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148)

00121 화조풍월(花鳥風月) =========================

 강남에 기재가 있으니 강남일기라 하였고 혹은 남준(南俊)이라 하였다.

 강북에 명장이 있으니 북걸(北傑)이라 하였다.

 또 강남에서 기루를 전전하면서 제자를 기르던 신원불명의 사내가 있었으니 그가 청련거사라고만 불렸다. 그가 남긴 시문이 지극히 유려하나 수사가 담아하고 과장되지 않아 지사들 사이에서 높게 여겨졌다. 그러나 시인의 정체를 알 수 없어, 세간의 사람들은 그를 시선(詩仙)이라 불렀다.

 시선이 비파를 켠다. 심운화가 눈 속에서 매화(雪中梅)를 보고 있었다. 영선이 정자에 기대어 앉아 비파를 켜고 심운화가 그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유려한 여인이 물을 차는 제비처럼 춤을 추는 것에 영선이 가끔씩 날카로운 눈매를 했다. 영선이 조용히 그녀를 불러 잘못된 점을 꼬집을 때 심운화는 공손한 태도로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영선은 온화한 눈으로 매화를 감상했고 심운화가 비파를 매만지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매군(梅君)은 군주라 동장군도 막지 못하는군요."

 영선이 매화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순백의 눈과, 불멸한 달빛과 꼿꼿하게 피어난 꽃과 함께 살다 죽으니 영원하려나(雪月花)."

 훗날 시선을 백인일수로 뽑히게 한 시가 유려하게 흐른다. 심운화가 그를 보더니 조용히 다시 비파를 켠다. 영선이 그 비파를 묵묵히 들었다. 흐느끼는듯한 갸녀린 소리, 처연하고 떨림이 아득한 비파. 영선은 그녀에게 비파를 가르치지 않았고 그녀는 홀로 그렇게 강남에서 유명한 두 비파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앵두같이 붉은 두 입술이 벌려지고 흰 치아 사이로 담아한 목소리가 나왔다.

"청련거사(靑蓮居士)께서는 교각 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지요?"

 비파 소리가 꺾이고 영선이 그 소리에 흠뻑 취하여 술잔을 든다. 기둥에 기대어 버선을 벗어 맨발을 보이고 흘러나온 앞머리가 뺨을 가린다. 무척 자유분방한 차림을 한 영선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아니."

"교각 대사께서 구제원을 만들어 어린 아이들을 돌본다고 합니다."

"그렇군."

"이제 새끼 기녀들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마가 한탄하더군요."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긴장감을 조성할 때 영선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엿다. 심운화가 평온한 얼굴을 한다. 음이 떨리고 아름다운 눈가에 정취가 담긴다. 입술을 달싹이며 말한다.

"향간에 남준이 그를 도왔다고 합니다."

"남준은 쾌걸남아지."

 영선이 잔을 내려놓고 말한다. 심운화의 손가락이 그 때 비파를 거세게 한번 친다. 마지막 음이 쾌청하게 정자를 울린다. 영선이 눈을 꾹 감고 웃으며 말했다.

"좋아."

 심운화가 영선을 묘한 시선으로 본다. 영선이 눈을 떼고 그를 보았다.

"나는 그러나 어린아이는 좋으나 가까이 하기는 싫어. 거추장스럽잖아. 물론 내 아이는 귀엽겠지. 그리고 청련거사는 폭력을 가까이하지 않아."

 심운화는 매화의 꽃잎을 닮은 두 속눈썹을 내리깔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알아요. 선생께서는 그러신 분이지요."

 영선은 그를 보면서 말없이 웃었다. 심운화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영선은 자리에 일어났고 심운화는 그를 잡지 않았다. 영선이 넓고 펄럭이는 휜 소매를 휘날리면서 참새가 종종 거리듯이 경쾌하게 발을 딛는다. 심운화는 비파를 매만지며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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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악인이 너무 많았다. 남준은 먼저 관리들을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부탁을 받으면 그를 반드시 들어주었다. 심지어 먼저 악인을 처단하고자 한 것이 아님에도 영선은 끊임없이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 그에게 찾아오는 억울한 이들이 그렇게 많았다. 영선은 곧 한탄하곤 했다.

"이 세상에 이토록 죽일 사람이 넘치도록 많단 말인가."

 그리고 석 형일은 그를 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그러니까 오래 사십시오."

 그 순간에도 가슴의 통증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영선은 대답하지 않았고 흐르는 강물에 발을 담궜다. 뼛 속을 아릴 차가운 물 사이로 피가 흘렀다. 영선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조금 후에 명료한 목소리가 석 형일에 귀에 들려왔다.

"다음은 여 형일입니까."

 석 형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선이 눈을 감으면서 강물에 담궜던 검을 수면 위로 빼낸다. 차갑게 식은 검을 비틀어 물을 튀겼다.

 여 형일을 죽이러가서 영선은 항상 잊지 못했던 반가운 사람과 뜻하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그가 북방에 두고 온 미련이 그를 격동케 했다.

 첫마음과 똑같다. 호흡을 고르게 하고 저택에 파고 들어 여 형일의 방으로 간다. 종이문 사이로 그림자가 보이고 있었다. 달빛이 구름 사이로 옅게 스며들어 그를 보여주고 있었다. 문과 함께 그림자를 베려할 때 그를 측면에서 찌르는 창이 있었다. 영선이 빠르게 몸을 돌려 뒤로 신형을 뺐을 때 영선은 귀신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에 충격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

"희 치?"

 동요하는 목소리. 영선의 배를 관통하려던 창이 멈춘다. 먹구름 사이 교교한 달빛 아래 몽환적인 얼굴이 영선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상아색 월광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생기가 없는 그 창백한 이목구비 사이를 누비고 있다. 붉은 입술이 약간 벌려진다. 영선이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볼 때보다 더욱 더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은 얼굴을 한 희 치가 그의 앞에 있었다. 아니, 영선은 더욱 헷갈려했다. 정말 저것이 희 치인가? 달빛이 이 공간을 비현실적이게 만들었다. 낮은 웃음이 들려온다.

"오래된 벗을 보게 되었군."

 영선이 탄식하면서 검을 내리고 희 치의 팔을 잡아 끌었다. 희 치가 순순히 그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이구나, 친구여."

 희 치가 영선의 허리를 끌어 안고 부드러운 웃음을 드러낸다. 흔하지 않은 사내의 훈훈한 미소에 방 안에 불청객이 불안감을 느끼고 버럭 소리지른다.

"지금 이게 뭣하는 짓이요!"

 영선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희 치가 멍한 눈을 한다.

"아."

 희 치가 영선을 천천히 품에서 놓아준다. 희 치가 중얼거린다.

"저게 있었지."

 사람을 사람이라 칭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영선은 무언가 불길함을 느꼈다. 묵묵히 그를 바라본다. 간단한 과정이었다. 콰득, 뼈가 짓이기는 소리가 난다. 희 치의 창에서 피가 타고 흘렀다. 희 치가 곧 창을 늘어트렸다. 피가 뚝뚝 그를 타고 떨어진다. 영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삭탈관직된 여 형일이 대장군을 부릴 수 있는 위치인가."

 이 경에게 정리당한 구시대의 물건이 명성을 날리는 북걸을 호위로 둔다고? 영선은 북방 최전선을 벗어나 대장군이 되어 대군을 이끌게 되었다는 희 치의 소식을 들었었다. 성도에 돌아왔다는 희 치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그의 독한 운명을 이겨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 때 얼마나 기뻐했는가. 결국 희 치가 도망가지 않고 가혹한 자신의 삶을 마주하여 이겼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부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희 치는 지금 어떠한가. 영선의 눈이 흔드린다.

 희 치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한다.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려있다.

"나에게 달콤한 고통을 선사하던 그리운 벗이 암살에 시달린다고 하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영선의 머리가 아득하다. 희 치가 낮게 웃는 소리가 밤사이 들려온다. 그가 다정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남준이 올줄은 몰랐지. 정말 오랜만이야."

 그리고 희 치의 빛이 들지 않아 칠흑같은 어둠이 가득한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영선은 깨달았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거라 여길만큼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희 치가 그 아래까지 도달한 것을. 나락으로 추락했다. 희 치는 음습하게 웃었고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여 형일이 어떻게 그를 고문했는가. 희 치는 그를 생각했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너를 잊고 있었다."

 영선은 말을 하지 않고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희 치가 대답을 하지 않는 영선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선은 한참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희 치의 뺨 끝을 스친다. 희 치가 순순히 눈을 감았고 영선이 희 치의 뺨을 두 손으로 잡고 더듬었다. 희 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억누른 신음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희 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짐승이 우짖는 것 같은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억눌린 울음이 스쳤다. 희 치가 색색거리면서 숨을 쉰다.

 영선은 한참동안 희 치의 앞에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희 치는 그를 못본채 눈을 감고 서있었다. 뺨에 닿는 손길이 몇년만이더라. 희 치가 멍하게 생각한다. 영선이 울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영선이 속으로 무언가를 마음먹어 눈을 감은 희 치를 강렬하게 응시했다. 영선이 입술을 깨물곤 상념한다. 낮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너인가.'

 영선이 과거를 상념한다. 영선이 희 치의 막사에서 밥을 짓고 허드렛일을 돌볼 때 그는 호감형의 준수한 외모의 사내와 마주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희 치보다 더 음습한 눈으로 영선을 흝어 보았다. 영선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말을 하지 않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내 귀여운 강아지를 흔들리게 만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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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선이 참혹함을 삼켰다. 귀에 스치는 잔혹한 소리. 영선이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다. 사슴이 목덜미를 물리고 내는 듯한 미약하고 처연한 신음이 들린다. 바르작대는 뭉툭한 몸뚱아리.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에 숨이 끊어졌을 듯한 가혹한 폭력이었다. 희 치가 손을 내린다. 주먹에 묻어 있는 핏자국. 희 치가 잠시 바닥에서 꿈틀 거리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곧 다정하게 그것을 품에 안았다. 부어오른 눈가를 매만지고 터진 입술에 연신 입을 맞추면서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사내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품에 안긴 사내가 미친 웃음 소리를 흘렸다. 희 치가 그를 품에 꼭 끌어안더니 영선을 순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희 치가 작게 웃는다. 위현의 푹 꺾인 목에 이를 박아 물어 뜯는다. 위현의 몸뚱아리가 축 늘어졌다. 희 치가 작게 속삭였다.

"왜 다른 사람을 방 안에 들입니까."

 희 치가 서랍을 열곤 다른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자마자 위현의 머리채를 잡아 손을 들었다. 주먹으로 위현의 얼굴을 찍을 때 영선은 차마 반응도 못하고 입을 벌리고야 말았다. 위현이 낮은 신음을 흘리고 이윽고 폭력이 이어졌다. 영선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상황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몸을 떨고야 만다. 위현이 신음을 흘리면서 희 치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잠시 후에 위현이 웃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이구나."

"늦었습니다."

 희 치가 위현의 목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영선은 이 상황에서 너무나 태연하게 말을 섞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입을 막고 몸을 떤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희 치는 영선에게 한동안 시선을 주지 못했다. 오직 홀린 것처럼 위현을 쓰다듬고 어룬다. 위현이 문득 웃음기가 담긴 눈으로 영선을 바라본다. 영선이 그  즐거움이 담긴 그 비틀린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자랑하는 것처럼, 혹은 과시하는 것처럼. 위현이 희 치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영선을 보았다. 위현의 으깨진 목을 타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영선이 참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위현이 터진 입술의 피를 핥짝이고 시선을 돌렸다. 희 치가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위현의 목을 핥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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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그를 그렇게 놔둘 겁니까. 희 치를 그렇게 가지고 놀고 그 아이의 마음이 어떻든 일그러지든 말든 그 아이가 정말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그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짐승도 그렇게 잔혹하게 굴지 않습니다."

"......"

"그 아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습니까. 그래도 그냥 그 아이는 그저 완구입니까. 노리개로 그를 정녕 대할겁니까. 그를 놓아주세요."

 대답에 따라 영선은 자신의 앞에 놓인 검을 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묵묵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위현이 이윽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까지 그 아이가 그렇게 살 수 없지."

 영선이 그 얼굴을 바라보아 심기를 살핀다. 위현은 놀랍게도 보통 사람같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희 치를 평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위현의 눈이 아련해진다.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을 영선이 지켜본다. 한참 후에 위현이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그 아이가 없었다면 내 삶이 어땠을까."

 잠시 생각하던 위현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희 치가 행복해졌으면 좋겠군."

 위현은 희 치를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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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목이 드러나도록 짧게 자른 머리가 귀를 이따금 보이며 찰랑거린다. 어이보면 천진한 소년이요, 어이보면 마치 존엄한 불존같은 부드러운 위엄. 순백의 어린아이와 굽어보는 보살이다. 단발이 보보(步步)할때마다 흔들거렸고 그럴 때마다 어린아이같이 순백한 모습이 휘장 밖으로 드러난다. 그 모습은 마치 때가 타지 않은 아름다운 소년. 그리고 암자에서 속세와 연을 끊고 산 승 하나가 갓 머리를 기른 모습.

 순백한 아름다움과 함께 처연함이 느껴진다. 그 사내는 분명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위현이 죽었어."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영선이 고백했다.

"내가 너를 놓아달라고 했어."

 희 치는 말없이 울었다. 귀 밑까지 자른 머리카락이 보인다. 희게 드러난 목선이 길고 곧았다. 희 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영선도 입을 떼지 않았다. 희 치는 곧 성도로 돌아갔고 반년이 지나서야 그를 찾았다.

 영선이 희 치를 바라본다.

"황후가 될 것이다."

 뜬금없는 말에 영선은 희 치를 마주했다. 희치가 나직히 말했다.

"후궁이 되어서 나를 도와주거라."

"후궁이 되라고?"

"그래."

 희 치가 속삭인다. 영선이 그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돈이 부족한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주마."

"......"

"구제원을 운영하는데 너가 후원을 하는 것을 알고 있어. 구제원의 수가 많아지니 자금에 허덕이고 있지 않나."

 영선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치아."

 영선은 동정하여 그를 보았다. 희 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원래라면 아무리 돈이 없어도 네 말은 들어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네 친구니까.."

 한숨이 흘러 나왔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들어주지. 들어줄게. 제기랄."

 영선이 희 치를 바라보았다. 저 불쌍한 사내가 담담하게 그를 마주했다. 영선은 슬픔을 억누르고 중얼거렸다.

"후궁되지. 될게."

 자신도 모르게 위현이 했던 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희 치는 말이 없었다. 영선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영선의 외가에 삼촌이 있었다. 그 슬하에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병약해서 밖에 나가지 않았다가 결국 작년에 죽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를 믿고 자식이 없는 그 주홍 머리 사내를 불쌍하게 여겼는데 어느 날 주홍색 머리를 가진 호리한 청년을 데리고 온 그 사내가 당당하게 말했다.

"절에서 치성을 드리면서 보살피고 있었는데 부정이 탈까봐 두려워 죽었다고 했다오."

 사람들이 그를 믿어 그를 백가의 영선이라 불렀다. 건강을 되찾은 자제가 지역의 문인들과 어울리니 곧 명성이 장안에까지 이르렀다. 유려하고 사근한 시가 삿되지 않다하여 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니 그는 곧 시원일(詩元一)이라고도 불러 시선과 이름을 나란히 했으니 곧 대륙에 두 시인이 명성을 떨쳐 시원일과 시선이라고 했다.

 이듬해에 이 경이 시집을 편찬하면서 명령을 내렸다. 고금에 가장 뛰어난 시 백수를 뽑아서 엮어라. 그것으로 궁을 장식할 것이다. 그리고 작금에 두수가 뽑혔으니 하나는 시원일의 것이었고 하나는 시선의 것이었다.

 순백의 눈과, 불멸한 달빛과 꼿꼿하게 피어난 꽃과 함께 살다 죽으니 영원하려나(雪月花).

 청련거사가 설월화를 부르고,

 피는 꽃으로 화려하게, 지저귀는 새로 능란하게, 부는 바람으로 산뜻하게, 달돋이로 황홀하게(花鳥風月).

 백 영선이 화조풍월을 읇었다.

 본디 수녀 선발에 나가지도 못할 영선에게 관리가 온 것은 그 명성 탓이었다. 그리고 곧 영선은 시원일의 명성을 높게 산 희 치에 의하여 간택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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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이 밝고 청아하니 영선은 저도 모르게 술을 마셨다. 흥얼거리면서 매화주 술병을 기울이며 자작을 하니 기분이 들떠서 영선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서방은 언제 오려나.."

 무언가 기묘하다. 어떻게 삶이 이렇게 흘렀는지. 영선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교교한 달을 보았다. 영선은 달을 좋아했다. 그는 홀린 듯이 매화주를 마셨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는 술을 멈추지 못했다. 마음이 그리 흘렀고 자제를 하던 영선은 손을 멈추지 못해 알싸한 기분이 들 때까지 기분이 들떠 자작을 했다.

 그리고 곧 휘장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올 때 영선은 그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갈색의 그을린 피부와 날카로운 눈매, 높은 콧대는 끝이 약간 꺾여 있었고 미간이 좁아 화내는 인상이었다. 턱이 각이 지고 손이 솥뚜껑처럼 크고 딱딱하다. 입술이 굳게 다물어져 고집이 센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는 당당하게 들어와서 이 상황에 미간을 꿈틀거리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영선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못, 못생겼어.."

 말을 하고도 저가 놀라 헉, 소리를 내면서 이 경을 바라보았다. 콧잔등이 일그러지고 콧김이 내뿜는다. 눈매가 날카롭게 떠져 사나워지고 몸이 달아올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콧등이 씰룩거리는 것을 바라보던 영선이 넋을 잃고 생각했다.

'어떻게 화를 내는 것도 저렇게 못생길 수가 있지.'

 무심코 한 감상이다. 그리고 영선은 아차해서 무릎을 꿇으면서 당치도 않는 변명을 쫑알거리고야 말았다.

"송, 송구합니다! 제가 술에 취해 말을 가리지 못해,"

"뭣이?!"

 그리고 사내의 발이 영선의 배를 걷어 찼다. 영선은 노발대발한 이 경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 앞이 깜깜해지는 고통 속에서 생각했다.

'와. 어떻게 저렇게 못생겼지?'

 최고의 기녀들과 희 치와 부대끼고 살았던 영선에게는 너무나도 투박한 얼굴이었다. 마치 으깬 감자 같은 얼굴에 속으로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상념하던 영선이 곧 데굴데굴 굴면서 이 경의 손발을 생각하며 가볍게 상황을 정리했다.

'뭐,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저 무염이 귀엽게 보이는 날이 올 줄이야. 영선은 다음에 볼 때에 생각보다 작고 부드러운 이 경의 입술에 감탄하여 그를 매만졌다.

 이 경이 발악하여 버럭 화내는 것에도 반응하지 않고 영선은 그를 보면서 실실 웃었다.

'이거 하나는 귀엽네.'

 이 경이 철없이 헤실거리면서 영선에게 달려와 말했다.

"너를 위해서 만화궁을 지었다."

 이 경이 기분좋게 웃으면서 이것저것 말을 한다.

"너가 꽃을 좋아하니까 진귀한 화초를 많이 심었다. 그리고 내가 널 귀비로 삼을거야."

 영선이 속으로 생각한다.

'쟨 어쩜 저렇게 생각없이 살지?'

 인생 망한 희 치와 그 외에 많은 불우한 환경을 보았다. 희 치보단 아니지만 고통을 스스로 이겨낸 영선의 눈에 정말 그 황위에 오를 때까지 한점의 고난도 없었던 이 경의 구색 없고 어떻게 보면 철없는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보단 신기하게 느껴졌다.

'역시 세상이 불공평하긴 하구나.'

 이 경이 몸을 웅크리면서 영선의 몸에 찰싹 붙어서 잔다. 영선이 이 경의 얼굴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의외로 숱많은 눈썹이 보인다. 달빛에 은은히 보이는 이 경의 얼굴이 아침과는 다르게 제법 준수한 부분이 보였다. 시원한 콧대와 선이 굵은 이목구비, 눈매마저 눈을 감아 인상이 풀리니 섬세하지는 않아도 못생겼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영선은 볼을 쿡쿡 찌르면서 퉁명스럽게 말하고야 말았다.

"못생겼어."

 이 경이 꿈틀거린다. 영선이 웃었다.

"첩은 낙교 북쪽에 살았는데, 당신은 낙교 남쪽에 살았었군요."

 이 경이 눈물을 흘렸다. 영선도 눈물을 흘렸다.

"휘장을 걷고 달을 보니 그대는 꽃처럼 구름 끝에 걸렸네."

 영선이 예불을 드리면서 단 한사람을 그리워했다.

"끝없는 그리움에 정녕 내 심장과 간장이 끊어지는가."

 이 경이 영선을 만나자 속삭였다.

"잘 지냈느냐."

 태연하게 영선이 웃었다.

"폐하 옆에서 말을 몰고 같이 말을 타겠습니다."

 이 경이 울부짖으면서 영선에게 원망한다.

"희를 죽인다고 했어!!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

 희 치를 때리면서 비통하게 우는 이 경이 보인다. 미친듯이 날뛰는 이 경을 보며 영선이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찢기는 고통에 휩싸였다.

"이제 그만하자."

 그에게 냉정하고 잔혹하게 대하던 이 경이 영선을 넘어트리고 그 위에서 운다. 어깨를 꽉 쥐고 이 경이 그를 노려보며 눈물을 뚜둑 흘렸다. 핏발이 선 눈에서 눈물이 방울 거리면서 떨어진다. 영선의 눈이 흔들렸다.

"넌 후궁이다! 내가 너를 아끼고! 사랑하고! 또 마음을 주어도 넌 후궁이야!"

 뺨이 화끈하다. 영선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를 보았다. 눈물을 흐르는 두 눈이 눈에 담겼다. 이 경이 그의 옷을 찟고 허겁지겁 아랫도리를 내렸다. 눈물을 흘리면서 하염없이 그의 사랑을 갈구했다. 여기 만져봐라, 응? 너, 너 좋아하는거. 창기처럼 말하면서 그의 손을 잡고 가슴에 문지른다. 이어지는 말에 영선이 아득함을 느낀다. 영선아, 나 미워하지 마라..

"놓거라. 영선아, 날 놓아줘"

 이 경이 낙태약을 먹는 것을 영선이 재빨리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구토를 하게 했다. 영선이 이를 악물면서 그를 붙잡았다. 이 경이 고개를 도리 저으면서 흐느꼈다.

"너를 놓아주겠다."

 담담한 목소리. 흔들리는 마음.

"각인하자."

 저 관산을 넘지 못하여 나의 오락가락하는 넋, 하루에도 아홉번씩 하늘로 솟는 영혼.

 영선이 칠년이 지나서야 칼을 뽑고 소리쳤다.

"부인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용모를 가꾸고(女爲悅己者容)!"

 그를 위해 화장을 하고 호갑투로 손을 가렸다. 점취로 장식한 화려한 전자 끝에서 옥구슬이 타닥이고 영선은 이 경에게 웃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

 언젠가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주군이 없어 하지 못했지. 영선이 웃었다. 목숨을 바칠 사람을 찾지 못해서 이 말을 하지 못했다. 얄궂게도 지금 이렇게 이 경의 후궁이 되어서 이 말을 입 밖에 내뱉고야 말았다. 영선이 검을 비틀어 피를 떨구곤 그 앞을 보았다. 쥐죽은 듯이 조용한 대전 안에서 그 누군가의 색색거리는 소리가 났다. 영선이 익숙함을 느끼고 그를 볼 때마다 마음 속에서 자리한 행복감을 숨긴다.

 상황이 급박함에도 영선은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몰골이 처참해보이던데. 괜찮으려나. 영선이 중얼거렸다. 내가 확인해야지. 내가 두 눈으로 봐야지. 이 경이 무사하려나.

 곧 영선이 몸을 돌려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으로 이 경을 바라보았다.

 이 경이 그를 마주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 작품 후기 ============================

외전 완결입니다!

1. 백인일수란 한명으로 정해진게 아니라 역사상 시문으로 이름 높은 백명의 시인들을 한수씩 뽑아 놓은 겁니다. 즉 백명의 인물이 백인일수라 불렸습니다.  심운화가 편지를 보낼 때 백인일수라 쓴 것은 시원일이 아닌 시선을 칭한거.

 현시대에 백인일수가 둘이 있는데 하나가 시선(백리 영선, 남준)이고 하나가 시원일(백 영선, 신귀비) 입니다. 동일인물(...)

 백인일수는 실제로 일본의 카드 놀이에 많이 쓰입니다. 백인일수 시 너무너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시는 이거예요!><

2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온 듯 하네 새하얀 색에 옷을 말린다하는 아마노카구야마

18 스미노 강의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 밤인데도 어찌하여 꿈길이 사람 눈에 띌까

21 지금 오겠다고 말한 구월의 동틀 무렵의 달을 마중나온 것일까.

89. 덧없는 목숨 차라리 끊어지길 이대로 살아도 남이야 모르는 괴로움 견딜 수 없을 테니

 덧붙혀서 백인일수가 번역된 엄청 두껍고 비싼 책이 도서관에 있스ㅂ니다... 이만얼마라 비싸기는 한데 소장도 괜찮아요! 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헤이안 시대 생활상도 다 수록되어 있거든용.

2. 시선과 청련거사는 이 백의 별호.

3. 작품 소개에서 나왔던 음울했던 화조풍월이

'나는 지는 꽃처럼 비참하고 내 목소리는 우짖는 새처럼 무기력하고 희망은 더운 바람처럼 헛되며 이 세상은 해가 없어 구름에 가려진 달빛만이 가득합니다.'

->

'피는 꽃으로 화려하게, 지저귀는 새로 능란하게, 부는 바람으로 산뜻하게, 달돋이로 황홀하게, 살다보니 내 인생에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변했습니다. 영선이는... ㅠㅠ

<영선에 대한 짧은 고찰>

 영선이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을 때 이 때 사(士)는 선비라기 보다는 옛날에 귀족계층에 가까웠습니다. 무사, 문사라는 말로도 알 수 있듯이 사 계급은 문무겸전을 중요시했고 사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전차를 모는 것이 사계급이었기 때문에 문보다는 무가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죠. 그게 춘추전국시대로 오면서 전차로 일어난 전투가 없어져서 병사들의 인력이 중요하게 여겨졌으나 분명 한사람의 용력이 승패를 좌우하던 전차전에서 사계급의 영웅으로서의 소양은 중요했습니다.

 영선의 친가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이어지던 뿌리깊은 명문가'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士)계급의 정신을 물려받은 곳이었습니다만 아비 대에서 잠시 그 계승이 끊어져으나 영선이는 사(士)계급으로서 정체성을 찾아 당당히 우뚝 서고야 말았습니다.

 영선이의 사고방식이 사실 한나라 이후, 진짜 천자황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방식과는 다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바야흐로 협사의 시대였는데 춘추전국시대는 그 이후 시대와는 다르게 사사로운 복수를 높게 치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기였습니다.

 신하가 주군을 번갈아가면서 바꾸고 입신양명을 위해서 꾀하던, 어떻게 보면 21세기와 같아서 충을 강조할 때도 있는 반면에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주인에게 충성할 필요는 없다는, 황제에 대한 충성을 무조건적으로 강효하던 후대와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인 시기였습니다.

 고대로 갈수록 인명이 경시되어 상당히 극단적이게 이상을 추구했는데 한나라 때에 한고조의 신하 역이기를 죽인 제나라 왕에겐 동생이 있었는데 한고조가 건국 이후 제나라를 다독이려고 역이기의 유족에게 복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죠. 그러나 제나라 왕의 동생은 역이기의 유족을 보기 부끄러워 자결했고 그를 모시던 신하들도 자결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수백명의 식객들도 순사했죠. 춘추시대에 왕이 학에 빠져서 국사를 돌보지 않아 전쟁 중 전사하자 아무도 돌보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왕의 은혜를 받은 신하는 배를 갈라 장기를 빼내어 왕의 장기를 그 안에 채워 시체를 보존하였고요.

 협사 중에서는 섭정은 귀족임에도 천민인 자신에게 잘 대해주고 누이의 혼례를 치루게 도와주자 복수를 갚은 뒤 누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얼굴을 심하게 훼손한 뒤에 자결했고(물론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것이지만)그 누이는 그럼에도 섭정이 자신의 동생임을 알리고 죽었습니다. 전제는 노모가 죽기 전까지는 그를 모셨으나 노모가 세상을 떠난 후엔 공자 광이 그를 마찬가지로 공손임에도 잘 대해주자 그를 위해서 왕을 암살하였습니다. 사사로운 정에 따라서 왕을 죽인 것이 후대에는 불충이었으나 이 시대에는 그것을 인의로운 것이라고 여겼고요.

 사람이 워낙 많이 죽어가던 혼란한 시대라 생명이 귀중하지 않은 시대였으나 그 만큼 제자백가들이나 여러 지사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머리를 모으고 또는 행동하던 시기였고 시대상이 시대상이다보니 목숨보다 소중한 무엇을 위해서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르던 시기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다보니 그 이후의 획일적인 사상과는 다르게 수만가지의 신념들이 공존하고 있었죠. 개인>나라인 시대라고 평합니다. 어찌보면 21세기를 닮은.

 협사란 것이 나라가 혼란할 때에 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민간인들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다크 히어로 같은 존재라고 보면 이 시대를 절정으로 관의 영향이 커진 시기에는 힘이 없어져서 서서히 저물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영선이는 이 시대의 사고방식을 타고났습니다. 현실에 타협하긴 했지만 후세대에서도 낭만을 간직한 옛시대의 잔상을 그리고 싶었죠. 물론 완벽하진 못하지만요. 영선은 서서히 현실과 타협하지만 끝까지 굽히지 않은게 몇몇개 있습니다. 영선이 이 경이 그를 모욕하자 목숨을 각오하고 굶었던 것, 희 치의 치부를 그 모욕을 받고도 죽어도 말하지 않은 것, 다 비슷한 맥락입니다. 외전을 보면 알겠지만 영선이는 명예을 알던 의로운 인물이기에 연인으로선 실망스러운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입니다만 어쨌든 영선은 현실에 타협했으나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고 고집이 엄청 쎄지요. 이 경에게 지지 않고 대들만큼 자존감이 강하니까요. 전쟁같은 싸움에서 결국 이 경이 졌던 것도 그도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나 영선만큼 뿌리깊지는 않아서(...) 영선이는 강한 사람입니다. 모쪼록 희 치도 이 경도 그에게 의지하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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