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31화
“폐하…!”
황제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이설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재빨리 허리끈을 풀어 황제의 상처 부위를 세게 감싸 묶었다. 상처 부위를 세게 감을 때마다 황제가 거친 숨을 짧게 뱉었다. 이설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로 하던 일을 마쳤다.
겨우 한고비를 넘겼으니 이제 수색대가 자신들을 찾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이제 곧 나덕산 전체를 금군이 뒤덮을 것이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잠시 밖에 다녀오겠습니다. 절대 움직이지 마시고, 여기 계세요.”
점점 더해 가는 통증과 독 기운을 참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이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쯤 감긴 눈으로 황제가 물었다.
“지금… 어딜 간단 말이냐?”
“폐하께서 어떤 독초에 중독되셨는지 압니다. 오는 길에 그 해독초를 보았으니 가져오겠습니다.”
이설은 황제가 옷을 벗으며 던져 놓은 단도 한 자루를 품에 챙기려 허리를 숙였다. 다시 곧게 서기 전 황제가 그의 팔을 힘없이 당겼다.
“가지 말거라. 놈들의 눈에 띌 것이다.”
“해가 지고 있습니다. 곧 날이 어두워질 테니 아무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너는 달라. 놈들이 널… 볼 수 있다……, 위험하니 여기 있거라.”
황제는 희미한 의식 가운데서도 금잔화 화전에서 봤던 이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그 밤, 이설 혼자만 은은히 빛나던 그 모습을 선연히 기억한다. 지금 밖에 나갔다가 놈들의 눈에 그런 식으로 띄게 되면 위험하다.
이설은 황제에게 붙잡힌 팔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독이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폐하께서 더 위험해지십니다.”
“곧 수색대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니 여기서…, 기다리거라.”
“…….”
“……황명이다.”
황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경고였다. 당장 무력으로 이설을 막아설 수 있는 몸도 아니니 이마저 이설이 듣지 않는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황명이라는 말을 듣고도 이설은 머뭇거림 없이 단도를 품에 넣었다.
“신첩은 황명보다 폐하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서 이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굴을 나갔다. 떠나기 전 동굴 입구를 수풀로 잘 막은 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간신히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던 황제도 점점 기운이 떨어졌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그런지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툭.
툭.
불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황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황제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설이 돌아온 뒤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동굴은 어두웠고, 코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알 것 같은 것은 날씨였다.
우장절이 시작되었다.
요란스럽게 들리는 물방울 소리는 빗방울이 여기저기 떨어져 내는 소리였다. 평년보다 훨씬 빨리 찾아온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지금 이 상황에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비가 오면 수색대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자신과 이설이 늦게 발견될 수 있다.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한 눈이 옆에 앉은 이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몸이 홀딱 젖은 걸 보니 비를 맞고 돌아온 듯했다. 바닥에 둔 무언가를 손질하느라 집중한 몸이 무척 작아 보였다.
“……무얼…, 하고, 있느냐.”
푹 잠긴 목소리에 놀란 이설이 황제를 돌아봤다. 무릎걸음으로 걸어 다가간 이설은 대답 대신 손바닥을 황제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온몸에 열이 올라 후끈했던 황제는 싸늘하게 식은 이설의 손바닥 감촉이 좋아 잠시 눈을 감았다.
“목이 마르십니까? 물을 좀 드릴까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설이 수통을 황제 입술에 대 주었다. 옆으로 흘리는 게 반, 목으로 넘기는 게 반이다. 그래도 갈증이 좀 가시니 낫다. 의식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온몸이 땀과 피투성이였는데, 지금은 한결 개운하기도 하다. 의식이 없는 동안 이설이 젖은 수파로 닦아 주기라도 한 듯했다.
수통을 치우는 이설을 보며 황제가 다시 물었다. 기운이 없어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고 힘이 약했다.
“뭘 하고… 있었던 것이냐?”
“해독초를 찾아왔습니다. 꽃잎은 쓸모가 없어 뜯어내는 중이었습니다. 거의 다 됐습니다.”
이제 보니 이설이 앉아 있는 곳 앞에 풀이 꽤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제게서 가져간 단검으로 꽃을 떼어 내는 이설을 황제가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두운 곳에서 빛을 낸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보통의 사람과 같다. 빛이 나는 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잿빛 머리카락도, 희고 고운 피부도, 가느다란 손가락도 모두 평범하다.
그때 본 것은 전부 다 착각이었을 것이다 단정 지으면서도 황제는 여전히 이설에게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아도 이리 가까이 앉아 있으니 얼굴 선, 이목구비, 표정 정도는 쉬이 보인다. 자기 목숨을 살리는 일도 아닌데 세상 누구보다 심각한 얼굴로 꽃을 떼어 내고 있다. 두통에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왼쪽 어깨는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 황제가 헛바람 빠진 소리로 짧게 웃었다. 이설은 황제가 신음한다 생각했는지, 괜찮으시냐 묻고는 꽃 떼는 속도를 더 빨리했다.
마침내 할 일을 끝낸 이설은 황제의 어깨에 감아 놓은 허리끈을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황제가 무겁게 신음할 때마다 이설은 제 고통처럼 괴로워했다. 상처가 완전히 드러나기 전 이설이 황제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 해독초를 찧어 바르면 통증이 가라앉고 곧 잠이 드실 겁니다.”
“…….”
“금군 수색대가 올 때까지 곁을 지킬 테니 폐하를 치료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설이 말했다. 자신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이설 스스로 알기에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물끄러미 이설을 바라보던 황제가 어깨에 걸쳐진 허리끈을 완전히 풀어 내렸다.
“……치료하거라.”
짧게 안도의 한숨을 쉰 이설이 다듬은 풀을 손에 들었다. 얼핏 본 손에 핏자국 난 상처가 많아 물어보려 했는데 그다음 이설의 행동이 기이하여 묻지 못했다.
이설이 비에 젖은 푸릇한 이파리를 입에 욱여넣은 것이다. 그리고선 오물오물 한참을 씹더니 손에 뱉어 황제 어깨의 환부에 척 갖다 붙였다. 황제가 할 말을 잃은 동안 이설은 다시 이파리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다시 뱉어 환부에 붙이고 나서야 황제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듯했다.
“……약초를 찧을 도구도 없고, 이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민망한 기색 하나 없이 이설은 같은 행동을 서너 번 더 반복한 뒤 그 위로 다시 허리끈을 감싸 맸다. 황제는 신기하게도 처음 허리끈을 감쌀 때보다 통증이 가라앉은 걸 느끼며 다시 부산하게 움직이는 이설을 봤다.
이설은 입고 있던 의복의 넓은 천을 찢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엎드려 손에 쥔 돌 같은 것으로 긁어내리듯 무언가를 적고는 일어나 천을 말아 말 고삐에 단단히 묶었다. 유심히 이설의 행동을 본 황제가 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놈들에게 우리 위치라도 알려 줄 셈이냐?”
조롱 섞인 말을 듣고도 이설이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제 호위무사만 알 수 있는 암어입니다. 발각되더라도 저희 위치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
“근처 지형이 험하고 인적이 드문 산속이라 아무리 금군이라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뭣보다 폐하께서는 빨리 궁으로 돌아가 태의에게 진찰을 받으셔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금군을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설이 말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리고 곧 이설이 동굴 안으로 돌아왔다. 비를 홀딱 맞았는지 들어오자마자 머리를 털고는 옷에 물기를 짰다. 허리끈도 없고 겉옷도 여기저기 찢겨져 대충 봐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설의 말대로 통증이 가라앉자 정신이 아득해지고 잠이 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울까 했지만 어깨가 닿으면 고통스러울 것 같아 관두고 벽에 등을 기댔다. 태금궁의 침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불편함이 온몸을 감쌌다.
“이제 잠이 오십니까, 폐하?”
“…….”
“푹 쉬시면 내일은 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쪽은…… 바람이 불어 추울 테니 안으로 들어오거라.”
할 일이 끝난 이설은 동굴의 입구 바로 옆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팔을 교차하여 무언가를 감싸 안은 걸 보니 주워 온 토끼 새끼를 끌어안은 듯하다.
추위를 느낄 날씨는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장절에는 고뿔이 걸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비까지 맞았으니 이설의 몸 상태도 좋지 못할 것이다. 기껏 생각해서 불러 줬더니 이설은 냉큼 황제의 옆으로 오지 않고 머뭇거리다 황제가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하고서야 쭈뼛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이설이 가까이 오자 비에 젖은 풀냄새가 싸하게 풍겼다.
점점 정신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황제가 불쑥 물었다. 이제 말하는 것이 힘에 부치는지 내뱉는 말 마디마다 호흡이 길었다.
“머리는… 직접 내렸느냐?”
“예…?”
“…초야에 네 머리는…… 누가…, 내려 주었는지 물었다.”
보이지는 않으나 당황했을 얼굴이 어떻게 눈을 깜빡이는지 눈에 선하다.
“제 상궁이… 내려 주었습니다.”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려 대답하듯 목소리가 우울했다. 황제도 그게 느껴졌다.
“그래도… 정녕 나를 원망하지 않았느냐.”
“…….”
“…괜찮으니 솔직히 대답해 보아라.”
“단 한 번도 폐하를 원망한 적 없습니다.”
이설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황제가 소리 없이 웃었다.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이설은 모를 일이었다.
다시 침묵하던 황제가 갑자기 손을 뻗어 이설의 머리를 만졌다. 놀란 이설이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황제는 이설이 머리에 끼고 있던 상투관의 비녀를 느릿하게 잡아 뺐다. 상투관이 아래로 떨어지고 젖은 머리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설이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가 웃었다. 이번에는 이설도 그 모습을 봤다.
“우리의 초야는 오늘이고……, 머리는 이렇게 내려 준 걸로 하지.”
“…….”
“그러면 너는 내게… 소박을 맞은 것이 아니다.”
“…폐하…….”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
“……오늘 내가 했던 말은 모두 잊고, 이것만… 기억하여라.”
이설이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황제는 모른다. 해독초의 약효가 돌며 의식과 잠의 경계가 모호해져 갔다. 그리고 그쯤, 황제는 다시 깊은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