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8화
영 이상한 논리인데, 화홍의 말대로 금국인이니 저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다. 궁금한 것이 가셨으니 이제 서책을 보려는데 젖은 손을 대충 닦은 화홍이 옆에 가까이 붙어 앉았다.
“그런데 마마,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물어보거라.”
그럴 아이가 아닌데 우물쭈물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화홍에게 이설이 한 번 더 말했다.
괜찮으니 물어보아도 좋다.
“연국의 왕족분들은 말입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데도 목소리를 낮추는 화홍을 보며 이설은 다음 말을 충분히 예상했다. 이설이 가볍게 미소 짓는 것과 동시에 화홍이 물었다.
“모두 달에서 온 항아 님의 후손이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더구나.”
“그럼 마마께서도 항아 님의 후손이신 거네요?”
“전설이 사실이라면 그러하겠지.”
이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대답할 줄 알았던 모양인지 화홍은 예상치 못한 이설의 대답에 퍽이나 놀란 눈치였다. 이설은 펼쳤던 서책을 덮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래도 명색이 사냥을 나가시는 것이니 머리는 단단히 고정해야 한다는 말에 머리를 모두 하나로 묶어 높이 상투관을 끼었기 때문인데도, 손동작은 버릇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마마의 머리카락도 이리 은빛으로 고우신 겁니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구나. 헌데 연국의 왕족은 다 이러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
“어쩐지, 저는 마마를 처음 봤을 때 정말 하늘에서 선녀님이 내려오신 줄 알았습니다.”
“선녀……?”
“예, 너무 아름다우셔서 깜짝 놀랐는걸요.”
생전에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어봤던 적이 없던 이설이 난데없는 칭찬에 부끄러워 콧잔등을 긁으며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 걸 보니 열이라도 오르는 모양이다. 속도 모르고 화홍은 그 옆에서 이설의 칭찬을 늘어놓으며 신이 났다. 듣다 못한 이설이 화홍을 불러 그만하라 말하자 화홍은 입술만 삐죽이다 고집처럼 한마디 더한다.
“아무튼 마마께서는 다른 후궁 마마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분이시니 주눅 드실 거 하나 없습니다. 특히 양 소원 마마께는 더더욱 말입니다.”
안 듣고 있는 척해도 역시 조금 전 양 소원이 하던 얘기를 들은 게 분명하다. 괜히 안쓰럽게 자신을 보는 화홍에게 이설이 밝게 웃으며 알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온데 마마. 마마께서 달에서 온 선녀님의 후손이시라면 언젠가 다시 달로 되돌아가시는 날도 오겠네요?”
서책을 옆으로 밀어 치우던 이설이 손을 멈칫했다. 초점이 허공에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며 화홍에게 향한다. 조금 전 화홍이 그랬던 것처럼 이설도 화홍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말을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건 네게만 말해 주는 것이다, 화홍아.”
“예.”
“연국의 왕족은 모두 언젠가 달의 뒤편으로 되돌아간단다.”
“그게 언제입니까?”
이설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대답한다. 입가에 진 미소가 바스러질 듯 희미했다.
“우리가 죽었을 때란다.”
화들짝 놀란 화홍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송구합니다, 마마! 하고 소리쳤다. 이설이 웃으며 무엇이 송구하냐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달래도 화홍은 한참을 울상인 얼굴로 자신이 괜한 걸 물었다 스스로 질타했다. 이설은 그저 농이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화홍은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주변을 돌아보고 기연이 돌아왔다. 이설에게 괜한 것을 물었다고 시무룩해 있던 화홍은 기연이 오자 화색이 도는 얼굴로 이것저것 시비를 거느라 정신이 없다. 기연은 무시로 일관하다 도를 지나쳤는지 참지 않고 대꾸해 주느라 바빴다. 이설에게 들릴까 멀리서 서로 투닥거리는 둘을 보며 이설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사이가 안 좋아도 일단 서로 얼굴 보고 부딪히는 일이 있어야 좋은 기회라도 오는 법인데, 황제와는 얼굴 볼 기회마저 없으니 저렇게 투닥거리며 부딪힐 일도 없다. 양 소원의 말대로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일인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욕심을 내는 스스로가 버겁다.
가만히 서책도 보지 않고 앉아 있으니 자꾸만 눈꺼풀이 감긴다.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은 많으니 잠시 눈을 붙여도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 무렵 어느 순간 의식이 사라졌다.
*
이설이 다시 눈을 뜬 건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눈을 뜨니 화홍이 옹달샘 물 한가운데 처박혀 앉아 있었다. 보나 마나 기연에게 몸으로 덤비다 힘에 밀린 것이겠지. 놀라 벌떡 일어났던 이설은 기지개만 켜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서책을 보기라도 하는 이설과 달리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는 기연에게 활과 전동을 넘겨주었다. 괜찮다 몇 번이나 사양하던 기연은 이설에게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올 테니 자리를 떠나지 말라 몇 번이나 주의를 주고서야 사냥에 나섰다. 그 뒤를 화홍이 쫄래쫄래 따라갔다.
혼자 있게 된 이설이라고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지고 온 서책이 많으니 이것만 봐도 해지기 전까지 시간을 때울 수 있다. 차라리 기연이 사냥하는 것을 구경 갈까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 혼자 서책을 읽는 게 좋았다.
한 권, 두 권, 세 권을 다 보았을 때도 여전히 해는 중천에 있는 듯했다. 사실 머리 위로 나무가 너무 울창하여 해의 위치를 가늠하지 못해 시간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만에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이설이 샘물에 얼굴을 씻으러 다가가려 할 때였다. 바스락 소리가 작게 났다.
“……기연아 돌아왔느냐?”
사람 발소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물가에 멈춰 서서 주위에 신경을 집중하니 다시 바스락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보아하니 큰 짐승은 아닐 거라 여긴 이설이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설의 발걸음 소리에 수풀에 쌓여 보이지 않던 뭔가가 놀라 앞으로 번쩍 튀어나왔다.
“…토끼였구나.”
성인 사내 손바닥보다 조금 크려나. 아무튼 새끼라는 것은 확실해 보이는 작고 하얀 토끼다. 이설이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토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렴. 해치지 않을게. 알아들을 리 없는 토끼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다 다시 수풀 속으로 들어간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그렇게 보내 줬을 텐데, 뒤돌아 도망치는 토끼의 뒷발에 붉게 묻은 핏자국과 절뚝거리는 걸음을 본 이설이 놀라 그 뒤를 쫓았다. 이설이 제 뒤를 쫓는 걸 알자 토끼도 있는 힘을 다해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아니야, 해치려는 게 아니야! 이리 와!”
다리를 다친 새끼 토끼의 걸음은 느렸지만 그만큼 이설도 빠르지는 못했다. 토끼가 사람 다니는 길을 구분해서 도망가는 게 아니니, 수풀을 헤쳐 가며 달리는 이설이 뒤처지는 게 당연했다. 오직 토끼의 하얀 엉덩이만을 보고 달리던 이설은 걸음을 방해하는 낮은 나무들이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겨우 허리를 폈다.
“어디에 있니? 이리 와, 아프지 않게 해 줄게.”
주위를 두른 풀밭 어딘가에 숨어있을 토끼에게 말을 걸며 이설이 주변을 맴돌았다. 군데군데 풀밭에 피가 묻어 있는 걸 보니 아직 피를 흘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설에게 도망치느라 상처가 더 덧났을지도 모른다. 아마 누군가의 화살에 빗맞아 그리된 거라 여기며 안타까운 마음에 계속 수풀을 뒤졌다.
다른 곳으로 이미 사라졌나 싶어 그만 돌아갈까 싶다가도 절뚝거리며 도망치던 뒷모습이 생생해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찾아보고 돌아가겠다 생각하며 마른 나뭇가지 더미를 들친 순간, 작고 하얀 생명체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걸 발견했다. 더 도망가고 싶어도 그럴 기운이 없는 듯 토끼는 이설을 보고도 몸만 더 바들바들 떨며 앞발을 밀 뿐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설이 얼른 들어 품에 안으니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낸다.
“이런…, 화살에 빗맞았구나. 누가 이렇게 어린 새끼에게 화살을 쏘았을까. 참 너무도 하지, 그치?”
대답하지도 않을 어린 짐승에게 말을 걸며 이설은 토끼 다리에 난 상처를 들여다봤다. 다행히 화살이 박힌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간 것이라 며칠 치료하면 깨끗이 나을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버둥거리며 달아나려던 토끼도 이설에게 안긴 것이 편한지 이내 몸을 축 늘어뜨려 편히 안겼다. 궁으로 데려가 제대로 치료해야겠다 생각하며 이설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길을 다니는 데에 꽤나 익숙한 편이라 자신했는데, 역시 처음 와 본 산에서는 그게 무리였을까. 토끼에 한눈이 팔렸어도 지나치는 나무들을 기억하였으나 다시 보니 그 나무가 그 나무 같고, 지형도 다 비슷해 보인다.
왔던 곳을 맴돌아 보기도 하고 걷던 길이 아닌 듯하여 다시 되돌아와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 보기를 한참. 금세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이제 좀 불안해진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해가 질 때를 가늠하지 못하겠으니 바삐 움직여야 한다.
조금 전 지나쳤다 생각한 나무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람 발소리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옆으로 몸을 숨기려는데 바로 뒤에서 풀 밟는 소리가 멈췄다.
“그쪽은 절벽이다.”
“…….”
“그래도 계속 가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품에 토끼를 감싸 안은 채로 굳은 이설이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떠올랐던 그 얼굴이 늘 보던 그 표정으로 이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하……!”
황제를 부르는 것도 아닌 그저 감탄사 같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이설이 뒷걸음질을 치다 말고 갑자기 자리에 무릎 꿇었다. 부복하려다 가슴에 안은 토끼 때문에 간신히 허리만 숙였다.
“폐하께서 사냥하고 계신 곳인 줄 몰랐습니다. 송구합니다.”
“…….”
“…….”
“품 안에 든 것은 무엇이냐.”
고개가 바닥을 향해 있는 탓에 황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몰랐다. 이설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눈에 띄었나 보다.
“토끼입니다.”
“주제에 사냥을 했긴 했나 보군.”
“…제가 사냥을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쏜 화살에 맞아…….”
“됐다. 물은 것이 아니니 답하지 말라.”
황제는 늘 이설과 길게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걸 아는 이설도 짧은 대답만 하려고 애쓰는데 매번 그게 잘되지 않는다. 이상하게 황제 앞에만 서면 침착함에서 멀어지고 허둥지둥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 속이 상한다. 황제는 이설의 듣기 싫은 대답이 조금만 길게 이어져도 가차 없이 말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