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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46)화 (46/300)

달의 황홀경

46화

이설의 얼굴로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냉큼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고민 꽤나 하고 있는 모양새다.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나는 약조한 대로 네게 머리카락을 자르라 허락할 것이다. 허나,”

“…….”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겠지. 자른 머리카락이 다시 길어졌을 때에는 내 허락을 구할 수 있는 약조가 더 이상 없을 텐데.”

“…….”

“그래도 너는 지금 내 허락을 바라느냐?”

아무리 황제가 이설을 미련하다 혀를 찬다 한들 이 정도의 말뜻도 못 알아듣는 천치가 아니라는 건 안다. 긴 고민을 해 볼 것도 없이 이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무룩해진 얼굴이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해 실망한 건지는 모르겠다.

약조와 상관없이 이설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라 허락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황제는 은사처럼 부드러운 이설의 머리카락이 제법 마음에 들던 참이다.

“귀하게 여기라 한 적은 없지만 하찮은 곳에 쓰라 한 적도 없는데.”

“…….”

“내가 준 약조 따위가 네게는 겨우 이런 허락이나 받는 데 쓰일 정도로 하찮은 것이었구나.”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굴리던 이설이 목탄필을 꽉 쥐었다. 급하게 적어 내려간 글을 황제에게 밀었다.

[하찮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송구합니다]

휘갈겨 쓴 글씨가 붓으로 썼던 어느 글보다도 엉망진창이다. 종이를 옆으로 휙 밀치자 불안한 시선이 따라온다. 이제는 이런 표정을 좀 그만 볼 때도 됐을 텐데.

“청은 네가 거두었으니 약조는 아직 유효하다. 다음번에는 좀 더 그럴싸한 것을 부탁하는 데에 써 보는 게 어떻겠느냐.”

“…….”

“잘만 생각해 보면 패물 따위를 팔지 않아도 비은궁 곳간을 채울 방법이 생길 텐데 말이다.”

“…….”

“게다가 아랫것들이 녹봉 대신 네 패물을 받을 필요도 없겠지.”

“…….”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 이제라도 내가 알게 되었으니 기뻐해도 모자를 참인데.”

덤덤히 말을 잇는 황제와 달리 이설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숨을 들이켰다. 반응을 보니 일부러 말을 안 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언제쯤에나 말할 생각이었지?”

“…….”

“애초에 말할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냐?”

“…….”

“왜지?”

곧바로 글을 적어 내려가지 않는 걸 보니 변명이라도 생각하고 있나 보다. 언젠가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건가. 망설일 때의 버릇인지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이 초조하다. 당장 이유를 말하라 윽박지를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숨기고 있던 것을 들켰으니 당황하는 마음은 이해하나 망설이는 침묵이 너무 길다. 황제는 이설이 먼저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설에게 황제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나를 의심하였구나.”

“…….”

“이 낡은 궁에 너를 가두고 굶겨 죽이라, 내가 명하였다고 생각하였던 거야.”

“…….”

“그래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게지.”

순식간에 커진 눈이, 벌어진 입이, 핏기가 사라져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목소리를 대신하여 한 가지 대답을 목청껏 소리친다. 솔직한 감정이 드러난 얼굴에 만족한 듯 황제는 더 짙게 미소 지었다.

“고개가 그리 빳빳한 걸 보니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닌 모양이구나.”

더해지는 황제의 미소가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이설은 황제가 덧붙이는 말에 고개를 사정없이 좌우로 흔들었다. 거세게 도리질을 치는 탓에 모가지가 옆으로 휙 꺾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 됐다 말리려는데, 그것만으로는 제 마음을 표현하는 게 모자랐다 싶었는지 이설이 종이 위에 목탄필을 휘갈겨 움직였다.

무슨 글을 쓰는 것인지 궁금하지도 않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설에게 다가갔다. 볼 것도 없이 이설이 쓰고 있던 종이를 휙 가로채 가서는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고 구겨 바닥에 던졌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황제에게 향했다. 가볍게 숨을 털어 낸 황제가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농이었다.”

“…….”

“……설령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의심은 거두거라. 나는 그리 명한 적 없다.”

도리질 치는 고개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얼굴에 퍼진 억울함은 분명히 알아보겠다. 조금 더 몰아붙였다면 눈물이라도 왈칵 쏟아 냈으려나.

“농이였다 했는데 왜 아직도 표정이 그런 것이냐?”

혼이 빠진 얼굴 그대로 이설은 여전히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 있었다. 탁자에 걸터앉은 황제가 이설에게 몸을 돌렸다. 망연히 저를 올려다보기만 하는 눈이 답답스러워 손을 뻗어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그제야 보이는 반응에 황제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황궁 곳곳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쥐새끼들을 색출 중이다. 설마 처소마다 들어가는 음식까지 손을 댔을 줄이야.”

“…….”

“이것은 네 책임이다. 너와 비은궁의 모든 궁인들이 침묵하였기 때문에 내섬시의 부패한 관리들이 정도를 모르고 더 날뛰었던 게지.”

부드럽게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책망이다. 이설은 제 잘못을 통감하듯 반성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이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이설이 제때 고공시에 알리기만 했어도 황궁에 퍼진 썩은 관리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데에 꽤나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럼 차란의 일이 한결 수월했을 것이고 이설은 패물을 파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딴에는 황궁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찌 됐든 일을 더 질질 끌게 만든 것은 이설 본인이다. 눈에 띄지 않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일단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려면 황궁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때에 따라 제 잇속에 맞게 행동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인데 이설에게는 도무지 그런 기민한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황제는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지만 기개 없이 무르고 연약한 자들은 특히 더 좋아하지 않는다. 다소 노골적이고 뻔하더라도 자기 잇속은 스스로 챙길 줄 아는 자만이 황제 옆에서 살아남았다. 그 외에 대부분은 쓸모 있는 자와 쓸모없는 자로 걸러지게 된다.

“제법 쓸모 있는 짓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구나.”

쓸 만한 가치가 없다 걸러진 자들에게 황제는 가차 없이 냉정했다. 이유 없는 인정과 자비는 황제와 어울리지 않는다.

“허나 황궁에서 일어난 일이니 나 또한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지.”

“…….”

“내 불찰이다.”

“…….”

“사과의 뜻으로 줄 것이 있다. 마음이나 풀려무나.”

그리고 오늘, 황제는 처음으로 예외를 만들었다.

*

황제는 모를 것이다. 탁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이설의 왼손이 얼마나 세게 옷자락을 쥐어 잡고 있는지.

이설은 아직 황제가 취하는 행동의 갈피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얼굴에 닿았던 손가락이 만든 홍조가 가라앉기도 전에 목탄필을 내밀기에 어안이 벙벙하던 것도 잠깐. 끝내 들켜 버린 제 궁의 사정 때문에 불안해하며 그 와중에 뭐라 변명을 해야 하나 목이 타들어 갈 정도로 초조했던 게 바로 직전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저를 책망하는 말이 맞았다. 한시라도 빨리 고공시에 알렸어야 했다. 괜한 일로 소란을 피운다 생각하여 스스로 해결하려던 것이 도리어 일을 더 키운 꼴이 되어 버렸다. 하다못해 황제에게라도 직접 사실을 고했어야 했다며 스스로를 탓했다.

사이가 한 뼘쯤 가까워졌다 생각했었는데…. 같잖은 설레발로 이른 아침부터 처마 아래에서 황제를 기다리던 제 모습이 우스워졌다. 이 일로 황제가 또 자신에게 실망하였을 것 같다. 눈을 마주칠 면목도 서지 않아 황제가 하는 말에 죄지은 사람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중 생각지도 않은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불찰이다.”

“…….”

“사과의 뜻으로 줄 것이 있다. 마음이나 풀거라.”

자신에게 한 말이 맞나 싶어 주변을 살피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윤 내관. 가지고 들어오거라.”

황제의 말에 곧장 문이 열리고 윤 내관이 들어왔다. 탁자에 걸터앉은 황제를 보고 잠시 멈칫하고는 그대로 안까지 들어와 탁자 위에 대바구니 하나를 올려다 놓았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된 이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윤 내관과 바구니, 그리고 황제를 번갈아 쳐다봤다. 윤 내관은 다시 종종걸음으로 침소를 나갔다.

탁자에 올려진 대바구니를 황제가 이설에게 가까이 밀었다.

“지난번 동굴에서 네가 두고 간 것이다.”

바구니는 안은 흰 천으로 덮여 있다. 위험한 것이 아닐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면서도 몸에 밴 버릇처럼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천을 들춰 냈다. 반쯤 들어 올렸을 때도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가 천을 완전히 걷고 나서야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새하얀 털에 뒤덮인 작은 몸체가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 올랐다 내려앉기를 반복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면 버리고 간 것이냐?”

묻는 황제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에 돌아온 뒤 몇 번이나 생각이 났던 토끼다. 상처는 거의 치료해 주었으니 더 큰 산짐승에게 해만 당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날들이 이어지며 혹여 먹이라도 구하지 못해 굶어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황제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동안 생각했던 것만큼 수색대가 빨리 자신들을 찾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지는 마음에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토끼이니, 한낱 짐승이라고는 하지만 가끔씩 눈에 아른거린 것도 사실이다.

짧은 시간 동안 정을 줬던 생명이 제게 다시 돌아온 것을 보니 마음에 위안이 된다. 잠든 토끼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 보았다. 손바닥에 닿는 작은 짐승의 몸은 보드랍고 따뜻하다. 입가에 저절로 떠오르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다. 황제가 일부러 제게 주려 가져온 것이라 생각하니 손바닥의 따뜻한 느낌이 온몸에 퍼지는 것처럼 포근해졌다.

웃음 지은 얼굴로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황제는 이제 무표정한 얼굴로 이설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위압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내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풀리며 안도감에 사르르 웃음이 더 짙어지자 황제는 표정이 더 굳었다.

“……됐다. 들은 셈 치지.”

황공하다는 말을 전하려 목탄필을 집으려던 손이 황제에게 붙잡혔다. 손등을 가볍게 감싸는 손이 여느 사내들보다 크고 단단하다. 목탄필을 내려놓은 뒤에도 손등을 덮은 손은 더 머물다가 사라졌다. 황제가 잡았던 손등 위를 다른 제 손으로 덮어 가린 뒤 짧게 숨을 뱉었다. 하마터면 황제의 손목에 있는 이름을 볼 뻔했다.

“황궁에서 위험한 짐승을 키우는 것은 금하고 있지만,”

황제가 바구니 안에 얌전히 잠들어 있는 토끼를 흘끔 들여다봤다.

“……한낱 미물이구나.”

“…….”

“네 궁에 들인 네 것이니 마음대로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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