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32화
“…하, 폐하……! 정신이 좀 드십니까?”
빌어먹을.
“윤 내관, 어서 태의를 다시 불러오시오!”
눈을 뜨고 처음 보는 것이 하필 이 얼굴이라니.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왜 다시 눈을 감으십니까, 폐하! 저를 보십시오!”
“…….”
“자세히 보십시오.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침상 가까이 들이대는 얼굴에 질색을 하며 황제가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네 놈 모…, 가지를… 잘라, …태자의 탄일… 선물로 줄 것이다…….”
“의식은 완전히 회복하셨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되먹지 못하게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차란을 무시하며 황제는 주위를 둘러봤다. 익숙한 이 공간은 자신의 침소이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창밖에 시끄럽게 들리는 빗소리와 문밖 복도의 어수선한 분위기뿐이다. 자신이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분주히 움직이느라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어깨의 통증만 없었더라면 간밤에 지독한 꿈을 꾸었다 여겼을 만큼 지난 밤 일이 기억 속에서 흐릿했다.
황제가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윤 내관과 궁인들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의식이 없는 동안 환각향이라도 피워 놓았는지 아직 머리가 아파 괜한 것들에 예민해졌다. 사부작거리는 발소리조차 듣기 싫어 모두 물리고 차란만 남으라 명하였다. 윤 내관은, 그럼 태의가 도착하면 다시 들어오겠다며 조용히 침소를 나갔다. 늙은 내관은 제 상전이 깨어난 게 무척 기쁜 듯 눈물을 글썽거렸으나 황제 감동 따위를 느꼈을 리는 만무했다.
소란하던 침소에 차란과 둘만 남고서야 황제가 몸을 일으켜 허리를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차란이 급히 말리려 하였으나 황제가 손을 휘저으며 제 곁에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했다.
“어찌 된 일이냐.”
몸을 움직이자 왼쪽 어깨 통증이 묵직하게 전해졌지만 참지 못할 정도의 괴로움은 아니었다.
“제가 여쭙고 싶은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그 깊은 산중에 루 소의 마마와 함께 계셨던 겁니까? 그것도 그렇게 큰 부상을 입으시고요.”
“내가 물은 것에 먼저 답하여라. 나를 어찌 찾았지?”
“금군 수색대가 폐하의 흑마를 찾아 데려왔습니다. 고삐에 묶인 천을 펼쳐 보니 온통 암어로만 쓰여 있어 곤란하던 차에, 루 소의 마마의 호위 무사라는 자가 용케 그 암어를 풀어 위치를 찾아냈습니다.”
결국 이설의 덕분이었다는 건가.
“갑자기 우장절이 시작되는 바람에 수색에 무척 애를 먹고 있었는데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도 좀처럼 아무 진척이 없어 무척 걱정하였습니다.”
“……이틀 밤… 이라고 하였느냐?”
묵묵히 차란의 말을 듣던 황제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나를 찾는 데에 이틀이 넘게 걸렸다는 것이냐?”
“예. 해가 지고도 폐하께서 하산하지 않으셔서 수색을 시작했고, 이틀 밤이 지나 사흘째 되는 새벽에야 겨우 발견한 것입니다.”
황제가 곰곰이 지난 기억을 떠올려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제에게는 하룻밤의 기억밖에 없다. 이설이 입으로 씹은 해독초를 발라 준 뒤 잠이 들었던 것은 기억한다. 잠이 들 것이라는 언질은 미리 해 주었지만 그 정도로 약효가 뛰어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문득 잠이 들었던 중간중간에 어렴풋이 의식을 차렸던 기억이 떠오르긴 하지만 또렷하지는 않다. 꿈의 잔상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은 빗소리와 젖은 풀냄새, 볼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 그리고 입술로 흘러 들어오는 끈적하고 달콤한 당밀이다. 조각조각 난 기억들이 머릿속에 흩어져 각기 따로 존재하는 것 같다.
차란의 말대로라면 이틀 밤을 의식 없이 산속 동굴에서 보냈다는 건데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다. 화살에 어깨가 뚫렸으니 통증은 어쩔 수 없고 아직 머리는 좀 어지럽지만 독시에 의한 중독 증세는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런 외진 곳에 숨어 계셨으니, 폐하의 흑마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정말……,”
“연이설 그자는 어디에 있느냐.”
차란의 말을 단번에 무시하며 황제가 물었다. 차란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아, 하고 뭔가 깨달은 것처럼 대답했다.
“루 소의 마마라면 비은궁에 계시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묻는 ‘연이설’이 누구인지 생각한 것 같았다.
“많이 다쳤더냐?”
황제가 기억하기로 이설은 다친 곳이 없었다. 겁을 잔뜩 먹었고, 비를 홀딱 맞아 볼품없긴 했어도 함께 있는 동안 다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황제가 묻자 차란이 미묘한 표정으로 허공에 눈을 돌렸다.
“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 옆에 함께 있던 자를 어찌 보지 못하였느냐?”
“새벽에 동굴에서 먼저 발견된 건 폐하뿐이십니다. 루 소의 마마께서는 그 후에 근처 나무 아래에 쓰러져 계신 걸 금군 수색대원이 발견하였습니다.”
“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고?”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는 황제에게 차란이 그렇다고 덤덤히 대답했다.
비가 퍼부어지는 걸 뻔히 알면서 왜 밖을 나가 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는 건지. 이틀이 지나도 수색대가 오지 않아 혼자서 산을 내려가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황제가 생각하기에는 한없이 미련한 짓이다. 장시간 비를 맞아 체온이 떨어져 정신을 잃을 수도 있었고, 비 때문에 물러진 흙을 잘못 밟아 비탈길을 굴러 몸이 다칠 수도 있었다. 미련하다, 미련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쯧, 차는 황제에게 차란이 여상히 말을 이었다.
“폐하께 드릴 산나무 열매와 약초를 구하러 나갔다가 변을 당하신 것 같습니다. 수색대원 말로는 웬 약초와 빨간 열매들을 손에 한 움큼 쥐고 계셨다 합니다.”
“…….”
“루 소의 마마님이 폐하를 살리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차란이 소상히 고했지만 딱히 황제의 표정이 나아지는 것도 없었다. 미련한 것은 미련한 것이다. 어찌 자기 한 몸 건사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지. 그리고 애초에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이설이었고, 그의 목숨을 구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러니 차란의 말은 과언이다.
열린 창으로 비를 머금은 풀냄새가 바람과 함께 들어왔다. 깊은숨으로 들이마시자 문득 제 옆에 앉아 있던 마른 몸이 생각났다. 홀딱 젖은 몸을 하고서는 얼마나 부산스럽게 움직이던지, 캄캄한 동굴 안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이설이 움직일 때마다 지금과 같은 풀냄새가 났다. 우장절마다 흔히 맡게 되는 이 냄새가 오늘은 썩 불쾌하지 않은 걸 보니 통증을 완화시키려 피워 놓은 환각향이 후각에까지 영향을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창을 언짢게 쳐다보자 차란이 움직여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신, 아직 그날 폐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못하였습니다.”
황제의 옆으로 돌아오며 차란이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낮아진 목소리가 품은 심각성이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사냥 중 우연히 이설을 만났는데 갑자기 습격을 받아 이설을 데리고 도망을 쳤다 말했다. 노렸던 것은 분명 이설이나, 그 과정에 황제인 자신이 화를 입어도 개의치 않아 했다는 것과 추격 중에 퍼붓는 공격이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말도 보탰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차란이 물었다.
“그렇다면 단순 위협이었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지. 어차피 내가 화살에 맞은 마당에 망설일 게 무엇이 있었겠느냐? 충분히 연이설을 죽일 수 있었던 자들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다시 생각해 봐도 꺼림칙했던 추격을 떠올리며 잠깐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차란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폐하가 사라지신 다음 날, 수색대가 나덕산 깊은 산중에서 시체 한 구를 찾았습니다.”
“…시체?”
“예. 확인 결과 이곳 태금궁 궁녀였습니다. 다른 궁녀들을 문초해보니, 그날 궁에 남아 다른 일을 하기로 한 궁녀였답니다.”
태금궁에 있어야 할 궁녀가 사냥 대회가 있던 날 나덕산 산중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이건가. 황제가 조심스럽게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하필 제 궁에서 저를 받드는 궁녀가 죽었고, 그날 자신과 이설은 같은 곳에서 수상한 자들에게 뜻 모를 추격을 당하였다. 아무 의미 없을 거라 넘기기에는 수상쩍은 게 많다. 놈들은 치명타를 입히고도 단순히 위협으로만 활을 쏘았다. 정말 이설을 죽일 생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태금궁의 궁녀는 왜 나덕산에서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을까. 아랫것들의 생사에 관심이 많지는 않으나 때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환각향의 효능이 다 떨어졌는지 급격히 머리가 아파질 때쯤 태의가 도착했다.
“폐하 혹 다른 곳이 불편하시지는 않으십니까?”
“머리가 아픈 것 말고는 괜찮다. 몸에 남아 있는 독기도 거의 없는 듯하고. 처치를 무척 잘했군, 태의.”
좋은 말에 인색한 황제에게 듣는 칭찬이 면구스러운지 태의가 고개를 더 깊이 조아렸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하며 뜸을 들이는 말 중간에 차란이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이 늙은이가 해 드린 처치는 거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폐하께서 궁에 오셨을 때는 이미 필요한 처치가 모두 끝난 상태이셨습니다. 독 기운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상처 치료도 매우 잘되어 회복 기운을 타고 계셨습니다.”
“…….”
“루 소의 마마께서 처치를 무척 잘하신 듯합니다. 폐하의 상처 부위에 발라 놓으셨던 약초가 해독에 무척 뛰어난 효능을 가졌다는 것을 모르는 어의도 많습니다.”
잠잠히 태의의 말을 듣고 있던 황제에게 차란이 불쑥 끼어들었다.
“루 소의 마마께서 폐하를 살리신 게 과언이 아니라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쓸데없는 것에 거들먹거리는 차란을 못마땅하게 쳐다봤지만 기죽기는커녕 거 보라는 듯 어깨만 으쓱하고 만다. 그래도 황제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황제가 덮고 있는 포단을 정리하는 척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