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8화
긴 한숨에도 황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탁자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는 하는 모습이지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손조익 그자가 오늘 새벽 육추명과 함께 남주성으로 향했다지?”
“예. 알고 계셨습니까?”
차란이 참다 못해 해가 진 이때에 황제를 찾아온 건 금일 손조익의 행보 때문이었다. 은밀히 감시를 붙여 두어 동태를 살피고 있던 손조익이 금일 이른 새벽 사마 육추명과 함께 남주성 성주를 만나러 갔다는 사실을 보고 받았다. 설마 황제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틀 전 남위성 성주에게 은밀히 연통을 보낸 것 또한 알고 있다.”
차란은 금시초문인 얘기를 들으며 허탈함에 다시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야 황제보다 나은 게 없이 승상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다.
“지금이라도 손조익과의 약조를 지키셔야 합니다.”
“나의 황후가 될 자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손조익의 동향이나 제대로 감시하여라.”
황제는 말을 번복하는 법이 없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차란이 황제의 명에 더 토를 달지는 못하고 끝내 백기를 들었다. 적어도 황제가 손조익에게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는 걸 안 것으로 오늘은 만족해야 했다. 다만 이렇게 된 이상 이 얘기 역시 안 꺼낼 수가 없겠다 생각하며 황제를 불렀다. 황제는 이제 차란이 좀 지긋지긋한 모양이었다.
“또 무엇이냐.”
“폐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소의 마마의 처소라도 옮기게 해 주십시오. 비은궁은 정말 너무한 처사이십니다.”
차란은 그날 대전에서 황제가 비은궁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던 때에 황궁에 그런 궁이 있었나,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그리고 비은궁의 존재가 떠오른 순간 아찔했던 그 심정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비은궁은 궁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민망한 곳이었다. 담벼락을 뒤덮은 흉물스러운 덩굴 때문에 차란은 가까이 다가가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곳을 처소라고 후궁에게 내렸으니 그날 누구 하나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가장 놀란 사람은 아마 이설일 거라고, 차란은 생각했다. 사내가 타국에 후궁으로 끌려온 것도 서글픈데 받은 처소라는 게 그런 흉가라니. 여태껏 울며불며 황제에게 달려와 다른 처소를 내려 달라 간청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하기야 연국에서 처음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눠 보니 그럴 심성은 아닌 것 같았다.
“비은궁이 뭐가 어떻단 말이냐.”
태연자약하게 묻는 황제지만, 황제라고 비은궁의 몰골을 모르지는 않는다 생각한다. 이설에게 그 궁을 처소로 하사한 것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으리라. 단지 차란이 이해 못 하는 황제의 의중은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설을 박대하느냐는 것이다. 이름을 준 정인인 데다가 후궁으로 맞이하기까지 했는데 정1품도 안 되는 첩지도 모자라 비은궁으로 쐐기를 박으니, 초야 일이 없었더라도 지금 황궁에 도는 흉흉한 소문을 피하지는 못했으리라.
“작년 소청각(甦請閣) 개축 당시, 폐하께서 영선사(營繕司:건축, 토목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청) 관리들에게 비은궁 같은 흉물을 놔두고 왜 멀쩡한 전각을 부수고 다시 짓냐며 경을 치셨습니다. 국비를 쓸데없이 낭비한다 하여 경리원(經理院:황궁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 관리들까지 줄줄이 파직하지 않으셨습니까.”
손조익과 그 작당 세력들에게 황궁 재정 상태를 은밀히 보고하는 경리원 관리들을 황제가 벼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차란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황제는 잠시 생각해 보는가 싶더니 이내 가벼운 조소로 대답했다.
“그때 너도 영선사 늙은이가 한 말을 분명 듣지 않았느냐. 비은궁은 사용된 목재가 모두 태금궁에 견줄 만큼 단단하고 품질이 좋아 개축이 시급한 게 절대 아니라고.”
“하오나……,”
“목재뿐이랴? 기둥에 장식된 조각과 벽의 세공 벽화는 또 얼마나 걸작이라더냐. 황궁에서도 손에 꼽히는 넓은 부지에 연못과 후원까지 모두 갖춘 곳인데, 네놈이 보기에는 뭐가 그리 너무한 처사란 말이냐.”
“이끼 낀 연못에 잡초만 무성한 후원입니다. 그리고 좋은 목재든 세공 벽화든 다 무슨 소용입니까. 담장에 늘어진 덩굴만 봐도 흉물인 것을요.”
황제에게 고하지는 않겠지만, 훈육 상궁들이 어린 세습 궁녀들의 담을 키운다며 달밤에 데려가 담력 훈련을 하는 곳으로도 유명한 게 비은궁이었다. 후원 나뭇가지에 묶어 놓은 비단 끈을 가지고 오는 것인데 성공하는 궁녀가 많지 않다, 윤 내관에게 전해 들었다. 열에 하나 정도 까무러치는 궁녀도 있다 하니 보통 흉악한 궁이 아닌 것이다.
처소로써 비은궁의 부적격함을 더 낱낱이 밝히려던 차란을 막아선 건 내실 밖 윤 내관의 목소리였다.
“폐하, 탕약을 준비해 왔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잠시 기다리거라.”
“예.”
막 입을 떼려던 차란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쳐다보는 시선은 더 이상 들을 얘기는 없으니 이만 나가라는 눈빛이었다. 더 버텼다간 정말 혀가 뽑혀 흑영의 화살 과녁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잠시 잊고 있었으나 황제는 근래에 늘 심기가 불편한 눈치였다. 윤 내관이 들이는 탕약도 잠들기 전 머리앓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마시는 것이다. 황제가 겨우 이 정도 앓이에 탕약을 마시는 것은 즉위 후 거의 보지 못했다. 윤 내관의 말에 따르면 요즘 통 침수에 드시지 못하는 것 같다 하였다. 어쩐 일인지 새벽 잠 설치는 소리가 자꾸만 들린다고.
“더 할 말이 남았느냐.”
대놓고 눈치를 주는 황제는 이제 차란을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팔걸이를 팔꿈치로 지지대 삼아 머리를 괴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말없이 보고 있으면 비현실적일 정도로 황홀한 그림인데, 도무지 그 속은 알 수가 없다.
결국 긴 한숨과 함께 차란이 뒤로 물러나지만, 쉬이 뒤돌지는 않았다.
“신 비차란 물러가기 전 한 말씀만 올리고 싶습니다.”
“빨리하고 썩 꺼지거라.”
“루 소의 마마가 폐하와 손조익의 약조가 된 것은 그분이 폐하에게 천명을 나눠 준 정인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도리를 다하여 천자의 업을 다하소서.”
“……네놈이 정말 루 소의 그자 때문에 승상 자리를 내놓고 싶어 안달이 났나 보구나.”
“송구합니다.”
“봐주는 건방은 여기까지다. 이만 나가거라.”
순식간에 싸늘히 식은 황제의 표정을 보며 차란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소의 때문에 승상 자리를 내놓고 싶지는 않으나 해야 할 말을 하였다고는 생각한다. 아무리 마음에 차지 않아도 하늘이 맺어 준 연인이라는 것은 본디 서로 간에 도리를 다해야 하늘의 업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초야는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비은궁의 문설주 한 번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니, 황제가 소의에게 얼마나 무관심한지 훤히 보였다.
하지만 당장은 모가지도 날아가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을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차란은 황제의 심기를 더 거스르기 전 자리를 떴다.
*
차란이 나가고 곧바로 윤 내관이 탕약을 들여왔다. 벌써 며칠째 마시고 있는 탕약인데 효능이 전혀 없어 여전히 새벽에 잠에서 깨 뒤척이고 있었다. 까닭을 묻는 태의에게는 머리앓이가 심해 도통 잠을 이룰 수 없다 하였으나 기실 그 앓이의 원인이 꿈 때문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이러니 탕약 따위로 나아질 침수가 아니었다.
탕약을 비우고 윤 내관에게 탁자에 쌓인 상소문을 모두 치우라 명한 뒤 내실에 혼자 남았다. 먼저 부르거나 황제가 위험하지 않은 이상 벽 뒤에 흑영은 기척조차 내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괘씸한 소리를 한 승상 비차란을 곱게 내보내 준 것이 못내 아쉬웠다. 기어오를 때로 오르니 이제 저런 소리를 황제의 면전에 대고 한다. 정말 화살 과녁에 세워 두기라도 해야 하나 싶으나 차란이 그 정도에 겁먹을 리가 없었다. 황제가 제 오랜 친우여서가 아니라 차란 그놈은 원래 생겨 먹은 게 그러했다. 세상천지에 무서울 것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놈이다.
모두 의문스럽게 생각은 하고 있으나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는 것들을 차란은 잘도 지적하고 묻는다. 그게 승상의 책무라 믿는 듯했고, 황제는 그게 귀찮았지만 크게 노엽지는 않았다. 차란은 적당히 치고 빠지는 기술로 여기까지 오른 자다. 그것 말고는 재주랄 게 없는 놈이 왜 오늘은 저렇게 도를 넘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황제는 윤 내관이 함께 들여온 차를 한 모금 맛봤다.
“연국에서 보낸 찻잎을 우린 차입니다. 향이 좋고 수면에 좋다 하여 준비하였습니다.”
나이 지긋한 윤 내관은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이설을 언급하지 않는다. 차란이 세 치 혀로 황제의 오른편에 서 있다면, 윤 내관은 침묵과 충정으로 뒤를 지키는 자다. 그는 황제가 묻지 않는 한 이설에 관해 단 한마디도 고하지 않았다.
처음 맛보는 향이 나쁘지는 않으나 뒷맛이 시큼해 두 번 마시고 싶은 차는 아니다.
마치 이설처럼.
여름의 초입 어느 날 황제는 천명을 받았다. 기묘한 꿈을 꾸고 일어난 이른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다. 은사로 수를 놓은 듯 팔목 안쪽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도 황제는 동요하지 않았다. 귀찮게 되었다, 생각했을 뿐. 천지명관을 통해 그 이름을 가진 자들의 신상 문서를 보았을 때도, 가능성이 있는 단 한 명이 자신과 같은 사내이며 연국의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노여워하지 않았다. 제법 쓸 만한 패가 생겼다고 고개를 끄덕인 게 전부였다.
이설을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 흐릿하다. 잿빛 머리카락이 특이하다 생각했던 것과 흘끔거리며 자신을 보는 시선이 불쾌했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제 말을 듣고도 의연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후하게 쳐줄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들지 않았다.
첩지를 내리던 날 대전에서 다시 본 이설은 본래의 제 머리카락을 모두 가리고 있어 그나마 기억하고 있던 모습을 완전히 지운 채였다. 변변치 않은 그 외관에 흥미가 생길 리가 없었다. 황궁 지천에 널린 것이 절색의 여인들이었고 모두 황제의 것이었다. 희고 고운 피부를 빼고는 뭐 하나 그 여인들보다 나은 게 없어 보였다. 금국인 기준에는 썩 화려하지도 않은 장신구 따위에 눌린 수수한 외모는 황제의 취향이 아니었다.
취향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용모 때문에 이설에게 소의 첩지와 비은궁을 하사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이유 중 하나였을 뿐 전부가 되지는 못했다. 어차피 손조익의 견제를 막을 도구로 데려온 것이지 품으려고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용모가 아름다웠으면 한 번 거들떠는 봤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우가 지금보다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 황제에게 이설은 눈 밖에 난 관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