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6 관관저구(關關雎鳩) =========================
이 경이 멍하게 마루에 앉아 있는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부는데 숙릉군이 배를 깎은 것을 내와서 영선이 으적 씹어 먹고 한개를 이 경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주는 것은 주는 대로 받아먹는 이 경이다. 시원하고 청량한 과즙에 이 경의 마음이 풀린다. 이 경이 쭈뻣거리면서 주변을 본다. 하품을 하면서 백리 화, 그의 누이가 턱을 괴고 꾸벅 졸면서 누워 있었고 그의 친모가 하품을 하면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어느 모습을 보아도 귀족의 아녀자 답지는 않은 행동이다. 그리고 숙릉군이 마당에 앉아 배를 손에 쥐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영선을 닮았지만 키는 머리 두개 정도가 작은 숙릉군이다. 느릿하게 어금니로 배를 아물거리는 모습이 작은 동물 같아 보였다.
이 경이 평한다.
'주황 것들..'
이 경은 이제 영선의 식구들을 평범한 사람의 관점에서 평하지 않기로 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영선의 핏줄'이었다. 단 한사람도 이 경을 천자로 대하지 않으니 이 경은 이제 포기해서 시원한 배나 까먹었다. 바람이 솔솔 보니 이제 이 경도 어느덧 졸음이 찾아온다. 눈을 꿈뻑이던 이 경이 하품을 하자 영선이 조심스럽게 무릎을 내어준다. 이 경이 마루에 누워서 영선의 허벅지를 베곤 그 품에 파고들었다.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이 경이 꾸벅거린다. 영선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귓가에 들렸다. 영선의 손이 이 경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올린다. 이 경이 기분이 좋아 씩 웃으면서 잠에 들었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한참 후에 이 경이 서서히 정신이 들어 눈가에 경련을 일으킨다.
이 경이 온몸을 짓누르는 무언가에 눈을 슥 떴다. 늦여름 초가을에 풀꽃냄새 선선하게 불어와 몸도 적당히 노곤하고 기분도 좋아 대청에 앉아 가만히 배나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더니 잠이 와서 누워서 낮잠을 잤더니 가위가 눌린 것도 아닌데 뭔가 묵직했다.
이 경은 처음으로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주홍색 하얀색 줄무늬 고양이를 발견했다. 웅크려서 잠을 곤히 자고 있는 고양이의 색도 주황색이다. 동글 말아서 색색거리면서 잠자는 게 아주 편안해 보이신다. 아주 편안한듯 감히 천하의 천자 가슴이라는 그 세상에 더 높을 것이 없어 용상보다 더 귀한 곳에서 만족스럽게 오수(午睡)를 즐기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노란색 털뭉치. 배를 명치에 대고 순한 눈매 축 내리고 쿨쿨 차고 있는 소년 강아지에 이 경이 또 황당함을 느꼈다. 이건 또 뭔가. 이것이 숙릉군네 막내둥이 웃음이인것을 이 경이 알리가 없었다. 코를 고는 듯 자세히 들으면 드르렁 산다.
어느샌가 왼팔에 파고 들어간 주홍 머리. 고개를 돌린 이 경은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음지었다가 다시 원래의 돌아왔다. 음냐 거리면서 어깨랑 겨드랑이 죽지에 파고 들은 청년의 숱많은 주홍 머리가 휘날린다. 이 경이 픽 웃었다. 청년의 입가에 침이 조금씩 흘렀다. 닦아주고 싶은데 오른팔이 무거웠다.
보니 오른팔 위에 다리가 올려져 있다. 이 경이 기가 막혔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를 보았다. 영선의 누이가 그 팔 위에 발을 떡 올려놓고 침을 흘리면서 자고 있었다. 순수한 얼굴, 때묻지 않은 표정으로 이 경의 팔을 베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에 이 경은 차마 오른팔을 떼지를 못했다.
그리고 왼쪽에서 머리를 떡하니 올려놓은 것은 숙릉군. 오른쪽에서 마찬가지로 팔을 떡 올려놓은 것은 장모 백 소영.
주황것 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황당함에 천장을 보고 멍하게 있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자는 수밖에 더 있나...'
그래서 이 경이 나른한 표정으로 다시 수마에 빠졌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식구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 경이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이내 헛웃는다. 원래라면 목을 치라 명해도 백번은 했을 것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어쩐지 그 뻔뻔한 얼굴들이 밉지가 않아서 혀를 찼다.
일어나보니 옆에서 영선이 새근거리면서 자고 있었다. 그 당차던 아이의 일견 사랑스러워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이 경이 어찌 말을 할 수 없이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히지?'
하여간 이 경이 그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한참을 영선을 바라보다가 이루말할 수 없는 애정을 느끼고, 그에 더해서 척추 아래쪽이 짜릿해오는 기묘한 느낌에 거친 손을 들어 청년의 흰 볼을 쓰다듬고야 말았다. 음, 거리면서 몸을 웅크리는 모습에 그가 조금 더 대담하게 영선의 얼굴 옆에 손을 대고 몸을 기울였다. 이 아이는 답지않게 잠이 들면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말캉한 입술을 물고 입을 맞춘다. 얼굴을 조금 비틀어 각도를 맞추고 부드럽게 혀를 휘감고 입 안을 휘저었다.
그는 잠든 청년의 입 안을 희롱하면서 스스로도 기이한 열망을 느끼고 있었다. 점점 그를 향해 몸이 기울어졌다. 이 경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아이가 사랑스러워서 정말 참을 수가 없구나.'
사랑에 빠져 입을 맞췄을 때 그 때 무언가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낸다. 이 경이 놀라서 몸을 돌렸을 때 누군가가 웃으면서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이 경이 멍하게 그를 바라본다. 다홍색 치마를 곱게 입은 여성이 입을 가리면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뭐냐."
이 경이 불퉁하게 말을 하는데도 겁을 먹지 않고 당돌히 말한다.
"그 못난이가 예뻐요?"
"못, 못난이?"
처음에는 못난이라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자신을 칭하는 줄 알고 발끈했던 이 경이 움찔인다. 영선을 가르키면서 백리 화가 빙그레 웃었다. 영선이 못생겼다고?
영선이 그 순간 입을 헤 벌린다. 그 순간 이 경이 동감하는 마음이 들어서 답을 하지 않았다. 누구보고 못난이라는 거야. 진짜 못난이가. 볼을 꾹꾹 지르면서 이 경이 중얼거린다.
"그래. 이 못난이가 예쁘다."
백리 화가 아주 맑게 웃음을 터뜨린다.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소리에 이 경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영선과 닮은 웃음이었다.
"그 아이는 행복하군요! 나는 그 아이가 그럴 줄 알았죠."
누이가 다가와서 자는 영선의 볼을 꼬집었다. 눈가를 일그러트리는 것을 누이가 다정하게 그를 보았다.
"가족이란 피가 아닌 마음으로 이루어졌지요. 불행히도 우리는 어렸을 때 헤어졌고 나중에서야 만났지만 나는 우리가 마음으로도 이어진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나는 영선이를 몹시 사랑했죠. 이 애는 나의 반쪽이었고 우리는 찰떡궁합으로 말을 타고 달리고 삼촌을 골탕 먹였으니까."
이 경이 그 훈풍같은 미소가 걸린 얼굴을 본다. 누이의 눈이 휘어지고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아이는 운명에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싸웠고, 이겼으니 누구보다 강한 아이예요. 폐하께서는 이 아이를 사랑하시나요? 사랑하신다고 했으니 알겠죠? 마음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이예요."
누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하고 아껴주세요."
이 경이 영선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알겠다."
백리 화의 눈이 휘어졌다. 영선을 닮은 누이의 웃음에 이 경이 기분이 좋아 그에 마주 웃었다.
****************************
- 앙, 벌리세요.
오밀조밀한 영선의 분홍색 입술이 살짝 벌려지고 가지런한 귀여운 치아와 분홍색 촉촉하고 말랑한 혀가 보인다. 이 경이 침을 삼켰다. 깍지 낀 손에 머리를 대고 이 경은 천장을 바라보며 점심 때 그가 잠시 흥분을 느꼈던 영선의 목소리를 생각한다. 이 경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입을 벌리라던가, 응, 입을 단정하게 꾹 닫던가.'
사람이 헷갈리게 그런 말을 해놓고선, 이 경은 밥을 먹다가 식구들 앞에서 음담패설을 하는 줄 알고 경기를 일으킬뻔 했다. 정숙하게 입이라도 꼭 다물면 좋으련만 살짝 벌려진 입 안이 몹시 앙증맞고 귀여워서 이 경은 그것을 머릿 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사가에서도 저렇게 사람을 홀리고 다녔겠지. 이 경이 기분이 순식간에 나빠 얼굴을 구긴다. 기녀를 가르쳤다는데 또 얼마나 나비를 꼬였을까.
이 경이 침상에 앉아서 무언가 바스락 거리고 있는 영선을 본다. 영선의 뒤통수가 빼꼼했다. 이 경이 잠시 눈치를 보다가 영선의 허리에 쓱 손을 댄다.
영선이 움찔 거렸다. 이 경이 영선의 가는 허리를 슬쩍슬쩍 만진다. 곧 영선이 허리를 비틀면서 장난기가 넘치는 소리를 냈다.
"아앙, 여보 그러면 안돼요."
이 경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안되긴 왜 안돼!"
이 경이 벌떡 일어나 영선을 뒤에서 덮쳐 몸으로 눌렀다. 영선이 바동거리다가도 결국에는 실실 웃으면서 이 경과 엎치락 뒷치락을 한다. 옷이 흐트러지는 것에 낄낄대던 영선이 말한다.
"음탕한 서방님! 밥을 먹을 때도 허벅지를 움찔거리곤, 나를 위해 그 다리를 쩍 벌릴 생각이었나요?"
"네가 헷갈리게 말해서잖아!"
이 경이 영선의 엉덩이를 꽉 잡는다. 영선이 눈을 흘기면서 묘한 표정을 짓곤 입술을 핥았다. 이 경이 요사스러운 혀의 놀림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아, 우리 서방님 언제 또 이렇게 음란한 향기를 풍길까."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색향. 이 경이 색스러운 얼굴을 한다. 그러나 영선은 침을 삼키더니 제 엉덩이를 꽉 쥔 손을 찰싹 친다.
"이럴 때가 아니예요."
이 경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영선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지방에 야시장에서 파는 초계국수가 얼마나 맛잇는줄 알아요? 광대들이 불로 재주를 부리죠."
"오호라."
이 경이 말했다.
"그럼 또 염색을 해야겠구나."
영선이 도리질을 치면서 은근한 미소를 풍겼다. 이 경이 그 뜻을 몰라서 어리둥절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영선이 옷을 갈아입고 왔을 때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어때요?"
이 경은 넋을 잃고 그것을 보고 있었다. 영선이 빙글 돌면서 우아하게 웃는다. 화사한 옥색 옷 위에 분홍색 매화가 수놓아져 있다. 하늘한 옷의 소매가 넓고 치마의 가운데의 색이 연한 하늘이었고 끝으로 갈 수록 진한 청옥으로 변했다. 하늘색 허리띠를 매고 주홍색 머리카락을 선녀처럼 고리 모양으로 쪽을 지니 반은 남겨서 향유를 빗어 늘어트리고 있었다. 진주구슬이 달린 옥비녀 두쌍이 짤랑거리고 있었다. 붉은 산호로 만든 노리개가 길게 늘어지고 치마 끝으로 보라색 술이 달린 비단 신발이 앙증맞게 보인다.
이 경은 처음에 그의 누이가 들어온 줄을 알았다. 키가 큰 것을 제외하면 몹시 아름답고 선녀같은 여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경의 숨이 멎었다. 안 그래도 감각이 있는 영선이 제대로 꾸며 여장을 하니 어찌보면 쾌활한 소녀같고 어찌보면 원숙한 여인이고 어찌보면 천상의 선녀같았다.
"제게 반했나요?"
영선이 여자처럼 꺄르르 웃으면서 말한다. 이 경이 답을 하지 못해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영선이 그에게 달려가 이 경의 뺨을 돌리고 입을 맞추었다. 이 경이 숨을 멈추었다.
"그리운 나의 집. 야시장에는 정말 오랜만이지, 나의 낭군."
영선이 이 경의 팔짱을 끼며 잡아 당겼다. 이 경이 얼굴이 붉어져서 잠시 입을 조개처럼 다문다.
"여기는 저희 가문이 유명하니 사촌동생이라고 하면 아무도 몰라요. 주홍 머리를 보면 귀비보다는 백 가를 먼저 떠올릴거니까."
영선은 이 경을 데리고 야시장으로 향했다. 호위는 없었다. 상환이라면 수족보다야 가족같으니 이 경이 그를 데리고 갔을 것이나 새로운 등 호위는 데리고 다니기에 민망한 감이 있었다. 어차피 남준이 함께 있는데. 그러나 이 경은 자신의 손을 잡고 쪼르르 달려나가는 그 모습을 보면 그게 어디 남준이냐는 생각에 아직도 반신반의한다.
영선이 이 경의 팔짱을 잡고 아양을 떨었다.
"서방님, 저거 사주세요."
"응?"
목련을 수놓은 자개 비녀다. 이 경이 얼떨떨하게 그를 보니 영선이 팔에 매달려서 그를 반짝이는 눈으로 보았다.
"봐요, 제 옥비녀의 구슬이 이제 바랬답니다. 저는 부인들 모임에 나가지도 못해요."
샐쭉거리면서 하는 말에 상인이 맞장구를 친다.
"그래요, 대인. 저렇게 귀엽고 어린 부인이 슬퍼하는데 이 정도도 사주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지요!"
이 경이 기분이 좋아 씩 웃으면서 품에서 주머니를 꺼낸다.
"그래, 하나 사지."
영선이 목련 비녀를 들고 이 경에게 애교를 떤다.
"꽂아 주세요."
이 경이 구슬 비녀를 빼더니 방금 산 목련 비녀를 꽂는다. 상인이 신이 나서 말했다.
"아주 부인이 예쁘고 애교가 많으시네. 보아하니 숙릉군 어르신의 친척이신 모양입니다."
영선이 태연하게 말을 했다.
"둘째 조카이지요. 여기보다 저 남쪽에 살았는데 요번 여름이 더워서 북쪽으로 피서올겸 잠시 들렀습니다."
"저런, 몸이 약하신 모양입니다."
"서방께서 워낙 밤에 괴롭히시니.."
그렇게 말을 하면서 영선이 부끄러운듯 이 경의 팔을 잡고 그 뒤에 숨는다. 그 말을 지켜보던 이 경이 어이가 없어서 짧게 헛웃는다. 그것을 보면서 이상한 착각을 한듯 상인의 얼굴이 야릇해졌다.
"허허, 이거 부럽군. 내 아내는 애교라곤 한톨도 없는데."
이 경이 제 엉덩이를 꼬집는 손길에 속으로 치를 털면서 그 손을 몰래 털어낸다. 영선이 이 경에게 찰싹 달라 붙어 다시 길을 걸었다. 이 경이 기가 막혀서 말한다.
"뭐? 밤에 누굴 괴롭혀?"
영선이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틀린 말을 했나요? 첩의 정기를 쪽쪽 빨아먹어 후들거리게 만드시면서 내숭을 떠십니까."
이 경이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뻔뻔한 영선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 경이 허허 웃으면서 중얼거린다.
"그래. 네가 옳지. 내가 옳아도 널 어떻게 말로 이겨 먹겟냐."
영선이 새침한 모습으로 이 경에게 꼭 붙는다. 영선과 이 경의 키가 엇 비슷했으나 영선이 팔에 매달리니 키가 조금 작아보인다. 영선이 온갖 아양을 떨면서 제가 이 경의 부인이라는 듯이 동네방네 난리를 치고 다니니 이 경은 그저 영선이 하라는 대로 휘둘려서 결국엔 어린 아내를 부인으로 삼고 호화롭게 생활하는 천하의 도둑놈이자 행운아가 되어 있었다.
"네, 저 사람이 제 남편이죠! 생긴건 못되보여도 아주 자상하답니다."
"저를 아주 많이 사랑해서 비단 주머니에 넣고 항상 품에 지니고 있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고싶다고 하더군요? 호호."
"말을 더 섞으면 남편이 질투해요. 이이가 나이가 많아서 제가 다른 사람과 붙어 있으면 의심병이 도진답니다. 아이참, 또 노려보잖아! 아니에요, 여보. 이이는 화가 나면 그렇게 나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울음을 터뜨려 엉엉 울 때까지 괴롭힌다니까. 내일은 안되어요, 허리가 아프면 시부모께 절을 할 수 없잖아. 오해를 사서 화라도 벌컥 내시면 나는 찍 소리도 못하고 쫒겨날걸?"
이 경이 그저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뒷짐을 진다. 광대가 불이 활활 타오르는 쇠막대기를 가지고 놀다가 어느 순간 목구멍에 쑥 삼키다가 입에서 불을 뿜는다. 이 경이 깜짝 놀라서 영선의 몸을 가리니 영선이 깔깔 웃으면서 이 경의 몸에 매달리고 고양이 같은 두 눈을 깜빡이면서 올려본다. 이 경이 멋쩍어서 입맛을 다시면서 소매를 떨치려는데 영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서방님 오늘따라 이렇게 더 귀여우실까."
영선의 말에 이 경이 모르는 척 하고 광대가 불붙은 철구를 빙빙 돌리면서 춤을 추는 것을 바라본다. 흥이 나는 북소리와 악기 소리에 이 경이 곧 다시 넋을 잃고 광대들의 재주에 빠져 들었다. 영선이 그것을 말없이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은 광대들을 바라보았고 영선은 그것을 보는 이 경에게서 시선을 떼지못했다.
이 경이 초계국수를 먹으면서 시큼한 향에 콧등을 찌부린다. 그것을 보면서 영선이 깔깔 웃었다.
"이게 뭐냐!"
영선이 씩 웃으면서 이 경에게 대답했다.
"강남의 식재료가 향이 세지요."
이 경이 거의 국수를 먹지 못해서 남기자 영선이 고민하더니 점소이를 불러서 말했다.
"얘. 내가 돈을 줄테니 나가서 닭꼬치와 교자를 사오련? 저기 느티나무 왕 삼 아저씨 댁 알지."
어린 소년이 굽씬거리면서 말했다.
"그럼요. 마님."
영선이 돈을 주고 이 경이 그를 잠시 바라보다 생각했다. 영선은 밖에서 무척 활기가 넘쳤다. 그런 영선은 소탈하기도 했고 또 쾌활하기도 했고 하여튼 이 경은 궁 안에서 그와는 다른 활달한 모습에 잠시 어두운 표정을 했다.
'그는 남준..'
갑자기 이 경의 속이 느글거린다. 이 경이 중얼거렸다.
'궁 밖이 더 어울리는 사내지.'
영선이 이 경의 손등을 쳤다.
"자!"
이 경이 상념에서 깨고 정신을 차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교자와 포장지에 곱게 싸인 닭꼬치가 있다. 이 경이 짜증을 내면서 말했다.
"나는 행상에서 파는 싸구려 음식은 싫다."
이 경이 맛있게 닭꼬치를 다섯개나 먹어치우고 교자를 두 통을 비운다. 영선이 그것을 행복하게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영선은 이 경을 정말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이 정신없이 양념을 입가에 묻히면서 먹는다. 손에 덕지묻은 양념을 보던 영선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을 묻혔다.
손을 잡고 문지른다.
"자."
영선이 조용히 말했다.
"오늘 즐거웠죠?"
손수건을 접어 더럽혀지지 않은 면에 다시 물을 묻힌다. 영선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마지막 닭꼬치를 우물거리던 이 경이 몸을 기울였다. 영선이 웃으면서 손수건으로 입에 묻은 양념을 닦은다.
"응."
이 경이 영선의 황갈색 눈을 바라보았다. 영선이 쾌활하게 웃으면서 이 경에게 매달렸다. 이 경과 영선이 찰싹 달라붙어서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음식을 먹고 또 불을 가지고 노는 광대패를 구경했다. 영선이 그를 서방이라고 소개하고 부인이라 칭했을 때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생기가 넘치는 그 야시장 안에서 이 경은 그 활력에 찬 영선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영선은 매력적이었다. 평생을 통틀어 잊을 수 없을 만큼, 죽어서도 무덤에 가져갈 기억이라 생각할만큼.
"정말로."
이 경이 진심을 담아 한번 더 중얼거린다.
"잊을 수 없을만큼."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다. 영선이 묘안석같은 두 눈으로 이 경을 눈에 담았다. 이 경이 그 눈에 홀려 넋을 잃곤 중얼거렸다.
"즐거웠다."
영선이 환하게 웃었다. 이 경은 그것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색다른 영선의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가 좋았기에 이 경이 돌아오는 길에 한동안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이 경의 표정이 어둡다. 방 안에 결국 도착했을 때 이 경은 잠이 싹 달아나서 침대에 앉아서 옷을 벗지도 않고 느물하게 있었다. 무언가 입맛이 쓰고 착잡하다. 웃으면서 교태를 부리던 영선의 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그 때 이 경의 귓가에 무언가 사륵 스치는 소리가 난다. 이 경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이 경의 앞에 선 영선이 팔짱을 끼고 묘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 경이 그 뜻을 몰라 멍하게 바라본다. 이유는 모르지만 영선이 무척 매력적인 것은 안다. 달빛이 문살 사이로 영선을 비추고 있었다. 상아같은 피부가 달빛을 받아 형형하게 빛났다.
그 때 느릿한 영선의 목소리가 이 경의 귓가로 들려왔다.
"아쉽지 않으세요?"
이 경이 멍하게 그를 본다. 영선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매력적인 웃음을 짓는다.
"기껏 이렇게 어여쁘게 꾸며 놓았는데 이제 못 본다는게."
궁궐에 가면 세인의 눈이 있으니 못하겠지. 아쉽다. 아쉬워. 영선의 낭랑한 목소리도, 사근하고 나붓한 몸짓도, 마음을 들썩이는 교태도 보지 못하겠지.
영선의 말이 이 경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이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영선이 사악하거나 혹은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꼬리가 살랑이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요호같은 것. 이 경이 순간 생각하면서 영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럼, 기억에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옳겠군요."
영선이 말꼬리를 늘이면서 야릇한 얼굴을 한다. 이 경이 넋을 잃고 영선에게서 시선을 뗴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1. 시선이 영선인 것을 말하는 것은 생략했습니다. 영선이 성격상 오래 숨기지는 않아서 실컷 놀리다가 말했습니다.
2. 이굥이 나이는 비밀이예욧!!! 뗵!!
3. 환골탈태->x 반로환동-> o, 반로환동 아니예요ㅋㅋㅋㅋ 거기까지 가면 그냥 무협 판타지..그냥 채식하고 소식하고 운동 많이하면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니까 동안 유지함...
4. 탈피스 님이 삼천번째 댓글을 하셔서 리퀘하신 것이 '희 치 러트'입니다. 본래 성깔+러트 와서 이성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희 치 앞에 멋도 모르고 까불대는 이굥이..
5. 원래 제가 장상사 최심간 파트때 여장플을 쓴다고 했는데 무산되었져. 원래 결혼식 초야에 여장플 쓸려고 했는데 진지한 분위기에 갑자기 서방님 하앙하앙 결혼식 기모찌 할 수는 없어서 생략했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