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42화
이설이 훑어봐도 차린 수라상이 황제를 위해 차려진 것치고는 심히 초라하긴 했다. 본래 이설이 먹는 음식이라고 해 봐야 나물 몇 가지와 닭고기 정도가 고작이다.
이전에 황제가 자주 비은궁에 들려 수라를 들었을 때는 고기반찬이며 전이며 기름진 음식들도 나름 올리긴 했지만 그 뒤로 이설이 혼자 드는 밥상에 오른 적은 없다. 그나마 지금 간신히 한 자리 차지한 고기반찬도 그제는 없던 것이다. 황제가 또 비은궁에서 수라를 들까 걱정되어 어제 이른 아침 기연과 화홍이 궁 밖에 나가 사 온 것이었다. 저잣거리의 상인들도 모두 장사를 접고 두문불출하는 기간이라 이조차도 어렵게 구해 온 것이라 들었다.
살며 이렇게 초라한 수라상을 받아 본 적이 없을 황제를 생각하니 저 흉흉한 눈빛도 이해가 된다. 이설 자신도 자신이지만 황제 앞에 끌려와 쓴소리를 들을 제 궁녀들 걱정에 벌써부터 속이 쓰렸다.
태금궁의 궁녀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침소 문이 다시 열리고 비은궁 궁녀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태금궁 궁녀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들었는지 낯빛이 새파래졌다.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주 상궁이 모두를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폐하.”
일렬로 선 궁녀들을 황제가 한 명 한 명 불쾌한 기세로 훑어보자 눈이 마주친 궁녀들이 모두 겁에 질려 손을 벌벌 떨었다.
“……모시는 상전은 저리 바싹 말라 가는데 아랫것들은 아주 살이 오를 대로 올랐구나.”
가타부타 묻는 질문이나 들어 보는 대답도 없이 한껏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이설의 패물을 팔아 궁 밖에서 음식들을 사 온 뒤로 확실히 아이들 먹는 음식이 좋아지긴 했다. 의복은 여기저기 기어 입고 낡고 해졌지만 얼굴만큼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것이, 태금궁 궁녀들보다도 때깔이 좋았다.
“이따위 것들을 지금 먹으라고 내놓은 것이냐?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 보아라.”
황제가 손끝으로 툭 친 놋그릇 하나가 덜거덕 소리를 내며 탁자 위를 굴렀다. 별것도 아닌 소리에 깜짝 놀란 것은 이설뿐만이 아니었다. 그릇을 던지기라도 할 줄 알았던지 아이들이 웅크리듯 몸을 말았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건 주 상궁뿐이었다. 황제의 날 선 목소리와 조소 어린 표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우장절이 평년보다 이르게 찾아와 식재료를 제때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오나 루 소의 마마의 식사는 부족함 없이 올리고 있사오니……,”
“저 꼴을 보고도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
“숟가락이나 들겠나 싶은 저 팔을 보고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느냐 이 말이다.”
이설의 마른 팔을 가리키며 황제가 언성을 높였다. 황제의 손끝이 향한 제 팔뚝을 감싸 안으며 이설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주 상궁과 황제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숟가락이나 들겠나 싶은 팔이라니. 황제가 뭘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한 듯싶다.
이설은 약하지 않다. 물론 금국에 온 뒤로 침상에 며칠을 꼬박 앓아누운 적이 몇 번이나 있으니 주 상궁이나 다른 궁녀들에게 이리 말을 한다면 믿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꼴’을 운운하며 숟가락도 들기 힘든 약골이라 말하는 것은 듣기 민망하다. 몸이 마른 것은 변변찮음 음식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끼니를 거른 날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궁인들에게 매일같이 듣는 잔소리였다.
‘한 숟가락이라도 좀 드셔 보세요, 마마. 금국에 오신 뒤로 내내 마르기만 하시니, 누가 보면 저희가 마마를 굶기기라도 하는 줄 알겠습니다.’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는 연화의 말을 좀 들을걸. 괜한 고집에 애꿎은 궁인들만 황제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됐다.
“내섬시에서 받아 가는 음식들은 도대체 어느 목구멍으로 들어갔느냐?”
가만히 황제의 말에 머리만 조아리던 주 상궁의 눈썹이 일순 움찔 움직였다. 큰 표정 변화는 없지만 옆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저 정도 얼굴은 읽을 수 있다. 억울하고 답답함으로 달싹이는 입술이 금방이라도 황제에게 사실을 고할 것만 같다. 저희 비은궁은 내섬시에서 받는 음식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황제에게 할까 염려한 이설이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어딜 가느냐?”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불편한 일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마다 붓과 종이를 찾아 사방을 헤매야 한다.
멀리 두었던 종이 위에 붓으로 휘갈겨 쓴 글을 가지고 황제 앞에 무릎 꿇었다. 종이를 건네받으며 황제가 쓰게 인상을 찌푸렸다.
“일어나거라.”
이설이 일어나는 걸 본 후에야 황제가 건네받은 종이를 펼쳤다. 이제껏 이설이 쓴 글씨 중 가장 처참한 악필이었다.
[궁인들 잘못이 아닙니다. 내섬시에서 받아 오는 간이 된 음식들은 입맛에 맞지 않아 끼니를 자주 걸렀습니다. 궁인들은 제가 남긴 것들을 먹을 뿐입니다.]
글을 읽은 황제가 코웃음을 친다. 구겨진 종이가 아래로 떨어지고 여전히 심기가 언짢아 보이는 얼굴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연국에서 얼마나 귀한 것을 먹고 살았기에 내섬시에서 내주는 음식은 성에 안 찬단 말이냐?”
대답을 들으려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적당히 눈을 피하면 침묵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걸 알고 굳이 대꾸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는데 웬일로 주 상궁이 앞으로 나섰다.
“마마께옵서는 간이 세고 향이 강한 금국의 음식을 드시기 어려워하십니다.”
황제가 제 입맛을 궁금히 여겨 물은 것이 아니었는데. 괜히 더 쓴소리를 들을까 조마조마한 이설이 원망 어린 눈빛으로 주 상궁을 바라봤다. 곁눈질로 눈이 마주친 주 상궁은 걱정 말라는 듯 눈을 무겁게 감았다 떴지만 그걸로 마음이 편해질 리가 없다.
주 상궁 말에 여지없이 빈정댈 거라고 생각했던 황제는 잠잠히 침묵했다. 고요함에 긴장하는 일이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불안함은 여전히 숨통을 죄여 온다. 별말이 없던 황제가 차려진 수라상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 그리고 제 옆에 서 있는 이설을 위아래로 훑어보기를 또 한 번. 그리고 짧게 뱉어지는 한숨에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내섬시에 일러 비은궁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라 전하겠다.”
예상하지 못한 황제의 대답에 놀란 것도 잠깐이다. 비은궁의 사정을 황제에게 고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이까짓 일을 황제에게 낱낱이 청할 수는 없다. 내섬시에서 각 궁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일은 황궁 정사 전체를 보았을 때 아주 미미하고 하찮은 직무이다. 이깟 일에 신경을 써 줄 만큼 황제가 한가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광흥창이며 내섬시며, 비은궁이 앓고 있는 문제는 시일 내로 해결될 것이라고 주 상궁이 확언하였으니 일부러 고할 필요는 없다. 팔 만한 패물도 아직 넉넉하니 걱정할 것 또한 없다. 모두 잘될 거라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이설은 황제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이만 모두 물러가거라.”
찬이 시원찮으니 수라는 태금궁에 가서 들겠다 떠날 줄 알았던 황제가 궁녀들을 모두 물렸다. 다들 한시름 겨우 놨다는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쉬며 자리를 떠났다. 궁녀들이 모두 나가고 나서야 이설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설이 앉고도 한참 뒤에야 황제는 숟가락을 들었다.
황제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한 지 벌써 몇 번째. 이설은 여전히 황제가 어려웠다.
*
황제는 아침잠이 없다. 내관이 깨우러 오는 것을 침상에 앉아 기다리는 게 허다할 정도로 태금궁의 그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새벽잠을 설치기 시작한 후부터는 해가 뜨기도 전에 잠에서 깨는 일도 잦았다. 그렇다 보니 어쩌다 늦잠을 자게 되는 날이면 궁인들은 하나같이 황제의 옥체를 염려했다. 마치 제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겨 아침 일 일어나지 못한 것이라 여기고 옆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이, 황제는 퍽 같잖고 귀찮았다.
평소보다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진 지 나흘째.
황제는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탕약을 빤히 쳐다봤다.
‘기력 증진에 좋은 탕약이라 합니다.’
주름이 깊이 팬 얼굴로 걱정스럽게 말하며 윤 내관이 갖다 놓은 것이다. 제 기력이 노쇠하여 이딴 걸 준비했다는 건가 싶어 한 모금 입에 대지도 않았다. 눈치 빠른 늙은 내관의 한 가지 단점이다.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다.
요 며칠 황제는 늦잠을 잤다. 자리에 누우면 단 한 번 뒤척이는 일 없이 잠에 빠져 아침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깨는 일도 없다. 수면향을 피워도 이렇게까지 단잠에 빠져 본 적이 없었다. 수면향의 부작용인 기침 후 머리앓이나 속이 메스꺼운 기분도 없다. 경쾌한 아침 빗소리에 깨고 난 하루는 늘 상쾌하다. 이러니 제 궁의 궁인들이 노파심에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도 별말 없이 넘어가는 것이다.
반복되는 꿈을 꾸지 않는 것이 단잠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황제는 그 꿈을 꾸지 않는 날에도 이 정도로 상쾌한 아침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굳이 다른 날과의 다른 점을 찾아보자면……,
하루 온종일을 비은궁에서 이설과 보낸다는 것.
그저 그것뿐이다.
이설 덕인지 아니면 비은궁 궁터가 좋은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근래에 황제는 기분이 좋았고, 이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무척 많아졌다는 것이다.
아침 수라를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황제가 밖을 확인했다. 빗줄기가 거세지 않으니 지금쯤 나가면 좋을 것 같다. 사실 날씨의 궂음과 상관없이 황제는 항상 이 시간 때쯤이면 비은궁으로 향했다.
대충 스스로 의복을 정제하고 막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장지문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았으면 숨소리만 듣고도 인상을 대번에 찌푸렸을 텐데 오늘은 제법 반갑기도 한 목소리였다.
“폐하, 비차란입니다. 말씀하신……,”
“들어오라.”
열린 장지문으로 들어오려던 차란이 문 근처에 서 있는 황제를 보고 주춤하고는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한 손에는 비단에 쌓인 작은 함 하나와 다른 한 손에는 천으로 덮은 대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두 손을 번갈아 보던 황제가 상자를 든 손에 턱짓을 했다.
“구해 왔느냐?”
“예. 말씀하신 목탄필입니다.”
차란이 건네주는 물건을 받은 황제가 비단을 풀자 네모난 목각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에 얹은 덮개를 들어내자 중지 손가락 크기쯤 되는 까만 목탄필 여섯 개가 푸른 비단 띠에 각각 반씩 감겨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중 한 개를 집어 들어 유심히 살펴본 황제가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