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1화
“알아보라 한 것은 알아보았느냐?”
“예. 아무래도 안창성 성주의 아들 하무석인 것 같습니다. 지방 관리 시험에 세 번을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재 주안 기방에서 지내고 있다 합니다. 견갑승과는 사제 동문인 줄로 압니다.”
“더 특별한 건?”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기방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특별히 만나는 자도 없다 합니다. 견갑승과도 접촉이 없습니다.”
어제 늦은 오후 이설을 만난 뒤로 차란에게 급히 하무석에 대해 알아 오라 은밀히 명했다. 황궁에 출입하는 이름이 아니었고 황제의 귀에 익은 이름도 아니었다. 모두들 납작 엎드려 황제의 동태를 살피는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연유를 알아야 했다.
안창성이라면 무역 관세로 거두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해 자금이 탄탄한 지역이다. 게다가 자기들끼리만 쉬쉬해 감춘다면 바다 건너 해국에서 무엇이든 수입해 올 수 있는 인맥이 있었다. 손조익의 세력이 어디까지 확장되어 있는지 모르는 지금은 지방성 성주의 아들 따위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아직 사람을 붙여 두었으니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말씀 올리겠다 말하는 차란에게 황제는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급히 부른 이유가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는지 이만 차란에게 물러나란 말은 없었다. 까닭 없이 차란이 제 옆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황제가 갑자기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차란을 더 가까이 불렀다.
“더 가까이 와 보거라.”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소신은 겁이 나 가까이 가지 못하겠습니다.”
이미 황제가 앉은 제좌의 단상까지 올라왔건만 더 가까이 오라 손짓하는 황제에게 차란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발은 자리에 있지만 상체는 뒤로 한껏 물러나 있어 누가 봐도 경계심이 한가득이다. 결국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차란의 의복 앞섬을 움켜잡아 제 쪽으로 거칠게 잡아당겼다. 부지불식간에 끌려온 차란이 놀라기도 전에 황제는 차란을 뒤로 돌려세워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 급하게 묶었던 머리끈이 또 풀리고 머리카락은 아래로 쏟아졌다.
“……신 비차란. 황은을 입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만.”
“역겨운 소리 집어치우거라.”
차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훑어 내린 황제는 볼일이 끝났는지 다시 차란의 등을 떠밀었다. 황제가 헤집어 놓은 앞섬을 다시 잘 여미며 차란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으나 황제에게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손이 심심하시거든 후궁전을 납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폐하. 이깟 사내놈에게 무슨 황은을 내리시겠다고…….”
“입 닥쳐라. 역겨운 소리 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드물게 인상을 제대로 구긴 황제가 차란의 머리카락을 만졌던 손을 소매에 털며 말했다. 생각만큼 좋지 않았던 촉감은 물론, 차란의 것이었다는 점에 더 불쾌해진 황제는 제 행동을 후회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못지않게 표정이 좋지 않은 차란이 허리끈을 세게 묶으며 말했다.
“그냥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요즘 폐하께서 후궁전 발길을 뚝 끊으시어 경사방(敬事房) 환관들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합니다.”
“내 지금 누구 때문에 비은궁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
“설마하니 이렇게 자주 찾아뵙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 비은궁을 자주 찾아가고 있다. 이설과 함께 수라를 들거나 차를 마시는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빈도수가 많긴 했다. 그와 반대로 다른 후궁전이나 액정궁에는 그림자조차 내비치질 않으니 다들 안달이 나긴 하였을 거라 생각한다.
며칠 전에는 머리를 식힐 겸 걷다 어느 후궁 하나를 우연히 마주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들이지 않은 곳이 없는 걸 보니 황제 측 궁인 하나를 꼬여내 황제의 동선을 미리 알아낸 게 틀림없었다. 옆에 있던 차란의 눈짓에 다음 날 윤 내관이 궁인들을 쥐 잡듯이 잡아 불경한 짓을 저지른 궁인 둘을 궐 밖으로 쫓아냈다.
언뜻 황제의 총애를 가져간 듯 보이는 이설이지만 사실 아직까지 궁에는 이렇다 할 큰 소문은 없었다. 황제는 정은 없지만 후궁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이다. 초야에 소박을 맞히긴 했어도 제 이름을 새긴 정인이며 후궁이었으니 좀 늦긴 했지만 이 정도 관심은 당연하다 생각하는 듯했다. 게다가 황제는 항상 해가 지기 전 비은궁을 떠났다. 총애를 받는다 입에 오르내리기에는 이설의 밤은 항상 독수공방이었다. 황궁을 휘저을 만큼의 소문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참을성 없는 후궁 몇몇은 애가 닳긴 할 것이다. 찾아간 지 오래되었으니 기다리다 못해 직접 황제를 만나러 나온 것이다. 노력은 가상하나 황제는 이제 그 후궁에게 발길을 끊을 셈이다.
“염려했던 것보다 루 소의 마마께서 폐하께 잘 적응을 하신 모양입니다.”
이 말에는 황제도 수긍을 하는 바였다. 이설은 황제의 눈치를 많이 보는 만큼 적응이 빨랐다. 함께 수라를 들던 첫날, 시끄럽다는 일갈 이후로 이설은 더 이상 황제에게 어떠한 말을 걸지도 않았다.
말을 걸지 않는 것은 물론 걷거나 움직이는 데에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서, 시야에 없으면 아예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원래 그렇게 조용한 것인지, 아니면 황제 옆에서 몸을 사려 그렇게 구는 것인지 사실 황제는 이러나저러나 마음에 안 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제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어쩌다 눈만 마주쳐도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아무리 봐도 곱게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비은궁에도 말입니다.”
“…….”
“다 쓰러져가는 그 폐궁을 그리 아름답게 가꾸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차란을 쳐다봤던 황제가 이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이설에게 유일하게 높이 쳐주는 것 한 가지는 무거운 입이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조경 솜씨였다. 햇빛을 가리는 음습한 나뭇가지는 모두 걷어 내고 잡초를 뽑고 풀을 다듬은 것뿐이라 생각했는데도 느껴지는 경치는 완전히 달랐다. 한낮 아무리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어도 비은궁 안으로 들어서면 꽃과 나무의 향이 베인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몸에 닿는 공기 자체가 늘 청량하고 맑았다. 이끼 낀 연못도 전보다 훨씬 보기 좋아져 앞뜰 경치에 한 몫 단단히 거들었다.
자연경관에 특별한 감상은 없는 황제지만 비은궁의 시원한 바람은 제법 좋아했다.
“……바느질도 가당찮은 손으로 별 쓸데없는 재주는 좋은가 보군.”
황제의 혼잣말을 얼핏 들은 차란이 재차 물었으나 황제는 무시했다.
“하온데 폐하, 소신을 이리 급하게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기다리다 못한 차란이 황제에게 물었다. 사실 나덕산 사찰을 나갔다가 산에서 발을 잘못 디뎌 몸을 구르고 상투관까지 깨져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황궁으로 복귀하던 길에 황제의 부름을 받았던 차란이다. 온몸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 얼른 궁의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물을 것이 있어 불렀다.”
“하문하시옵소서.”
“선황께서 혜서 황후에게 하사한 금파 가락지를 기억하느냐?”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차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합니다.
“그 가락지는 지금 누구 손에 있느냐?”
생각지도 못한 걸 질문받은 차란이 미간을 좁히며 허공에 시선을 댔다. 근래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니 갑자기 떠오를 리가 없었다. 제 물건도 아니며 남의 귀한 물건도 아닌 것의 행방을 당장 대답할 수가 없다. 오랫동안 고민해 봐도 생각이 나지 않자 먼저 포기한 건 황제다.
“기억나지 않으면 됐다.”
“갑자기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비슷한 것을 보았다.”
“금파 가락지는 흔한 것입니다. 똑같이 생긴 것들이 세상천지에 널렸습니다.”
“구분할 수 있으니 물은 것 아니겠느냐.”
황제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금파 가락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차란의 말대로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금파 가락지지만 황제는 분명 구분할 수 있었다. 꽃잎을 다 피우지 못한 꽃봉오리가 갇혀 있는 금파 가락지는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선황이 연심의 증좌로 혜서 황후에게 하사한 것이다. 황후에게 하사하기 전 선황이 저에게 몇 번이나 보여 줘서 기억하고 있다. 분명 이제 막 벌어지는 꽃잎을 머금은 금파 가락지였다.
“기억 못 한다면 됐다.”
“황후 마마의 물건들은 대부분 소봉궁(小鳳穹)으로 보내졌거나 사가의 손조익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개인에게 따로 전해진 건 소신도 잘 알지 못합니다.”
황제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개중에는 선황이 유품으로 챙겨간 것도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선황의 생전 유언대로 함께 땅에 묻혔다. 그것 외에 대부분은 소봉궁으로 보내졌거나, 혜서 황후의 친정인 손조익에게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이상한 것이다.
왜 그 물건을 연이설 그자가 가지고 있는 거지.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다 끼고도 모자라 팔찌와 귀걸이를 넘치게 하고 다니는 여인들이 태반인 황궁이다. 그렇다 보니 그 흔한 옥가락지 하나 끼지 않은 이설의 하얀 손가락에 매번 눈이 가기는 했다.
입고 있는 의복이며 궁의 세간살이며, 심지어 먹는 반찬까지도 하나같이 변변찮은 것들이라 올 때마다 혀를 찼건만 비은궁으로 할당되는 황궁 재산의 몫을 더 늘려 줄 생각은 없었다. 이설에게는 이미 충분한 패물을 하사했고, 비은궁으로 들어가는 지급품들도 모자라지 않게 준비하라 일러두었다. 비은궁 살림이 궁핍한 것은 황제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다만 비은궁 측에서 먼저 요청한다면 불허할 생각 또한 없었다.
어쨌든 항상 소박하다 못해 볼품없어 보이기까지 한 그 손가락에 큼지막한 가락지 하나가 끼워져 있으니 눈에 띄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혜서 황후의 금파 가락지가 생각난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봤다 생각은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기억인지는 되살리지 못했고 태금궁으로 돌아와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혜서 황후의 금파 가락지가 생각났다. 곧바로 깨달았다면 이설에게 직접 물었을 텐데.
비슷한 것을 잘못 본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수년 전 황제가 봤던 그 금파 가락지가 확실하다. 문제는 왜 그걸 이설 그자가 가지고 있느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손조익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았던 이설을 떠올려 봐도 그것 말고는 이설이 그 가락지를 손에 넣을 방법이 없다. 이미 이설이 손조익과 손을 잡고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설에게 찾아가지 않았던 시간 동안 손조익이 먼저 이설과 접촉했을 가능성은 높다. 그동안 황제는 비은궁에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고, 그건 황궁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설마 자신이 한 발짝 늦은 걸까.
“비차란.”
“예.”
“만약 연이설 그자가 손조익과 이미 손을…….”
“폐하, 태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실까요?”
의정전 안 사정을 모르는 윤 내관이 황제의 말을 끊고 기별하였다. 하려던 말을 끝내지 못한 황제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들라 하라.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지.”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찾아오지 않는 태감이 의정전까지 왔으니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 안으로 들어서는 태감을 흘끔 본 차란이 물러나겠다 고하고 뒤돌았다. 태감이 안으로 들어오고 스쳐 지나가며 서로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 황제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리석은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