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9화
“말과 활을 어디에 두었느냐?”
“저쪽 샘이 있는 곳에 묶어 두었습니다.”
“이 근처에는 샘이 없다.”
토끼를 쫓느라 좀 뛰긴 했지만 그리 멀리 나오진 않았다 생각했다. 다시 돌아가는 길을 헤매느라 더 멀어진 것인지, 근처에는 샘이 없다 딱 잘라 말하는 황제의 말에 이설이 더 불안해졌다. 먼저 돌아온 기연과 화홍이 자신을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대는 이곳에서 혼자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다친 토끼를 쫓아 나왔다가 헤매고 있었을 뿐입니다.”
“은밀히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예……?”
황제가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말을 하자 이설이 고개를 들어 황제에게 되물었다. 말 위에 앉아 있는 황제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이설은 목이 거의 꺾일 때까지 고개를 들어야 했다. 흑마 위에 앉은 황제 앞에는 피투성이의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축 늘어져 말 위에 걸려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설은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얼른 고개를 내렸다.
“이곳에서 누군가를 은밀히 만나려던 게 아닌지 물었다.”
어렴풋이 황제가 의심하는 것을 눈치챈 이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첩, 그 누구와도 은밀히 내통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하신 약조를 아직 기억하며 폐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자신이 황후가 될 욕심에 황제의 반목 세력 중 누군가와 내통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말을 이설은 완강히 부인했다. 말이 없는 황제가 제 말을 정말 믿었을지는 모르겠다. 황제의 말이 우는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한참 동안 요란했다.
죽은 사슴의 사체에서 나는 피비린내가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달에서 내려온 선녀의 후예라지?”
“…….”
“정확히는 달의 뒤편에서 도망을 친 선녀라더군.”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제 시조의 얘기를 난데없이 꺼내는 황제에게 별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있다 한들 해서도 안 된다. 황제는 어떤 대답이 듣고 싶어 저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니라는 걸 이설은 이제 잘 알고 있다.
“그대가 요사스러운 것은 그 때문이겠지.”
황제는 그저 자신이 밉고, 그래서 상처 주고 싶은 것뿐이다.
“탓하지는 않겠으나 앞으로 짐의 눈에 띄지 말라. 그대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
“그대가 찾는 샘은 저기 썩은 고목을 지나 한참을 걸으면 나올 것이다. 곧 해가 질 테니 서둘러라. 그대 하나를 찾기 위해 금군의 병력을 낭비하진 않을 것이니.”
멀거니 땅 위만 바라보는 이설의 시야에 흑마의 늘씬한 다리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황제가 다시 이설을 남겨 두고 홀로 멀어지려 하고 있다. 별거 아닌 말이었는데, 괜히 마음이 서글퍼지는구나 싶더니 눈앞이 뿌옇게 번진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있다가 무릎 위로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지자 그제야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황제는 왜 자신을 미워하는 것일까. 밤잠을 설치며 고민해 봐도 아무런 잘못을 한 것 같지 않은데. 무르고 답답한 성격인 탓일까, 얼굴이 못난 탓일까, 아니면 황제의 정인의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내이기 때문일까. 사실 생각해 보자면 이유들이 너무 많아 비참하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가 일러 준 방향으로 되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아직 품 안에 토끼가 괜찮은지 확인을 하고 일어서려던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맹렬히 들리며 이설의 머리 위로 무엇인가 빠르게 지나갔다. 놀란 이설이 뒤를 확인하기 전, 멀어지던 황제가 다시 말 머리를 이설에게로 돌렸다.
“……움직이지 말라.”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설이 다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품에 안은 토끼를 더 단단히 감싸 안으며 허리를 숙이자 황제가 갑자기 칼을 빼 들었다. 주위를 경계하는 듯 이설이 앉아 있는 곳을 중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둘러보더니 이설의 앞에 멈춰 섰다. 이설이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설이 순간 황제의 말 앞으로 달려들었다.
“폐하!”
놀란 말이 이설을 피하며 자리를 옮기는 찰나, 황제의 뒤에서 다시 무언가 빠르게 날아왔다. 이번에는 두 사람 사이를 그냥 지나지 않고 무언가를 스쳐 지나갔다. 속도가 떨어진 그것이 이설의 뒤 나무 기둥에 박혔다. 뒤를 돌아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 이설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황제에게 손을 뻗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제의 팔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분명 화살이었다.
*
황제는 사냥을 즐기긴 했으나 사냥 대회를 좋아하진 않았다. 사냥 중이라는 걸 공표라도 하듯 수십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사슴 한 마리를 잡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이 황제의 사냥에는 무척 방해거리였다. 황제는 동이 다 트기 전 소수의 금군들과 새벽 사냥을 하는 것을 좋아할 뿐 사냥 대회의 우승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이신데 우승 정도는 폐하께서 가져가셔야 체면이 살지 않겠냐고 입을 놀리는 차란만 아니었다면 숲 어딘가 쉴 만한 곳에서 시간이나 때우다 해가 질 때쯤 하산했을 것이다. 그러다 작년처럼 운이 좋으면 하산하는 길에 늑대 같은 짐승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냥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황제를 따라다니는 금군은 몸이 근질거려 죽을 맛인 듯했다. 모두 흩어지라 이르는 말에 다들 망설이다가도 황제가 두 번째 명령했을 때는 불복하지 않고 각자 사냥감을 찾아 흩어졌다. 황제는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을 호위하는 제1정 금위대원들은 물론 흑영까지 모두 내치고 홀로 산속을 다녔다. 잠시 말에게 물을 주러 찾았던 물가에서 사슴을 만나 단칼에 목을 뚫어 죽인 것 말고는 달리 사냥에 흥미가 없는 듯 정처 없이 숲길만 걸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쉬어가려 말을 멈춘 순간, 황제는 문득 낮에 봤던 이설이 떠올랐다. 기억했던 것보다 더 가냘파진 몸으로 사냥에 나서겠다는 건지 등에 멘 전동이 우스워 슬쩍 비웃어 주었다. 게다가 생전 말을 처음 타 보는 사람처럼 자세는 또 얼마나 엉성하던지.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그렇게 눈길이 가니 그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저를 불러도 부르는지 몰라 눈만 말똥말똥 깜빡이는 그 천치 같은 성품으로 황궁 생활은 어찌 버티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서고와 탄영당에 가는 것이 아니면 비은궁 밖으로는 나오지도 않는다는 걸 보니 정말 숨만 쉬고 목숨만 보전할 생각인가 보다.
황제는 분명 저가 그리하라고 일렀다는 걸 알면서도 이설의 그런 미련함에 혀를 찼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자신이 숨통을 조이지 않아도 후궁들 눈치에 못 이겨 단명할 것이 뻔하다. 화려함도, 강단도 없는 사내 후궁이 황궁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지, 참 알 만도 하다 싶다.
이용하려 데려왔는데 딱히 쓸모도 없으면서 자꾸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이 매우 언짢다. 물건이었으면 버리기라도 할 텐데,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날, 녹염각의 금잔화 화전에서 봤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분명 이설은 달빛 아래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홀로 달빛을 받는 사람처럼, 혹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사람처럼 주변의 어두운 모든 것을 삼키고 혼자서만 찬란했다. 그 모습이 신비로운 동시에 요사스럽게 느껴졌다.
모두가 봤어도 이상할 광경을 혼자만 봤으니 황제도 그게 답답할 노릇이다.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늦은 달밤에 다시 이설을 찾아가 볼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설령 이설이 진짜 그런 요사스러운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이설은 여전히 이설이고, 황제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아무 이유 없이 탐탁지 않았다.
새벽 사냥을 하러 자주 오는 나덕산의 지형은 훤히 알고 있는 황제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세 번이나 우연히 마주친 양 소원을 피해 더 깊은 산세로 말 머리를 돌렸다. 황제는 자신의 후궁들 중 가장 기개가 높은 양 소원을 그나마 적당한 후궁으로 대우를 해 주고 있는데, 요즘 그 도를 넘어섰는지 마치 자신이 황후라도 된 듯 구는 행동이 마음에 안 들던 참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우장군은 동부 지방의 성주들의 신임을 얻은 유능한 자이다. 그런 자의 딸이니만큼 함부로 내칠 수 없다는 게 심기 불편했다.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와서야 숲의 고요함을 제대로 느끼며 황제는 말이 방향을 정하게끔 고삐를 느슨히 풀었다. 터덜터덜 앞으로 걷던 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뒷걸음질을 쳤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급하게 고삐를 잡아 쥐고 앞을 보자 수풀 너머에 무언가가 있있었다. 움직이는 소리가 작은 짐승은 아닌 것 같아 활을 들고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여차하면 손을 놓을 기세로 신중히 앞을 응시하던 황제가 이내 허무하게 활을 거뒀다.
“이상하네……. 분명 이 나무가 맞았던 것 같은데.”
그것은 사람이었다. 도대체 다른 옷은 없는 것인지 늘 똑같은 회백색의 옷을 입고 이 길 저 길을 헤매고 있는 이설이었다. 품에는 무엇을 든 건지, 팔이 고정되어 있었고 옆에 말은커녕 활과 전등도 없는 맨몸인 채였다.
길을 알고 가는 게 아니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향하는 방향은 절벽이다. 그리 높지는 않으나 저 몸으로 떨어졌다간 성한 곳 하나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그 방향으로 갈 것이다. 알 바 아니니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가려던 황제가 다시 말 머리를 돌려 이설에게 향했다.
“그쪽은 절벽이다.”
“…….”
“그래도 계속 가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인기척에 놀란 것인지 자신이 황제인 것에 놀란 것인지 이설은 화들짝 놀라 뻣뻣하게 몸을 돌렸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기억했던 것보다 몸이 더 마른 듯했다. 머리카락을 깔끔히 묶고 완전히 드러낸 얼굴은 살도 없고 생기도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