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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48)화 (48/300)

달의 황홀경

48화

한가로운 오후다. 보통 때의 이설이라면 간단한 군음식으로 끼니를 때워 궁녀들의 애간장을 태운 후 멋쩍은 웃음으로 시선을 돌린 뒤 후원으로 나와 꽃들을 둘러봤을 것이다. 그리고 자비 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볕에 혹시라도 말라 죽은 것은 없는지 세심히 살핀 후 적당한 그늘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을 그런 시간이다.

하지만 며칠 사이의 일상은 달라졌다. 후원으로는 걸음 한 번 내딛기 무섭게 비가 쏟아지고 있고, 덕분에 꽃과 나무가 말라 죽을 걱정은 덜었지만 대신 빗물에 휩쓸려 갈까 다른 근심이 생겼다.

후원도 후원이지만 무엇보다 매일같이 침소를 찾아오는 황제가 있다. 대부분 마주 앉아 차를 마시거나 서책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곤 한다. 할 만한 것이 제한적인 데다가 담소를 나눌 사이도, 그럴 상태도 아니니 달리 그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일상은 하루하루가 거의 똑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어제까지의 이설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어깨를 내리라 하였지 언제 팔을 내리라 하였느냐?”

“…….”

“이래 가지고서야 화살을 던져서 땅에 처박는 것과 뭐가 다르지?”

안간힘을 쓰며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이설의 옆으로 황제가 서 있다. 도무지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좁혀진 미간은 기분을 대신 알린다. 평소 같았으면 황제의 표정을 보며 눈치를 살피느라 노심초사인 이설이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간신히 이 자세를 버티는 것도 점점 힘에 부친다.

점심 수라를 든 후 이설의 침소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황제가 구석에 놓여 있던 활과 화살을 발견한 게 화근이었다. 나덕산에서 이설이 빌려주었던 것을 기연이 챙겨 왔을 것이다. 그냥 버려 두고 왔어도 좋을 것을.

사실 기연을 원망해도 별수 없다. 활을 쏠 줄 아느냐 묻는 황제에게 자신 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것은 이설 자신이었다.

“이런 실력으로 사냥을 하겠다 나덕산에 올랐다니.”

기가 막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황제에게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다. 이쯤 되니 창피해서 얼굴 들기도 어렵다.

“내년에도 사냥 대회에 참가하려거든 차라리 돌을 던져 사냥하거라.”

“…….”

“아니다. 활시위도 당기지 못하는 네가 돌이라고 던질 수 있겠느냐?”

황제의 신랄한 비난이 거칠 것 없이 이어진다. 분명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데 자세는 왜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고 힘만 쭉쭉 빠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혼자 연습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형편없지는 않았는데 황제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긴장감에 주눅이 든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지 쏘는 화살 족족 바닥에 처박아 버리고 있으니 황제도 황제지만 기실 이설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황제 말대로 돌을 던져도 이것보다는 위협적이겠다.

직접 자세를 보여 주려던 황제는 아직 어깨가 다 낫지 않았는지 활시위를 당기려다 말고 인상을 대번에 찌푸리고 이설에게 활을 넘겼다. 아무리 말로 설명을 들어도 막상 들은 대로 자세를 잡고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보다 못한 황제가 갑자기 흑영, 하고 소리치기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자 장지문 앞에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기척도 없이 들어와 서 있었다.

“이리 와서 활 쏘는 자세 좀 잡아 보아라.”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전부 가리고 눈만 내놓았을 뿐인데도 얼굴에 드리워진 당황을 이설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이설과는 달리 토 다는 일 한번 없이 가까이 다가와 이설에게 두 손을 내민다. 온통 굳은살이 박이고 자잘한 상처가 많은 손 위에 활을 넘겨주었다.

이설 옆에 선 흑영이 안정된 자세로 선 뒤 활을 들어 올렸다. 이설이 안간힘을 쓰고서야 겨우 당긴 활시위를 흑영은 가뿐하게 당겨 팽팽히 만들었다. 화살이 날아간다면 과녁 삼아 겨냥한 기둥에 깊숙이 박혔을 것이다.

“어깨는 내리고 팔은 들어 올리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제 좀 알겠느냐?”

이설이라고 저 말뜻을 이제껏 못 알아들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은 게 아니다. 몸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았을 뿐이다. 며칠 동안 몸이 허약해지며 힘이 빠진 건 아닐 거다. 기연이 사냥을 나가며 활시위를 제힘에 맞게 조절해 놓았나 보다. 억울한 마음에 또 일없이 기연을 원망해 본다.

“흑영만큼은 바라지도 않을 테니 활시위만이라도 좀 제대로 당겨 보아라.”

흑영의 완벽한 자세를 가리키며 황제가 한탄스레 질타하자 나란히 선 이설과 흑영이 곁눈질로 서로를 살폈다. 이설도 이설이지만 흑영도 민망하긴 매한가지인지 허공에서 부딪히는 시선의 감정이 서로 비슷했다.

“……폐하, 활시위가 무척 단단하고 팽팽하여 마마께서 힘 있게 당기시기에는 무리인 것 같습니다.”

검은 복막에 막힌 목소리가 너무 낮고 작아서 이설이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것이다. 겨우 제 편이 되어 줄 목소리를 만난 게 반가워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흑영 말에 힘을 실었다.

황제가 흑영에게서 다시 활을 가져가 활시위를 가볍게 몇 번 당겨 봤다. 온전치 않은 어깨일 텐데도 휘어지는 정도는 이설보다 훨씬 크다.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해 보이고 나서야 황제가 이설을 바라봤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에는 조금 전과 다를 게 없다.

“겨우 이 정도 당길 힘도 없다니.”

“무관이 아니고서야 이런 활을 쏘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무관이 아닌 자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무예인데 이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정말 돌을 던지는 것 말고는 제 몸 하나 건사할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

자신은 무관도 아니며 당장 전시 상황에 내몰린 것도 아닌데 왜 제 몸 건사할 방편으로 활 쏘는 것을 배워야 할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흑영도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두 사람 모두 굳이 드러내지는 않고 눈빛만 주고받는 것으로 그쳤다. 황제는 아직 이설의 활을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활시위를 좀 더 느슨하게 풀어 사용하시다가 차츰……,”

소곤거리는 것에 가까울 만큼 작은 목소리가 일순 멈췄다. 당혹감에 흔들렸던 눈은 순식간에 날카로워지고 튕겨 나가듯 흑영의 몸이 재빨리 황제를 가렸다. 곧이어 장지문 밖에서 윤 내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폐하, 비차란 승상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실까요?”

비차란 승상이 누구인지 잠시 떠올리는 이설과 달리 황제는 순식간에 인상을 팍 구겼다. 그래도 표정과는 달리 일갈에 쫓아내지 않고 안으로 들이라 명한다. 장지문이 열리고 눈에 익은 얼굴이 안으로 성큼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황제에게 곧바로 예를 올린 후 이설에게로 몸을 슬쩍 돌렸다.

“신 비차란 루 소의 마마를 뵈옵니다.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와 송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소봉궁에서……,”

숙여진 허리가 다시 꼿꼿이 세어진 다음 순간 차란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갑자기 찾아온 제 등장에 다소 놀란 듯 보이는 이설과 이유 막론하고 심기가 불편한 황제까지가 차란이 예상했던 모습일 거다. 그 사이에 온통 검은 차림으로 오도카니 서 있는 흑영을 응시하는 눈이 의아함에 커졌다. 흑영은 방문객이 차란임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뒤로 물러났다.

“소봉궁에 들른 뒤 퇴궐하겠다더니 여기는 또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차란의 방문 목적이 궁금하여 물은 것은 아닐 것이다. 냉랭한 말투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짜증이 단번에 와닿아서 이설은 괜히 자신이 다 무안스러워졌다. 황제가 저런 목소리로 제게 말을 할 때면 더는 떨어질 곳도 없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하지만 차란은 그게 뭐 대수라는 듯 당황한 얼굴을 금세 지워 내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태자 전하께서 루 소의 마마께 전하라 명하신 것이 있어 가지고 왔습니다.”

말을 마치며 차란은 손에 들고 있던 백자 호리병을 들여 보였다. 그리고 이설을 바라보며 싱긋 웃자 이설도 얼떨결에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궁금해 묻고 싶었던 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인지 대신 묻는다.

“그게 무엇인데.”

“손가(家)에서 담근 하향주입니다. 예년보다 연꽃향이 진하고 술맛이 강하지 않아 따뜻하게 데워 드시면 좋을 것 같다 하시며 마마께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태자가 직접 네게 전했단 말이냐?”

“예.”

황제가 불만에 찬 얼굴로 한쪽 눈썹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폐하께 드릴 하향주는 궁인을 통해 태금궁으로 보내 놓았으니 너무 섭섭히 여기지 마시옵소서.”

“섭섭은 무슨. 헌데 태자가 달랑 하향주 한 병만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태자를 이렇게 버릇없이 가르치지 않았는데 말이야.”

“예, 사실 정성스레 준비하신 서신도 함께 보내시려고 했습니다만……,”

“……내가 함께 있다는 걸 알고 보내지 않았군.”

차란이 일부러 뒷말을 흘리며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황제가 일소 띈 말투로 말을 이었다. 빙그레 웃는 차란은 곤란해 보이는 얼굴이 아니다. 여유로운 미소를 만면에 늘어뜨리며 황제와 눈을 마주했다.

“필시 폐하께서 읽어 보실 거라 생각하셨나 봅니다.”

“내게 서신을 보이느니 차라리 버릇없는 게 낫다 이건가. 기가 막히는군.”

코웃음을 치며 황제가 차란 손에 들린 호리병을 매정하게 가로채 왔다. 입구를 막아 놓은 비단을 풀어 보려는가 싶더니 마음을 바꾼 듯 이설의 앞으로 병을 내밀었다. 얼결에 두 손으로 병을 받아 들며 이설이 고개를 갸웃했다. 손에 들린 술병은 제법 묵직하다.

“태자가 네게 준 것이니 네가 열어 보거라.”

그 말에 병을 한 손에 들어 조심스레 마개를 벗겨 내니 차란의 말대로 진한 연꽃향이 술 냄새와 함께 향긋하게 올라온다. 코끝에 전해지는 향기만 맡아도 얼마나 잘 담가진 술인지 알 수 있다. 하향주는 만들기가 까다롭고 한 번에 많은 양을 만들지 못하는 귀한 술인데 그 좋은 것을 태자에게 받았으니 입가에 미소를 안 지을 수가 없다. 꼬물꼬물 작은 손으로 이 호리병을 내밀었을 태자를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술은 마실 수 있느냐.”

“…….”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술을 마실 수 있느냐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미심쩍은 눈초리로 황제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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