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35)화 (35/300)

달의 황홀경

35화

수면향을 피운 것도 아닌데 자꾸만 잠이 소록소록 쏟아질 것 같은 때였다. 문밖 복도를 걷는 소리가 나자 주란이 득달같이 달려 나갔다. 왜 이리 늦게 왔냐며 연화를 나무랄 게 뻔했다.

그러지 말지, 하는 생각을 하며 졸린 눈을 비비며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혼자서는 그마저도 어려운 일이라 기연의 도움을 받았다. 자세를 어찌해도 몸을 일으키는 게 쉽지 않아 기연에게 안기다시피 몸을 기댄 순간 침소 문이 기별도 없이 벌컥 열렸다.

동시에 울먹이는 주란의 목소리가 침소에 울려 펴졌다.

“마마께서 목소리를 잃어 말을 하지 못하십니다!”

침소에 있던 궁녀들과 기연, 그리고 이설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문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보고도 아무도 입도 뻥긋하지 않던 상황. 노련한 주 상궁이 가장 먼저 나섰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옥체 일향 만강하시길 비옵니다.”

머리가 바닥에 닿을 기세로 허리를 숙이는 주 상궁을 따라 모두들 같은 자세로 황제를 맞이했다. 빳빳이 든 고개로 황제를 맞는 것은 이설뿐이었다.

문 바로 앞에 선 황제는 자리에 꼼짝도 않고 조용히 이설의 침상만 쳐다봤다. 옆에 선 차란이나, 윤 내관이나 다른 궁인들은 주란의 말을 듣고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지만 황제만은 침착했다. 평소와 달라 보일 것도 없는 표정이건만 며칠 새 조금 수척해진 탓인지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 보였다.

황제와 대치하듯 빤한 얼굴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이설은 황제의 안색까지 다 살핀 후에야 화들짝 놀라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숙였다. 무릎 꿇어 부복하려 했으나 다리 한쪽이 생각만큼 가볍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평신.”

황제가 한참 만에야 평신을 허락하자 모두가 허리를 세웠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누구를 향해 물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황제의 시선만은 멀리 이설에게 향해 있었다. 이설은 고개만 끄덕일 수가 없어 누가 대신 답해 주길 바라며 다시 이마를 침상에 닿을 것처럼 깊이 숙였다.

“예. 약초를 잘못 삼키셨다 하시어 깨어나신 후부터 계속 말씀을 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일시적인 거라 말씀하시긴 하셨습니다만……. 곧 의원이 올 테니 그때 진찰을……,”

“사의시 어의들이 모두 진찰을 거부했다 들었다. 헌데 무슨 의원을 말하는 것이냐?”

“……궁 밖에 의원을 부르러 궁녀를 내보냈습니다.”

주 상궁이 대답하기 전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 말을 듣고도 황제는 별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고 그저 시선만 여전히 이설에게 향해 있었다. 이설이 천천히 허리를 들자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얼굴에 읽을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게 한 겹도 없어 이설이 먼저 눈을 옆으로 피했다. 먼저 피하지 않고 망연히 황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고 몸에 불이 난 것처럼 열이 오른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황제가 침묵하자 모두들 숨소리를 감췄다. 빗소리만 요란하게 부서지며 다들 서 있는 자리를 지키던 가운데 이설이 별안간 잔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마…, 마마!”

침상 바로 옆에 있던 기연이 재빨리 이설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숙여 어깨에 손을 대고 품에서 꺼낸 수파를 건네려기에 받으려는 순간 제게로 뻗은 팔이 거칠게 옆으로 내 쳐졌다. 놀라 고개를 돌리자 황제가 제 앞까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손대지 말라.”

“…….”

“태의.”

황제에게 밀린 기연이 뒤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굳은 표정이 황제의 뒷모습을 향했으나 곧바로 걷어 낸다.

황제의 부름에 태의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침상에 가까이 섰다. 주 상궁이 급하게 침상 주변에 휘장을 내리고 윤 내관은 모든 궁인들을 침소 밖으로 내보낸 뒤 자신도 나갔다. 기연은 이설을 남겨 두고 나가야 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고집을 부릴 자리도, 상황도 아니란 걸 아는 듯 허리에 찬 검을 꽉 쥐고서 마지막으로 침소를 나갔다.

“팔을 걷어 주십시오, 마마.”

기연이 두고 간 수파로 입을 가린 이설은 계속 잔기침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침은 계속 터지는데 그때마다 부은 목이 아파 눈물까지 찔끔 맺힌다. 옆에 공손히 선 태의는 제 손으로는 이설의 소매를 걷을 수 없어 쩔쩔매고 있었다. 보다 못한 상궁이 대신 이설의 소매를 걷어붙이려 할 때 황제가 먼저 움직였다.

“가만히 있거라.”

얇은 침의 너머로 갑자기 타인의 체온이 느껴진다. 황제가 이설의 등 뒤에 몸을 걸터앉아 어깨를 감싸 안고 소매를 대신 걷어 준 것이다. 간신히 기침은 멎었지만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고 몸에 열이 오르니 다행이라고 할 것도 아니다.

굳은 몸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으니 뒤에 앉은 황제의 숨결까지 느껴졌다. 며칠 전 추격을 피하던 중 말 위에서와 같은 자세였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괴한들에게 추격을 당할 때보다 숨이 더 가쁘게 쉬어지는 것 같다.

이설의 사정이야 알 리 없는 태의가 맥을 잡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마마, 혹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뭐가 안 좋은 것이냐?”

“그런 것은 아니온데……. 갑자기 맥이 빨리 뛰는 듯하여 여쭈어봤습니다.”

황제가 말을 할 때마다 더운 숨이 목 언저리에서 흩어진다. 이설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의가 맥 짚는 것을 끝내고 볼에 난 상처와 손목의 부상 등을 들여다볼 때까지 황제는 이설의 등 뒤에 앉아 있었다. 황제가 뒤에 앉은 탓에 어떤 표정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두 번 눈을 치켜떠 주 상궁의 안색은 살폈지만 그녀는 태의의 진찰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다른 불편한 곳이 없냐는 태의에 물음에 이설이 오른쪽 허벅지를 가리켰다. 머뭇거리는 태의에게 직접 다리를 보여 주려 포단을 걷으려는 순간 묵직한 나무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던 황제가 움찔 몸을 움직였다.

동시에 주 상궁도 놀란 얼굴로 튀어나와 이설이 포단을 들추지 못하게 막아섰다. 태의가 놀라 시선을 멀리 한곳으로 돌렸지만 이설만큼 놀란 건 아니었다. 이설 역시 놀라 커진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포단을 쥔 손을 천천히 풀었다.

“……다리는…, 사의시에서 의녀를 보내 진찰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마.”

태의가 어색하게 말을 돌리며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이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 상궁을 바라봤지만 좌우로 가로젓는 고개로만 답을 받았다. 의녀에게 맨다리를 보이느니 나이 지긋한 태의에게 지금 진찰을 받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하는 건 이설뿐인 듯 주 상궁마저 단호했다.

“마마께서 폐하의 상처에 바르신 약초를 직접 입으로 씹어 찧으셨다 들었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제 어깨를 끌어안은 황제가 힘을 더 단단히 주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숨을 흡, 멈췄다.

“잔기침이 나올 정도면 아마 목 아래까지 많이 부으셨을 겁니다. 보통은 닷새 내로 목소리가 돌아오지만……,”

“닷새 이상도 걸릴 수 있다는 것이냐?”

“송구하오나 소신이 생각하기에는 열흘 이상 걸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전처럼 완전히 말을 하시려면 보름은 예상하셔야 하고요.”

이설도 예상하고 있던 바라 그리 놀라지 않았다. 주 상궁도 이설의 언질이 있었으니 못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다만 약간은 미덥지 못했던 이설이 아닌 태의에게 확답을 들은 것에 낙담했는지 구부정한 어깨가 한숨과 함께 조금 처지기는 했다.

오직 황제만이 이전보다 언성이 높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보름이라 하였느냐?”

“예. 정확한 시일은 알 수 없으나 그쯤은 걸릴 것입니다. 게다가 마마께서는 지금 몸도 많이 약해져 있는 터라…….”

태의가 흘끔 눈을 돌려 이설의 손목을 쳐다봤다. 팔꿈치까지 드러난 팔은 이제 막 성장을 하는 어린아이의 팔처럼 가느다랗기만 해서 다 큰 성인의 팔 같지가 않아 보였다. 팔 뿐만이 아니다. 침의가 얇은 탓에 훤히 보이는 몸의 선이 보통의 사내들에 비해 너무 가냘파서 빈말로라도 건강해 보인다는 말을 하기가 민망스러웠다.

황제의 불편해진 심기에 덩달아 겁을 먹은 이설이 몸을 웅크렸다. 흉흉해진 황제의 기운이 등을 타고 제게 전해지는 것 같다.

“기운을 일찍 차리신다면 더 빨리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지요, 폐하.”

황제의 기분을 달래는 태의의 말에 이설이 조금 자조했다. 황제가 무엇 때문에 이리 흉흉한 기세를 감추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자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황제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설은 늘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자신의 소매를 걷느라 보인 팔목에는 여전히 붉은 비단이 감겨 있었다. 평소보다 옷차림이 느슨했고, 묶지 않은 긴 머리를 치렁하게 풀어 항상 봐 오던 단정함은 없었으나 손목에 쓰인 이설의 이름만큼은 절대 보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단단히 가려진 채였다.

“목 외에 다른 곳은 어떠한가.”

“크고 작은 상처이나 시일 내로 아물 것입니다. 상처가 남지 않도록 좋은 약들을 준비하겠습니다.”

할 일을 마친 태의가 침상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주 상궁이 진료가 끝난 분위기를 살피며 다시 휘장을 걷으려는데 황제가 막아 세웠다.

“휘장을 걷지 말고 모두 침소 밖으로 물러나 있거라.”

높낮이 없는 평이한 그 말에 긴장한 이설과 달리 진찰을 마친 태의를 공손히 인사 후 바로 침소를 떠났다. 주 상궁은 잠시 이설의 표정을 살피다가 이설이 아주 작게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고 곧 태의를 따라 나갔다.

등 뒤에 닿아 있던 황제의 몸이 움직여 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설의 침상에서 일어난 황제가 몸을 움직여 이설의 앞에 섰다. 황제의 품에 안겨 있던 등에 체온이 사라지며 서늘한 기운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황제는 아름다운 얼굴에 표정 하나 없이 고요히 이설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단둘만 남게 된 침소의 휘장 안. 먹구름 낀 하늘에 햇빛도 밝지 않은 데다가 사방이 휘장으로 막혀 있으니 침상 위로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마치 며칠 전 동굴에서의 그 밤들처럼.

다시 또 그때와 같다.

아스라한 어둠이 내려앉은 좁은 공간. 풀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바람에 실려 오는 물 먹은 풀냄새.

그리고,

“……이래서야 나를 정말 원망해도 할 말이 없겠군.”

찬연하고 아름다운 황제와 둘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