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148)

00142 관관저구(關關雎鳩) =========================

 희 치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이 경과 영선은 그 자리를 피해주었다. 희 치는 희와의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고 그저 애통해하다가 이 경과 영선이 위험에 처하자 애써 마음을 다잡고 상처를 외면한 것에 불과했다. 그의 마음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경과 영선은 묘 앞을 서성인다. 문득 이 경이 중얼거렸다.

"치는 무슨 사정이 있는 거겠지."

 희 치는 가끔씩 위험한 빛을 일렁였고 그를 두렵게 만드는 기운을 드러냈고, 또한 음습하게 웃었지만 어쩔 때는 이 경이 연민할만큼 가엽고 처연한 얼굴을 했고 나약하게 홀로 있었다.

 음월전에 앉아, 홀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는 모습이 세간이 대나무와 같다며, 홀로 독야청청하는 모습이 깨끗하다며, 정말 깨끗하고 하늘의 선인같은 영웅이라며 칭찬을 할 때도 이 경은 그 모습이 외롭다고 생각했다. 무언가가 너무나도 쓸쓸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온다고 생각했다.

 이 경이 갸웃거린다. 영선이 웃으면서 말을 했다.

"언젠가 희 치가 말해줄 날이 있겠지요."

 그 과거는 오직 희 치 그만이 입에 담을 일이다. 그쯤이 되어서 오해가 풀리고 다시 완전히 미혹없이 서로를 마주할 일이 있을까. 이 경이 갸웃거리면서도 금새 마음 속에 그것을 지우고 사녀묘 주변을 서성인다. 이 경이 웃으면서 품에 안긴 태이를 보았다.

"요 놈은 정말 잘생겼구나!"

 나를 닮아서, 라는 말은 양심상 하지 못했다. 그리고 태요의 반짝이는 눈을 보고 그 철철 넘치는 애교를 보는 순간 이 경이 입을 헤죽 벌렸다.

 생각보다 많은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희 치가 이 경에게 사실을 고백한 날은 사녀묘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희 치의 부름에 음월전으로 온 이 경은 정좌를 하고 앉은 희 치에게서 그 지난 날의 과거를 모조리 들었다.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듣던 이 경의 얼굴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창백해져간다. 곧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이 경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렸다. 이 경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이 경이 중얼거렸다.

"네가, 그랬구나. 네 과거가.. 그래서 그 애가.."

 희 치가 충격에 휩싸인 이 경을 잠시 바라본다. 그가 바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경은 평생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희 치는 지금이 아니면 이 말을 할 용기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을 억누르고 그에게 고변했다. 이 경은 그 자리에서 바로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가 없어서 태양전으로 돌아가 한참을 희 치와 영선을 만나지 않았다. 희 치는 태이와 태요를 돌보면서 영선 또한 보지 않아 음월전에 홀로 지냈다.

 희 치에게 많은 생각이 들게하던 지난 한 달이었다. 한 달 후에 희 치는 이 경의 부름을 받았다.

"무슨.."

 이 경이 그를 부른다. 이 경이 수회지에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희 치가 머뭇거리다가 그 손짓의 그의 옆에 간다. 그가 옆에 온 순간 이 경이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같이 걷자."

 그 말에 희 치는 잠시 눈을 일렁거리다가 이 경과 어깨를 맞춰서 수회지 변두리를 산책했다. 이 경이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엔 많은 충격에 휩싸였지. 내가 나의 모후께서 이 국사를 돌보면서 공적도 많으나 그에 비견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질렀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한낱 줄글이었고 내게 체감이 되지 못했는데 내 주변에서 너가 있었구나."

"......"

"너는 인생이 부서졌고 아득하게 나락으로 떨어졌지. 나는 네가 무서웠다. 너가 내 모후의 파편에 의하여 일그러졌으니까. 괴물이 되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학대하고, 이민족을 학살하고 고문하며, 너의 가족을 죽이고 널 고문한 사람들을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미치광이 같은 짓을 저지르는 것이 소름이 끼쳤다. 너가 무서웠어."

"......"

"하지만 너가 가여웠다."

 이 경이 발걸음을 멈췄다. 희 치가 고개를 들었다. 희 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당이 있었다. 조그마하지만 분명히 사당이 있었다. 이 경이 중얼거렸다.

"네 가족들, 시신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어딘가 죄인들을 껴묻는 곳에 존재하겠지. 황궁의 죄인들은 그 시체마저 엄격히 관리를 하니 곧 찾을 수 있을 거다. 정 위현은 반역자니 어찌할 수는 없다. 복위는 불가능해. 하지만 눈을 감아줄 수는 있다. 그리고 네 일에 관련된 인물들을 다 처리했어. 네가 싫어해도 어쩔 수가 없지. 짐은 그 벌레 같은 종자들이 참을 수가 없으니까! 음, 그런 종자들을 어떻게 내버려둔단 말이냐. 하여튼, 이건 말리지마라. 아, 그리고 네가 기억을 잊어버렸다는 그 약혼녀의 이름을 찾았어."

 이 경이 숨을 잠시 쉬더니 이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 소화다. 구 소화. 이번엔 잊으면 안된다. 알았지?"

 희 치의 숨이 멎는다. 이 경은 웃으면서 희 치의 어깨를 탁쳤다.

"가서 인사를 드리고 와. 너의 옛날에 소중했던 존재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남겨."

 나의 파멸은 너무나도 급작스러웠고 너무나도 끔찍했다. 희치가 되뇌었다.

 희 치가 사당의 안을 바라본다. 어느새 희 치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 위패를 바라본다.

'정 위현(正慰賢).'

 언제나 생각하지만 그 이름은 그 사내와 어울리지 않았다.

'눈을 감아준다는 것이 이런 의미인가.'

 반역자라 세울 수 없는 위패가 그 안에 떡하니 있었다. 희 치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사당의 문이 닫혔다. 그는 과거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외로워서, 지치고 힘이 들어서, 말이 나올 수 없이 아프고 아파서 볼 수 없었다.

 처음으로 희 치는 위패 앞에 섰다.

'희 경(喜炅).'

'공 정아(恭情阿)'

'희 가하(喜可河)'

'정 위현(正慰賢).'

 그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기억에 상기시킬 때마다 희 치의 기억 속에 그가 외면하려했던 많은 편린들이 떠오른다. 유년시절과 청년의 평화로운 일상이 떠오른다. 희 경이 그에게 글을 가르쳤고 똑부러지고 바른 아들을 칭찬하여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 정아가 자수를 하자 희 치는 어미가 손에 피가 나는 것이 안쓰러워 자수를 배우겠다고 몽니를 부린적이 있었다. 희 가하가 어둠을 무서워하여 희 치는 항상 밤에 길을 걸을 때면 여동생의 손을 잡고 함께 마을을 걸었다. 소피를 볼 때도 따라가서, 변소의 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지. 희 가하가 희 치에게 고마워하면서도 부끄러워했다.

 희 치가 헛웃음을 터뜨린다.

 그런 기억이 있었다. 분명 가둬놓은 기억이라, 고통스러워서 외면했던 기억이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 희 치가 사당에 몸을 엎드렸다.

"위현."

 목소리가 울린다. 희 치가 몸을 웅크리고 어깨를 떤다. 길디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깔리고 희 치가 얼굴을 보이지 않고 몸을 웅크린다. 갈라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현."

 그의 삶에 파멸이 자리하여 고통이 가득했다. 어느 순간 희 치는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희 치는 포기했고 그저 찢겨져 나갔었다. 그저 피를 흘리고 그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지. 이 경이 웃었나. 아니면 영선이가 다가와서 손을 잡았나. 같이 도망가자고? 그것도 하지 못했지.

 그리고 그와 똑같은 색의 흑벽의 두 눈이 희 치와 마주했다.

- 아앙..

 티끌의 더러움 없이 깨끗한 아이가 맑게 웃었다.

희 치가 울음을 삼킨다.

"정 위현.."

 희 치가 결국 통곡을 하여 사당에 안에서 우짖었다.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벌레처럼 몸을 비벼 통곡을 하며 그 이름을 부르짖었다.

"정 위현!!!!"

 이 경이 수회지를 걷다가 멈칫하다. 이윽고 이 경이 두 눈을 꾹 감고 다시 발걸음을 뗐다. 말없이 발걸음을 걸어,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 통곡을 무시하곤 중얼거렸다.

"세상에 한 달이나 우리 아기들을 못봤단 말이야. 세상에, 세상에.. 한참 귀여울 나이인데 우리 태이와 태요가 나를 못 알아보면 어찌하려고."

 이 경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종종 걸음으로 관저궁을 향했다. 그의 뒤로 수회지의 기슭 외진 곳의 수풀 사이로 빼꼼하게 작은 건물이 보였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이 마지막 입니다. 약 30분~ 1시간 내로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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