죽이고 문득 집 안을 바라보니 두개의 앙증맞게 작은 신발이 댓돌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더라. 영선이 무언가를 깨닫고 멍하게 그를 본다. 영선이 기척을 죽이며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열고 아찔함을 느꼈다.
다섯살인가, 그리고 두살쯤 되나.
영선이 숨죽여 흐느끼며 새근히 자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석 형일에게로 돌아갔다.
석 형일은 새벽에 어린 아이를 양 팔에 낀 영선을 보고 의아했다. 영선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셔있었다. 영선이 조용히 속삭였다.
"세상에서 태어나서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어린아이는 없으며 부모의 죄가 아이에게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온정 없이 키워져도 되는 아이는 없습니다."
뺨에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가장 투명하고 맑은 아이들이 먼저 죽습니다. 아십니까. 석 형님. 소리소문없이 죽어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유년을 생각하던 영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빈민을 구제하고 사람들을 돕는데 크게 관심을 가지는 종교가 있습니다."
영선이 숨을 죽여 말했다.
"그곳의 승(僧) 하나가 어린아이를 돌 볼 구제원을 만들 의향이 있다고 합니다."
형일이 그를 바라본다. 영선이 짤막하게 말했다.
"도와줄 예정입니다."
형일은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하십시오. 남준."
영선이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품에 안긴 아이가 참사를 모르듯이 영선의 품에 파고 들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를 감싸면서 영선이 두 눈을 감았다.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작품 후기 ============================
주석 1. 백인일수 中
주석 2. 백인일수 中
빨래하고 밥하는 가정주부 영선 + 사랑의 도피(?)
+) 이 떄의 벚꽃 이야기를 석형일이 기억하곤 영선이 외는 시에 반응했던 겁니다. 지금 화려한 벚꽃에 부정적이던 영선의 변화에 무척 혼란스러워 했죠. 벚꽃이 속세의 영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 자기의 예쁘고 청순한 아끼는 멍뭉이를 뺏어가려는 남준을 눈치챈 위현의 반응은...
생일 축하드리고 제 오래된 독자분들 드문보여서 너무 기쁘네요. 감사하고 항상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