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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1)화 (11/300)

달의 황홀경

11화

“마마, 혹 지금 녹염각에 다녀오실 생각이십니까?”

눈치가 귀신같이 빠른 주 상궁이 물었다. 이설은 대답하는 대신 차를 마시며 웃었다. 반응이 없자 이설이 묻는다. 그래도 되겠는가? 상궁에게 허락을 구해야 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설은 주 상궁이 딱 잘라 안된다 하면 마음을 접을 생각이었다.

설핏 제 눈치를 보며 묻는 이설에게 주 상궁이 여상한 말투로 대답했다.

“채비하겠습니다.”

“…….”

“다만 석반을 드셔야 합니다. 항상 밥을 남기시니 아랫것들이 걱정합니다.”

의외로 쉽게 허락을 한다 싶던 주 상궁이 어려운 과제를 남기며 국그릇을 이설에게 밀었다. 이설이 향이 짙고 간이 센 음식을 멀리하여 궁녀들이 이설의 입맛대로 조리법을 모두 바꿨다.

덕분에 이제 못 먹는 음식은 많이 줄었으나 언제나 양이 문제였다. 이설이 보기에 금국 사람들의 한 끼 식사 적당량은 기함을 토할 정도로 많았다. 저가 사내이고 상전이니 이리 주는 걸까 싶었는데, 다른 궁녀들이 먹는 양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그릇을 완전히 비운 날이 한 손에 셀 정도다.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꾸역꾸역 밥과 국을 번갈아 가며 먹고 있는데 주 상궁이 부른다. 마마. 목소리가 좀 전과 달리 영 내키지 않는 말을 해야 하는 사람처럼 꽉 막혀 있었다.

“탄영당(綻榮堂)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탄영당이라니?”

“사나흘에 한 번씩 폐하의 후궁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곳입니다.”

“…아…….”

미련하게도 그곳에서 왜 나에게 기별을 보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없다 자탄하며 쓰게 웃자 주 상궁이 눈치 빠르게 말을 이었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마마의 책무는 아닙니다.”

“폐하의 후궁은 얼마나 된다고 했지?”

“정2품 양 소원 마마와, 정4품 우 미인, 허 미인 마마 그리고 정5품 감 재인 마마가 있습니다. 그 외 81어처에 보림, 어녀, 채녀들도 있으나 양 소원 마마께서 허락한 이들만 탄영단 출입이 허락됩니다. 보통은 열 명 내외입니다.”

“실세가 바로 그 양 소원이겠군.”

“예. 사방장군(四方將軍) 중 하나인 우장군 원후연의 차녀입니다. 입궁한 지는 한 해가 지났고, 마마가 오시기 전에는 내명부 최고 품계 후궁이었습니다.”

사방장군의 차녀라니 가문의 위세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기연이나 유강에게 물으면 왕족 출신인 자신에게 비할 바가 되겠냐 하겠지만 연국은 위세랄 게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설은 자신이 더 높은 가문 출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틀 뒤입니다. 원치 않으시면 몸이 안 좋으시다 기별 보내겠습니다.”

“…아니야.”

“예?”

“간다고 전하게.”

“…예, 명대로 하겠습니다.”

내키지 않는 명을 받든 사람처럼 대답한다. 후궁들이 모여 나누는 담소라 하니 오가는 얘기들을 예상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거절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황궁 생활은 길게 보아야 한다. 잠시 머물다 갈 곳이 아니란 걸 감안한다면, 언제든 맞닥뜨릴 후궁들이다. 원치 않는다 하여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탄영당 얘기를 꺼내고 난 뒤 눈에 띄게 느릿해진 숟가락질을 본 주 상궁이 상을 물릴까 묻자 이설이 반색을 하며 그리하라 했다.

상을 치우고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금세 날이 저물었다. 이설은 이때의 날씨를 가장 좋아하여 석반 후 궁의 담장을 따라 산책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궁 밖으로 나간다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멀리 나간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단향이 급하게 피백을 가져왔다. 춥지 않으니 괜찮다는 데도 기어코 이설에게 입혀 흐뭇해했다.

마마는 백색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거짓 없이 고하는 말에 이설이 낯부끄러워 괜히 얼굴을 비볐다.

비은궁 밖에서 보는 달은 안에서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황궁 뒷산에 걸린 달이 휘영청 밝은 것이, 연국에서 보던 것과도 다르지 않아 문득 연국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서신을 하나 보냈는데 잘 닿았는지 모르겠다. 모쪼록 답신이 빨리 오면 좋겠다 생각하며 등불을 든 연화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늦은 밤 너무 많은 사람이 움직이면 눈에 띄기 쉽다 하여 주 상궁과 연화만이 이설을 따라나섰다. 이설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건 사실이나 눈에 띄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다들 너무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마마, 이쪽입니다, 이쪽. 빨리 오셔요.”

“연화야 조금 천천히 걷자. 구경할 게 많구나.”

등불을 든 연화가 앞서 걸으며 이설을 재촉했다. 이설은 그보다 뒤처져 느릿하게 걷는데 연화는 그게 못내 답답한 모양이었다. 궁 밖에 자유로이 처음 나와 본 이설에게는 이것저것 새로운 게 너무 많아 안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연화가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이설은 걷던 길을 벗어나 다른 궁의 담벼락이나 곳곳에 세워진 조각품들을 구경했다. 주 상궁은 그 뒤를 묵묵히 따르기만 했다.

주 상궁 말대로 한참을 걸어서야 녹염각에 도착했다. 금잔화가 그리 아름답게 피었다면 사람들 기억에 쉽게 잊힐 장소가 아닐 텐데 왜 발길이 끊겼다 할까, 들었던 의문이 녹염각 앞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궁의 구석에 허름하고 좁은 입구를 지나 돌다리를 건너야 갈 수 있는 누각을 일부러 찾는 궁인들이 없는 게 당연지사였다.

“다리 폭이 넓지 않습니다. 조심하세요, 마마.”

“마마 발아래에 등을 더 가까이 비추거라.”

“연화야 위험하다! 난 괜찮으니 앞을 보고 걷거라.”

연화가 뒤로 걸으며 이설의 발치에 등불을 비췄다. 주춤주춤 뒤로 걷는 모양새가 위험해 보여 말렸지만 다리를 다 건널 때까지 연화는 이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 밑으로 떨어졌으면 정말 어쩔 뻔했느냐, 연화야.”

“어두워 그렇지, 깊은 연못이 아닙니다. 다리도 높지 않구요.”

“그래도 위험하다. 다시는 그러지 말거라.”

“아휴, 마마는 걱정도 팔자이십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푸스스 웃고 마는 연화가 손을 내밀었다. 세답방 허드렛일을 하던 아이라더니 손이 거칠어 놀랐다.

오래된 누각이라 들었는데 정말 그렇다. 크기도 작아 무엇에 쓰려고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돌바닥이 평평치 못하니 제 손을 잡으라던 연화는 앞서 걸으며 몇 번이나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연화를 도우려니 여의치 않은 듯했다.

산에서 자라다시피 한 이설이 보다 못해 연화와 자리를 바꿔 걸으려던 때였다. 좁은 길을 지나자 크게 트인 공터가 나왔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곳을 연화가 등불로 비추자 온통 금잔화 천지다.

“와……,”

“보셔요, 루 소의 마마!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다 금잔화입니다.”

“정말 아름답구나. 주 상궁도 이리 와서 보게. 예쁘지 않은가?”

“예, 무척 아름답습니다.”

이설이 서 있는 곳부터 등불이 비추지 않는 저 먼 곳까지 모두 만개한 금잔화다. 주 상궁의 말대로 꽃잎이 샛노란 것도, 다홍인 것도, 그리고 그 중간인 것도 이리저리 한데 어우러져 있으니 마치 태양을 머금은 꽃과 같다. 고요한 밤의 정취에 만개한 꽃밭에 서 있으니 앓고 있던 시름이 모두 날아가는 듯하다.

“안으로 더 들어가 보시겠어요?”

“글쎄…. 꽃밭을 해치고 싶지는 않구나.”

“이쪽에 누가 길을 내놓았으니 꽃을 밟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화가 이미 앞장서 걸으며 이설을 불렀다. 주 상궁은 이설을 따라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금잔화가 예쁘기는 하나 이 달밤의 꽃놀이를 즐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연화가 밝혀 주는 길을 따라 걸으며 이설은 주위를 살폈다. 온통 금잔화만 가득한 곳이다. 누군가 일부러 길까지 만든 걸 보면 자주 드나들거나 관리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마른 꽃을 털어 씨를 가져가려 했는데 이곳을 돌보는 자가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주인 없는 물건을 훔치는 기분이다.

“마마, 꽃은 어떻게 옮겨 심나요? 몇 송이 뽑아 볼까요?”

“마른 꽃을 찾아 꼭지를 뽑으면 된다. 그럼 씨앗이 나올 거야.”

“그냥 몇 송이 한 웅큼 뽑아 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씨앗을 심으면 꽃이 피는 데까지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꽃만 보려 꽃을 심는 게 아니란다. 싹을 틔우고, 풀잎이 나고, 줄기가 자라 봉우리를 틔우는 그 과정이 즐거운 거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빨리 저희 궁 앞에서 이렇게 금잔화가 잔뜩 생겼으면 좋겠는걸요.”

뾰로통 입술을 삐죽이는 연화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 이설도 그저 웃었다. 연화와 같은 생각을, 이설도 어렸을 적 했다. 꽃을 보는 즐거움만 알았을 때는 이설도 씨앗을 심고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연화가 마른 꽃의 꼭지를 뽑아 털어 낸 씨앗을 내밀었다. 이게 씨앗인지 묻기에 그렇다 대답하니 무척이나 신기해하고는 두루주머니에 씨앗을 모으느라 정신이 없다.

함께 씨앗을 채취하러 온 이설은 고요한 달밤의 꽃놀이 정취에 흠뻑 취해 꽃씨는 까맣게 잊었다. 누각 앞 연못에 물고기가 헤엄치며 만드는 물소리도, 바람이 부는 소리도, 달빛이 만드는 어스름한 빛도 모두 아름답다.

달빛에 금잔화가 은은히 빛을 내는 걸 보니 낮에 보아도 절경이겠다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비은궁에서 숨어만 살 것은 아닐 테니 언젠가 해가 밝은 날에도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연화야, 너무 늦었으니 이제 그만 궁으로 돌아가자. 그리 많이 담지 않아도 괜찮다.”

두루주머니가 볼록해질 때까지 씨앗을 담은 연화에게 말했다. 이미 이설과 멀리 떨어져 들리지도 않는가 보다. 연화와 함께 등불도 멀어져 이설은 온전히 달빛에만 의존해 경관을 둘러봤다. 멀리 떨어진 주 상궁은 보이지도 않고, 기척도 없다. 사박사박 연화가 걸어 다니는 소리만 아니면 이 넓은 곳에 혼자만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연화야, 게서 뭘 하니? 그만 이쪽으로 오거라.”

이경이 되기 전에는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멀리 서 있는 연화를 불렀는데 듣지 못했는지 묵묵부답이다. 뭘 하고 있는 건지 등불만 꼭 쥐고 자리에 목석처럼 서 있었다.

연화야? 의아함에 다시 연화를 부르자 서서히 고개가 움직여 이설과 마주한다. 멀리 있어도 겁먹은 표정이라는 건 확실히 알 것 같다. 놀란 이설이 연화에게 달려가려던 순간이었다. 목 뒤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을 깨닫고 발을 떼지도 못했다.

“…누구냐.”

거리는 한 발짝. 누군가 이설의 한 발짝 뒤에서 검을 겨누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인데,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짧은 순간 할 말을 잃은 이설이 뒤를 돌려고 몸을 움직이자 검 끝이 목에 더 바짝 다가왔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살이 베일 것이다.

“누구냐 물었다.”

“…저, 저는……,”

“대답하라.”

양손으로 옷자락을 꽉 잡은 이설이 눈을 질근 감았다 떴다. 긴 숨을 뱉고 나서야 간신히 평정심을 찾고 차분히 말한다.

“저는 비은궁의 루 소의, 연이설이라 하옵니다. 부디 검을 거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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