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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58)화 (58/300)

달의 황홀경

58화

황제는 이설의 몸 안에서 졸깃하게 조여드는 손가락을 아쉽게 거뒀다. 취침 전 마시던 술병을 궁인들이 치우지 않고 탁자 위에 두고 떠난 게 생각났다. 향유만은 못해도 맨살을 뚫는 것보다야 나을 터였다.

내내 붙어 있던 몸에서 벗어나 막 침상을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문득 이설이 이상했다. 얼굴은 아직 베개에 파묻은 채로 엎드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시체처럼 꼼짝을 안 한다. 완전히 죽은 사람 같다 생각 들지 않는 건 경련하듯 떨리는 어깨 때문이었다. 움츠린 어깨가 덜덜 떠는 것만 보이지 않았다면 황제는 이설이 혼절이라도 하였나 싶었을 것이다.

“이설아.”

나직한 목소리가 조용히 침전을 울렸다. 머리카락이 옆으로 모두 쏟아져 드러난 목덜미만 보고서도 황제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저곳에 오늘 남긴 흔적들이 빼곡할 터였다.

황제가 불러도 이설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간 황제가 이설의 한 쪽 어깨를 잡아 반쯤 돌려 눕혔다가 이윽고 아연실색하며 손을 놓쳤다. 이설은 힘없이 다시 아래로 떨어지며 옆얼굴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이 걷어지며 드러난 이설의 얼굴은 처참했다. 어둠에 가려진 시야로 들여다봐도 붉게 부어오른 눈두덩은 눈물이 범벅이 되어 축축하게 젖었다. 거기에 땀과 침까지 뒤범벅되니 헝클린 머리카락이 들러붙어 난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설아, 왜…….”

기실 이설을 더 처참한 몰골로 보이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연지 따위가 아니라 이로 짓이겨 부은 붉은 입술 사이로, 입안에 욱여넣은 것은 이설이 입고 있던 침의였다. 얇은 비단 자락이 이설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 없는 고통의 신음을 도로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허망한 얼굴로 이설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망가진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이설이 고갯짓을 거세게 치며 묶인 두 팔을 모아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웅크린 몸 전체가 겁에 질려 덜덜 떨어 대니 비단으로 틀어막고도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흐읍, ……으으…으흐윽…….”

입에 쑤셔 넣은 비단을 이로 악물고 버티면서도 새어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목 상태가 시원치 않아서 그런 건지, 입이 막혀서인지 울음소리는 다른 누구의 것보다 더 애달프게 들렸다.

황제는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서둘러 침상을 내려왔다. 달아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차게 식으며 조금 전까지 이설에게 발정하며 앞뒤 분간 없이 달려들던 스스로를 돌아봤다. 너무 끔찍하고 한심해서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른 후궁들과 밤일을 하며 이렇게까지 사내의 본능에 지배당해 본 적이 없었다. 황제의 방사는 책무일 뿐 그 이상의 것은 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이랴. 한낱 미천한 여인들에게 제 씨를 틔우고 싶지 않아 일부러 수태가 불가능한 날의 후궁만을 골랐고 그마저도 시침 후 황제의 흔적을 모두 뱉어 내게 하는 수모를 겪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전 이설에게 들었던 충동은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너무 비좁고 뻑뻑해서 가능하기나 할까 싶던 곳에 어떻게 하면 제 것을 뿌리 깊이 박아 넣을까만 생각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안에 파정하고 싶어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싫다 반항하는 이를 겁박하고 강제로 범하면서도 색욕에 눈이 멀어 눈앞에 탐해야 할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아직 얼굴을 처박고 울고 있는 이설에게서 등을 돌렸다. 황제가 후궁을 강제로 범한다는 말은 앞뒤가 안 맞는다. 황제의 밤 시중을 드는 것이 후궁의 주된 소임 중 하나이다. 자신은 도리를 행하였고, 잘못은 자신의 책무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설에게 있었다.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황제는 걸음을 뗐다. 어그러진 얼굴의 표정은 당장 누구 하나라도 찢어 죽일 듯 살벌했지만 조금만 들여다봐도 한 겹 너머 당혹감이 선명했다.

침상에서 멀어지기 전 스산한 바람이 침전을 휘감았다. 무심결에 돌아보니 아직 후원으로 향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정사의 흥분으로 올랐던 몸의 열기가 식으며 바람이 서늘하게 전신을 훑어 내렸다. 황제는 몸을 돌려 다시 침상 위를 보았다. 포단 위 납작한 인영의 형체가 아직 그대로다. 어둠에 멀리서 보니 잘게 떨리는 몸짓도 보이지 않아 얼핏 보면 잠이 든 것 같기도, 시체 같기도 했다. 나직한 울음소리 덕에나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황제의 검은 눈동자가 조용히 시체처럼 누워 있는 이설을 응시했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장지문 밖으로 나가려던 걸음을 돌려 황제는 후원 문으로 향했다. 활짝 열린 양 문을 닫으며 밖을 내다보니 조금 전까지도 먹구름 사이로 환했던 보름달이 지금은 구름 너머로 사라져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후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뒤 황제는 침상으로 돌아왔다. 그 위로 올라가는 기척에 이설이 소스라치며 몸을 더 바짝 웅크렸다.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은 비단 때문에 이를 맞물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턱을 닫아 소리를 막으려 애썼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에 황제가 함께 포단을 덮으며 제 옆에 몸을 뉘자 가까이 본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끅끅거리는 소리를 더 이상 막아볼 수도 없는지 묶인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괜찮다.”

“…….”

“소리 내도 괜찮으니 이건 필요 없어.”

손에 묶인 허리끈을 풀며 황제가 달래듯 말했다. 매듭을 풀고도 이설은 두 손으로 입은 막은 채였다. 결박당한 흔적으로 손목에 흐릿한 자국이 남았다. 밝은 곳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선명하고 처참할 흔적일 것이다.

“이리 오거라. …걱정할 것 없어, 이리와. 아프게 하지 않겠다 약조하마.”

이제 제 약조는 이설에게 아무런 신뢰도 주지 못할 테지만 황제는 그래도 이런 뻔한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입을 가린 손등에 손을 겹쳐 천천히 떼어 나자 울먹이는 소리가 좀 더 선연해졌다. 이설이 당황할까 봐 황제는 황급히 이설의 몸에 팔을 둘러 안고 연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울어도 괜찮다. 화내지 않을 테니 겁먹지 말고, 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이 황제를 바라본다. 마주 서서 바라보면 키 차이가 확연해 늘 올려다보는 눈이 이제야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며 입안을 막고 있던 침의 자락을 천천히 꺼내 당겼다. 타액에 축축하게 젖은 비단이 입 밖으로 나오자 서럽게 우는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닦아 준 눈물이 마를 새도 없이 다시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이설의 목 아래로 팔을 넣어 제 품에 끌어당겼다. 한 품에 폭삭 안긴 몸이 겁에 질려 떠는 걸 보는 황제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조용히 하라는 황명에 복종하려 스스로 입을 틀어막는 어리석은 짓은 황제가 칭찬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멍청한 짓을 했다며 혀를 차고도 남을 것이었는데 이설에게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꿈을 꾼 뒤로 정신이 약간 멍해진 건가 싶었지만 그럴 리 없었다. 차라리 달빛에 홀렸다는 게 더 그럴듯할지도.

눈물 흘리는 이설은 보기 딱할 정도로 애처로웠다. 타인의 기분에 무감각한 황제지만 이 모습을 보고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끌어안은 팔에 단단히 힘을 주며 땀에 젖은 이마에 연신 입을 맞췄다.

“나쁜 꿈을 꾸었다 생각해라. 한낱 꿈이었다 생각해.”

“…….”

“내일 아침이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테니 그만 다 잊거라 설아.”

이마에서 코끝까지, 광대에서 턱 아래까지 그리고 볼을 지나 다시 이마까지. 이설의 얼굴 이곳저곳에 황제의 입술이 가볍게 닿으며 지나갔다. 귓가에 속삭이듯 읊조리는 말이 이설에게 닿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섧게 울어 재끼던 이설도 곧 안정을 되찾고 숨소리를 고르게 뱉었다. 황제는 이설이 잠들었다는 것을 안 뒤에도 동이 틀 때까지 한참 동안이나 이설의 마른 등을 토닥토닥 쓸어내려 주었다.

*

몽롱한 정신 한 꺼풀 너머로 지저귀는 새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걷어 올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은 눈은 쉽게 떠지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모두 잊으라 했지만 잊을 수 없었다. 아침이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거라 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간밤의 기억들은 팔과 다리,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끝 그리고 손목, 어깨와 가슴. 이 몸 모든 곳에 아로새겨졌다. 잊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설은 눈뜨지 않은 채로 팔을 멀리 뻗어 보았다. 아무런 기척이 없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것은 자신 하나뿐이다. 눈 떠 확인해 보고 싶지도 않았다. 실망은 아무리 많이 해 봐도 익숙해지지 않아 서글펐다.

어젯밤 황제와의 잠자리를 거부했다. 울며불며, 망가진 목으로 싫다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비참한 꼴을 하고 무릎을 기며 도망을 치기도 했다. 그 천박스러운 꼴을 보였으니 도중에 황제의 흥이 떨어진 것도 알 만했다. 교태 어린 신음은커녕 말 못 하는 짐승처럼 끅끅거리는 사내를 품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황제는 제가 잠들 때까지 다정했다. 겁에 질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몸을 끌어안고,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였는지 모르겠다. 그쯤 이설은 울음을 멈추고 황제에게 빌고 싶었다. 죄송하다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다시 자신을 멀리하지 말아 달라고.

하지만 성치 않은 목으로는 우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혹시라도 황제가 마음이 바뀌어 자신을 다시 범하지는 않을까 덜덜 떨며 숨이 넘어가듯 잠이 들었다.

헤집어진 의복은 다시 정갈히 갈아입혀졌다. 땀에 젖었던 몸이 산뜻한 걸 보니 자는 동안 누군가 들어와 젖은 천으로 몸을 닦아 준 듯했다. 수치스러움에 울음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목 아래로 꿀꺽 삼켰다. 부은 목이 얼얼했다.

눈을 뜰 수가 없어 가만히 누운 채로 얕은 숨만 몰아쉬었다. 침소 밖 복도를 걷는 궁인들의 발소리가 들렸지만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소리가 멀어지면 다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아,

버석하게 마른 입술 사이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이설은 힘겹게 눈을 뜨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셔 또 몇 번이나 눈꺼풀을 깜빡이고 나서야 멀리 창밖을 바라봤다. 활짝 열린 창 너머로 파랗게 갠 하늘이 보인다. 이설은 하얀 구름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다시 눈을 감았다. 이내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방울진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우장절이 끝났다.

비가 그쳤고, 황제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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