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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33)화 (33/300)

달의 황홀경

33화

태의는 이런 말을 해도 될까, 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 결국 소신 있게 입을 열었다.

“차란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상처 치료뿐만이 아니라 폐하께서 의식이 없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과일과 약초 등을 구해 드시게 하였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복이 이렇게 빠를 수가 없습니다.”

“…….”

“폐하께선 아마 기억이 없으실 겁니다. 상처에 바르셨던 약초가 수면과 마비 작용이 심해 치료 중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의식이 없었다 착각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런 기억이 없다 여기는 황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태의가 덧붙였다.

태의와 차란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환각향의 효과가 사그라들자 머리는 아파 오지만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해지며 몇 가지 장면들이 떠올랐다. 붉은 열매를 짓이겨 즙을 내고 있는 젖은 옆모습과 무릎에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입술 사이로 조심스레 나무 수액을 흘려보내 주는 창백한 얼굴이 점점 선명해진다.

모두 연이설이었다.

황제가 무심결에 왼쪽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엉성하게 감아 놓은 허리끈은 사라지고 새 무명천을 감아 놓았다. 진녹색의 약초 찧은 물도 들지 않아 새하얗기만 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두운 동굴 안에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젖은 풀잎을 입으로 오물오물 씹던 이설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차란이 뭘 잘못 봤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쓱 빼며 눈을 비볐다.

“매번 새 약초를 찧어 환부에 발라 주셨나 봅니다. 보통 정성이 아니었을 겁니다. 잎이 질기고 거칠어 찧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약초라…….”

“……그래서 그걸 입으로 씹어 주더군.”

“예…?”

“연이설 그자가 씹다 뱉은 약초를 내 어깨에 붙인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그 잎들을 오물오물 씹다 뱉어 제 어깨에 붙였을 것을 생각하니 황당함에 웃음이 난다. 그 얘기를 가벼이 전하는 황제를 보고 차란은 뭘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남의 손끝이 닿은 것조차 먹지 않는 황제인데, 남이 씹다 뱉은 약초를 제 몸에 붙였다는데도 저렇게 헛헛하게 웃으며 넘어가는 게 보통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혹 환각향이 너무 강하여 정신이 이상해지신 것은 아닌가 하여 윤 내관을 보니 윤 내관도 놀란 얼굴로 눈을 굴리다 차란과 마주쳤다.

태의 또한 무척 놀란 눈치로 주변을 살피다 황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루 소의 마마께서… 직접 입으로 약초를 씹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왼쪽 손목에 향한 채였다. 너덜너덜하게 감겨 있던 비단은 사라지고 누군가 새로 감은 듯 붉은색 비단 끈이 단정히 묶여 있다. 황궁으로 옮긴 뒤 궁인들이 새로 감아 놓았나 보다. 상처도 아니고, 너덜너덜한 게 거슬렸다면 그냥 풀어 놓기만 했어도 됐을 것을. 그냥 두는 것을 황제가 반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는지 평소 황제가 직접 묶은 것보다 더 단단하게 잘도 묶어 놓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태의 영감?”

공연히 초점 잃은 눈으로 침상 끝을 바라보는 태의에게 차란이 물었다. 태의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독기는 하루 이틀 내로 완전히 가실 것이고, 상처는 보름이면 충분히 아물 것입니다. 우장절 동안 바깥 활동을 삼가시고 충분히 쉬신다면 곧 회복하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고했네.”

“회복을 돕는 탕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또한 궁녀들에게 일러 중치모당귀 달인 물을 올릴 테니 수시로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해독초 때문에 생기는 머리앓이에 효과가 무척 좋습니다.”

건성으로 태의의 말을 들으며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궁녀가 탕약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두 손으로 황제 앞에 들어 먹여 주려는데, 황제가 제 멀쩡한 오른손을 궁녀에게 내밀며 이리 달라 손짓했다. 환부를 감싼 무명천 때문에 앞섬을 제대로 여미지 않아 훤히 드러나 황제의 맨 가슴을 보고 궁녀가 얼굴을 붉히며 황제에게 탕약을 내밀었다. 차란이 혀를 쯧, 하고 차며 윤 내관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윤 내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이 비운 탕약을 가지고 궁녀가 나가고 뒤따라 윤 내관이 쫓아 나갔다. 아직 멀뚱히 서 있던 태의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이만 물러나도 되겠냐며 조용히 물었다. 차란이 가벼운 어조로 어딜 그리 급하게 가려고 그러냐 묻자 잠시 망설이다 대답한다.

“폐하께서 의식을 회복하셨으니 이제 비은궁에 가 볼까 하였습니다. 기별을 받은 지 벌써 한참 지난지라…….”

“다른 어의는 어찌하고 태의 영감이 비은궁을 찾는단 말이오?”

의아하게 묻는 차란에게 태의가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황제의 눈치를 흘끔 보다가 황제가 물음에 답하라, 하고 무겁게 명하자 결국 솔직하게 고한다.

“아침부터 사의시(司醫署:의약과 치료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로 계속 기별을 넣었으나 찾아오는 어의가 하나도 없었다 합니다. 이전에 크게 신세를 졌던 비은궁 상궁이 하도 부탁을 하길래 저라도 잠시 다녀올까 하였습니다.”

아뢰기 곤란한 말을 한 듯 태의가 허리를 더 깊이 숙였다. 차란이 굳은 표정으로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으나 황제는 마주하지 않았다.

이설은 황궁에서 대놓고 천대를 받고 있다. 내명부에서 가장 품계가 높은 후궁인 데다 황제에게 이름을 준 정인인 것을 모두가 아는 데도 그 누구 하나 신경 써 주는 이가 없다. 사의시에 높은 녹봉을 받으며 놀고먹는 어의가 얼마나 많은데 그중 단 하나도 이설을 봐 주러 가지 않는다니. 오가는 길에 마주치면 그저 눈짓으로 슬쩍 비웃고 마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하기야. 이설이 궁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살았는지 여태 몰랐던 것은 아니다. 사냥 대회 때만 해도 여기저기서 받는 눈초리를 황제 역시 보았다. 웬만하면 눈길도 주지 않고 싶었는데, 그 잿빛 머리카락이며 말 위에서 낭창하게 흔들리는 몸이며, 시선 닿는 곳마다 이설이 있었다.

“비차란.”

“예. 폐하.”

“비은궁으로 갈 것이다. 채비하라.”

누가 말리기도 전에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섰다. 차란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포단을 들어 다시 침상에 올려놓으며 허둥지둥 황제를 쫓았다. 황제의 부름에 들어온 윤 내관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황제를 보고 기함을 토했다. 아직 멀거니 서 있던 태의는 쓸데없는 말을 하였나 후회가 된 건지 서 있던 곳에서 뒤로 물러나 주위만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사의시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태의든 어의든 모두 비은궁으로 데려갈 테니 폐하께서는 자리에 누워 계십시오.”

“네 말대로 내 생명을 구해 준 은인 아니냐? 내가 직접 찾아갈 것이다.”

“몸이 좀 더 회복되신 뒤에 찾아가셔도 늦지 않습니다. 폐하 제발……,”

“뭣들 하느냐! 짐이 이 너덜거리는 팔로 직접 의복을 입으라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냐!”

여간해서는 궁인들에게 큰소리치는 법이 없는 황제의 호통에 문 앞에 서 있던 궁녀들이 아연실색하며 급히 달려왔다. 차란의 눈치를 한 번 보기는 했으나 상전의 심기가 더 불편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궁인들이 부산히 움직이며 황제의 환복을 도왔다. 사나운 눈초리에 겁을 먹어 평소보다 손길이 급해졌지만 능숙함에는 차이가 없다.

다친 어깨의 팔을 소매에 조심스레 끼우려는 궁녀들의 배려를 무시하고 황제가 거칠게 옷을 걸쳤다. 낮은 신음 소리가 들리자 궁녀들이 멈칫했으나 황제는 인상만 좀 찌푸리고 말 뿐이었다.

“가벼운 부상이 아닙니다. 부디 옥체 보존하소서, 폐하.”

감히 앞을 막아선 차란을 보고 황제가 코웃음을 치고는 옆으로 돌아 나왔다. 제 어깨를 일부러 툭 치고 가는 뒷모습을 한숨과 함께 바라보는 차란의 표정이 복잡 미묘했다. 멀뚱히 서 있는 태의와 눈이 마주쳐 따라가자는 눈빛으로 고개를 까딱하자 태의도 금세 알아듣고 황제 뒤를 쫓았다.

황궁 전체 크기를 헤아렸을 때, 황제의 궁에서 비은궁까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 말하여도 과장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짧은 거리라 하더라도 걷기에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황궁을 걷는 동안은 물론 비은궁 앞뜰에도 궁인 하나 없이 텅 비어 황제를 맞이하는 이조차 없었다. 물먹은 풀 비린내 가득한 궁으로 들어서자 황제의 발걸음이 더 급해졌다.

복도에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울리자 의원이 온다 생각한 모양인지, 이설의 침소에 다다랐을 때쯤 궁녀 하나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복도로 나왔다가 황제를 보고 놀라 자리에 주저앉았다.

“…폐, 폐하…! 이곳에 가, 갑자기 어인 일로……,”

“루 소의는 안에 있느냐?”

“…예, 예… 안에 계시긴 하온데……, 그게 저……,”

황제를 보고 놀라 말문이 막힌 것과 별개로 궁녀는 뭔가를 숨기고 싶은 듯 말을 주저했다. 황제를 한 번, 이설의 침소로 들어가는 문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질끈 감고 무언가를 말하려다가도 다시 입술을 닫기를 몇 번. 보기보다 오래 참아 주는 황제를 대신해 차란이 호통을 쳤다.

“고할 게 있으면 어서 고하고, 그런 게 아니라면 어서 이 문을 열어라.”

“마마께서 지금은 몸 상태가… 그…, 너무 좋지 않으셔……,”

“비키거라.”

자리에서 일어난 궁녀가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침소로 들어가는 문 앞을 막았다. 숨기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앞에서 이 정도로 용기를 내 앞길을 막았다니 그 충절은 높이 산다. 하지만 인내심은 여기까지다. 황제의 불편한 심기를 읽은 차란이 무력으로 궁녀를 옆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윤 내관이 침소 문을 활짝 여는 순간 앳된 여자아이의 울먹이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마마께서 목소리를 잃어 말을 하지 못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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