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30화
품 안에 안고 있는 것은 토끼였다. 사냥을 했나 싶었는데 꼭 끌어안고 있는 팔이며, 어리숙한 표정이며, 딱 봐도 사냥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 대답을 듣지 않고 납득했다. 게다가 활도 없는 몸이다. 멀쩡한 토끼가 잡혀 줄 만큼 사냥이 능숙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은근슬쩍 떠보는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한 것은 마음에 들었으나 딱 거기까지다. 그 뒤에 한 말에는 버티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황궁 생활을 버티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면 손조익의 방패막이로 쓸 생각이었는데 그게 뜻대로 될지 잘 모르겠다. 고개를 푹 숙이고 죄지은 사람 마냥 굳어 있는 것에 눈길이 가긴 했지만 황제가 위로해 줄 바는 아니었다.
해가 질 때가 되었다. 이제 슬슬 하산하려 돌아선 일순 바람을 가르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말을 돌려 뒤를 돌고 주변을 경계했다.
“……움직이지 말라.”
이설의 머리 위를 지나 땅으로 처박힌 건 화살이었다. 정황상 이설을 노리는 것 같았으나 아직 확실치 않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칼을 빼 들고 이설의 주위를 살폈지만 매복한 이는 없었다. 화살이 날아온 각도를 보았을 때 멀리서 활을 쏜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근처에 있다.
주위가 잠잠해진 듯하자 이설이 고개를 들어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설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데 갑자기 그가 큰소리를 내며 황제의 말 앞으로 뛰어들었다. 놀란 말이 이설을 피하려 옆으로 움직였고,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황제의 팔을 스쳐 지나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손을 뻗어 달려온 이설이 황제의 발아래에 서서 급히 물었다. 황제가 자세를 낮추며 화살이 스쳐 지나간 자리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릿한 통증이 곧바로 느껴지는 걸 보니 살갗이 찢어진 듯했지만 큰 상처는 아니다. 다만 화살이 독시(毒矢:촉에 독을 묻힌 화살)였다면 곤란하다.
상대는 이설을 노리고 있으나 그 과정에 자신이 해를 입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이설의 목을 노릴 수 있는 잠깐의 틈만 생겨도 화살은 다시 날아올 것이다.
“저를 노리는 자입니다! 제가 미끼가 될 테니 그동안 폐하께서는 어서 산 아래로 피하십시오!”
“…….”
“폐하! 어서 가세요!”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이설이 곧 상대의 의도를 알아채고 황제에게 도망치라 소리쳤다. 이설이 안간힘을 다해 말을 밀었지만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는 한낱 짐승은 그저 귀찮다는 듯 머리로 이설의 몸을 밀어냈다. 바닥에 이설이 풀썩 쓰러지자 다시 한번 화살이 날아와 말의 발 옆에 박힌다. 그제야 황제의 흑마가 반응을 보이며 머리를 들었다.
“어서 도망가세요! 폐하를 쫓지는 않을 것입니다.”
“…….”
“폐하, 어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 상처 부분을 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황제는 다급히 소리치는 이설을 바라봤다. 겁에 질린 표정이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니다. 감싸 쥔 손을 타고 피가 아래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자 이설은 그게 제 상처이기라도 한 듯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조용히 상황을 헤아리던 황제가 갑자기 제 앞에 늘어져 있던 사슴 사체를 바닥으로 밀어 던져 버렸다. 제 옆으로 떨어진 사슴 사체를 보고 놀란 이설이 몸을 움찔하자, 황제가 말 위에서 손을 내민다.
“올라타거라.”
“…….”
“뭘 쳐다만 보고 있느냐? 어서 올라타지 않고.”
황제의 손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설이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랬다간 저희 둘 모두를 쫓을 것입니다. 폐하 혼자 가셔야 합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올라타거라. 황명이다.”
화살이 언제 더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일로 옥신각신할 이유가 없다. 상대는 혼자인 것 같고 마구잡이로 화살을 쏘아 대지 않는 걸로 보아 화살의 개수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절호의 기회가 온다면 망설임 없이 이설의 목을 노릴 것이다.
황제가 아래로 내민 손을 다시 이설에게 뻗어 사납게 말했지만 이설이 계속해서 우물쭈물하며 황제의 손을 선뜻 잡지 못했다. 답답함에 짜증이 솟구치려는 찰나, 한참 전 이설이 말 위에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한눈에 봐도 기마가 처음인 자였다. 혼자서 등자를 밟고 말 위에 올라서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폐하, 제발 혼자 도망을……, 폐하!”
이설에게 내민 손을 거둔 황제가 망설임 없이 말 아래로 뛰어내렸다. 재빨리 주위를 경계하고는 이설의 어깨를 잡아 말 가까이에 붙였다. 가냘픈 몸이라 늘 생각은 했으나 한 손에 잡히는 팔뚝도, 쉽게 끌려오는 몸도, 모두 놀랐다.
“뭘 하고 있느냐? 내가 바닥에 엎드려 등이라도 대 주길 기다리는 것이냐?”
사나워진 황제의 목소리에 이설도 급박함을 느꼈는지 이내 등자에 발을 걸었다. 바닥을 박차고도 마상에 올라서지 못하는 이설의 발을 손으로 받쳐 주고 엉덩이를 밀어 올렸다. 마음이 급했던 탓인지 생각보다 금방 올라탄 이설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황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폐하, 어서 제 손을 잡으세요!”
누가 도움을 주지 않아도 쉽게 말 위에 오를 수 있는 황제지만 긴박한 상황에 재고 따질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이설의 손을 잡고 말 위에 올랐다. 우습게도, 붙잡은 손이 매우 작고 보드랍다는 생각이 든 것과 동시에 조금 전 상처 입은 팔의 위쪽 어깨에 살이 찢어지는 듯한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폐하! 팔에 화살이……!”
이설이 뒤를 돌며 크게 외치고 나서야 알았다. 어깨 뒤로 화살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통증으로 봐서는 어깨를 거의 뚫고 나오기 직전까지 꽂힌 것 같다. 화살촉에 독이 묻어 있다면 당장 뽑아 버리는 게 낫겠지만 자칫 잘못 뽑았다간 출혈이 심해 움직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색이 되어 제 어깨를 쳐다보는 이설을 보니 여기서 뽑을 게 아닌 것 같아 놔두었다.
뒤를 확인한 황제가 말의 옆구리로 발로 세게 차며 고삐를 꽉 쥐었다. 주인의 뜻을 알아들은 흑마가 금세 속력을 내며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자세를 낮춰 내게 바짝 붙어라. 네가 시야에 보이면 다시 활을 쏠 것이다.”
이설은 황제의 말대로 자세를 바짝 낮추기는 했으나 말이 거칠게 달리며 몸이 계속 흔들리는 탓에 황제의 품에 숨어 몸을 가리지는 못했다. 이설이 휘청한 순간 뒤에서 또다시 날아온 화살이 이설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놀라 뒤를 돌아본 이설의 얼굴이 완전히 겁에 질렸다. 빌어먹을. 그냥 무시하면 그만인데 그러지를 못했다. 황제는 통증이 퍼지기 시작한 어깨의 고통을 참으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이설의 허리를 제 쪽으로 꽉 끌어안았다. 가슴과 배에 완전히 밀착된 이설의 몸이 덜덜 떨리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네 뒤에 있는 것은 나뿐이다. 겁먹지 말고 앞만 보아라.”
힘주어 당긴 몸을 단단히 고정하며 황제는 뒤를 살폈다.
한 명일 거라 생각했는데 뒤를 쫓아오는 말발굽 소리가 하나 이상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마구잡이로 화살을 쏘지 않는 것일까. 이미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걸 보면 황제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는 자들이다. 이설만 죽일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을 것처럼 굴었으나 막상 공격은 소극적으로 하고 있다. 이설을 사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이 추격은 무엇을 위한 거지.
얼마나 오랫동안 숲길을 달렸는지 모르겠다. 우려했던 대로 화살촉에 독을 바른 것이 맞았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사지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이제 곧 해가 진다. 해가 지고도 황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수색대가 산을 오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들도 함부로 자신과 이설을 쫓지 못할 테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버텨야 한다.
하지만 해가 진 나덕산은 자신과 이설에게도 위험한 곳이니 그 전에 은신할 곳을 찾는 것도 급선무였다.
“해가 지기 전에 은신할 곳을 찾아야 한다.”
떨리는 몸이 간신히 진정 되어 가고 있는 게 느껴지는 이설의 귓가에 말했다. 바람 소리와 말발굽 소리에 묻혀 또렷한 말소리가 아니었는데, 이설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단순히 빗맞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위협인 건지, 간헐적으로 날아온 화살들이 모두 두 사람 옆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 화살이 제 옆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이설은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황제는 그때마다 이설의 허리를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추격전의 긴장은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두운 산간으로 들어가며 느슨해졌다. 지형이 험해 황제의 흑마는 이제 속력을 내 달릴 수 없었고 다행히 추격자들의 천지를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도 사라졌다. 황제는 이따금 말을 멈춰 세우고 주변을 경계하였으나 가까이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이제 은신할 곳을 찾아야 한다. 어스름한 노을이 지는 이 정도의 빛도 곧 사라질 것이다.
“저기 계곡 아래에 동굴 입구가 보입니다.”
침착함을 거의 되찾은 이설이 비탈길 아래에 계곡을 가리켰다. 크기는 알 수 없으나 사람 둘과 말 한 마리만 몸을 숨길 수 있으면 된다. 황제가 망설임 없이 비탈길로 내려갔다.
수풀에 가려진 동굴 입구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황제가 말에서 내렸다. 다친 곳은 왼팔이지만 몸에 퍼진 독 기운 때문에 사지에 힘이 풀려 휘청하며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놀란 이설이 허둥지둥 말에서 내려와 황제를 부축했다. 이설은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황제를 어깨에 힘들게 걸쳐 매고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넓진 않지만 몸을 숨기기에는 모자라지 않고, 흙바닥이 평평하여 몸을 눕기 좋았다. 이설은 황제를 조심히 벽에 기대어 앉히고 품에 넣어 놨던 토끼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밖으로 나가 말을 데려왔다.
자신을 길들인 자에게만 복종하는 말이 동굴 앞에서 움직이지를 않자 결국 황제가 일어나 말에게 손짓을 해야만 했다. 그 뒤 황제는 다시 동굴 벽에 기대앉았다. 숨소리가 급격하게 거칠어지고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화살을 뽑아야 합니다.”
황제 옆에 앉은 이설이 다급하게 말했다. 황제도 그럴 생각이었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 한 손으로 옷을 풀어 헤치는 게 여의치 않자 이설이 도왔다. 금파 가락지를 낀 하얀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게 황제에게도 느껴졌다.
왼쪽 상체를 훤히 드러낸 황제가 화살 끝을 손으로 쥐어 잡았다. 그러자 이설이 마치 자신의 몸에서 화살을 빼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괴로운 얼굴로 황제를 바라봤다. 힘주어 바로 화살을 빼내려던 황제가 그 모습을 보고 짧게 탄식했다.
“…고개를 돌려라.”
“예…?”
“고개를 돌리……, 됐다. 그대로 있거라.”
황제가 왼손으로 이설의 눈을 가렸다. 눈앞을 가린 것이 무엇인지 이설이 알아차리기도 전, 황제가 순식간에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황제의 왼손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