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65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얘기를 꺼내는 소운의 태도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혹 나쁜 소식이라도 전할까 긴장하여 낯빛이 일순 어두워진 이설에게 소운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단지 태자 전하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자 찾아왔을 뿐입니다.”
“아…….”
“이미 전해 들으셨겠지만, 태자 전하께서 마마와 만나기를 무척 고대하고 계십니다.”
고대한다라고 말할 정도의 애틋함은 모르겠으나 이전에 황제를 통해 태자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하였다. 고뿔에 걸리면 태자 만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라는 황제 호통을 여러 번 들은 기억도 난다. 황제가 제게 농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아 정말 고뿔에 걸려 태자를 만나게 되지 못할까 걱정스러워 원기를 회복시켜 준다는 끔찍한 맛의 탕약도 억지로 먹는 중이었다.
“우장절이 끝난 뒤로 내내 비은궁에서 기별 오기만을 기다리셨는데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걱정하시기에 제가 직접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설도 우장절이 끝난 뒤 태자에게 전갈이라도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심히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태자와 만나기 위해서는 황제의 허락이 필요했고, 스치면 눈도 마주칠 수 없었던 상황에 물을 수 있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태자가 저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줄 알았더라면 서신 한 장 정도는 써 보냈을 텐데. 지난번 귀한 술을 받은 뒤로 전전긍긍하는 이설에게, 황제는 글 한 귀도 없이 술만 덜렁 보내는 태자가 괘씸하니 절대 답신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영 이해가 가지 않는 명이었지만 이설은 황제의 말이라면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모두 따르는 편이었다.
“제가 진작 기별을 드렸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존체 평온하십니까?”
“예. 무탈히 우장절을 보내셨습니다.”
“다행이네요.”
“전하께서는 마마께서만 허락하신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비은궁에 납실 모양이십니다.”
“저야 괜찮습니다만, 전하께서 이곳까지 걸음 하시다니 당치 않으십니다. 기별 넣은 뒤 제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태자의 궁은 거리가 꽤 멀다. 다 큰 어른의 걸음으로도 먼 거리를, 태자의 짤막한 두 다리로 오가게 하는 수고를 끼칠 수는 없다. 태자가 만나고 싶다면 후궁 된 신분으로 만나 뵈러 직접 찾아가는 게 도리다.
“전하께서는 이곳 비은궁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후원에 꺾인 나뭇가지를 심어 둔 것에 꽃이 피었는지도 궁금하다 하셨고요.”
그 꽃나무라면 우장절 비바람에 뽑혀 어디 멀리 날아가고 없을 텐데.
어색하게 웃는 이설을 보며 소운은 긍정의 의미라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태자 전하께 말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치며 소운이 찻잔을 들었다. 소매가 스르륵 걷어지며 그 안 손목에 붉게 난 상처에 눈길이 닿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얼핏 봐도 흉터가 크게 진 것이니 상처가 생겼을 때의 기억이 좋지 못할 것 같았다.
이설이 괜히 시선을 멀리 돌리며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자 소운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지난번에는 정신이 없어 궁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오늘에서야 보니 무척 아름답습니다.”
“아직 손볼 곳이 많습니다. 정리가 끝나면 그때 한 번 더 찾아와 주세요. 그때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 테니까요.”
인사치레로 하는 말에 너무 사심을 담아 답했을까. 황제를 제하고는 찾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는 궁에 들른 첫손님이 남기는 칭찬에 마음이 조금 들떴다. 괜한 말은 한 것 같아 큼큼, 헛기침을 하고 다른 화제로 옮기려고 했지만 막상 소운에게 꺼낼 만한 이야기가 없었다. 태자의 소식이라도 이것저것 알려 주면 좋을 텐데, 소운은 말없이 차만 음미했다.
찰나였기는 하나 침묵으로 두 사람이 보내기에는 긴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짧은 한숨과 함께 괜히 쓴웃음으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 담소를 나누기에는 좋은 상대가 아닙니다. 혹 제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거라면 저는 개의치 않으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셔도 괜찮습니다.”
금국에서는 윗사람과 차를 마실 때 상대가 차를 모두 비우기 전까지 아랫사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결례라고 들었다. 황궁의 법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소운이기에, 이설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야말로 말주변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불편하시거든 마마께서 제게 이만 일어나라 명하시면 됩니다.”
고민하는 기색 없이 떨어지는 대답에 이설이 낮게 웃었다. 고지식한 학자가 할 법한 대답이었다. 융통성 없이 딱딱하게 구는 면모가 불편스러울 만한데도 이설은 난감함에 그저 손등만 슬쩍 긁을 뿐, 소운에게 먼저 자리에 일어나라 명하지는 않았다.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누군가와 함께 차를 마신다는 평온함이 좋다. 황제와 둘이 차를 마실 때는 항상 긴장했었고, 궁인들과 차를 마실 때면 항상 시끌벅적 활기가 넘쳐 가끔은 정신이 없었다.
객청에서 앞뜰을 보며 차를 마시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 무척 새롭다. 이곳에서 도월소를 내다보니 밖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풍경으로 눈에 들어온다. 너무 쑥스러워 입 밖으로는 절대 꺼내지 않겠지만, 이설은 제 궁이 무척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우장절이 끝났으니 폐하께서 정무에 바빠 마마께서도 황궁 생활이 무척 지루하시겠습니다.”
불쑥 황제의 얘기를 꺼내는 소운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폐하는 역시 정무에 바쁘신가 보구나. 그동안 황제가 찾아오지 않았던 이유를 애써 찾을 때 가장 무게를 실었던 것이었다. 우장절이 끝나면 한동안 바빠질 거라고 언질 주었던 황제가 제게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좀 그렇지만, 점차 익숙해지겠지요.”
황제는 제 것이 아니다. 이따금 다정해지는 황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궁을 태금궁처럼 드나들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가 오는 날보다 오지 않는 날이 더 많을 테고, 황제가 오지 않는 날에 이설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마 혼자일 것이다.
나는 이전의 그날들이 지루하였을까.
지루하였던 적도 분명 있을 테지만, 대부분은 그저 슬프고 애통했다. 황제가 없는 날 대부분은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기다리느라 서글픈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똑같은 날이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기다림이 설렘으로, 지루함은 일상의 안정감으로 점차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폐하께서는 우장절이 끝날 때마다 항상 이렇게 정무가 바쁘신가 봅니다.”
“끊겼던 상소들이 한꺼번에 올라오다 보니 그런 편입니다. 특히나 올해는 민가에서 성행하는 그 일도 있고 하니…….”
“민가의 그 일이라니, 무엇 말입니까?”
단조롭고 평화롭던 소운의 얼굴에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당혹스러움을 먼저 봤더라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이미 말은 내뱉어졌고, 소운은 잠시 멈춰 대답을 생각했다. 굳이 대답할 필요 없다 말하려 했으나 소운이 더 빨랐다.
“요즘 민가에서 이름을 억지로 새겨 주거나 지워 주는 시술이 성행한다 합니다.”
“이름을……, 억지로 새기거나 지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 헌데 그 방법이 너무 위험하고 잔인하여 벌써 사람이 여럿 죽어 나갔다 하니 황궁에서도 이제 가만히 지켜만 볼 수만은 없는 모양입니다.”
얘기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 티가 역력하지만 애써 숨기는 티도 내지 않으며 소운이 평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찻잔을 감싸던 손은 어느새 탁상 아래로 내려갔다. 팔의 움직임으로 보아 아마 손목 어딘가를 문지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황제가 자주 하는 버릇이라 잘 알고 있다.
“이름을 억지로 새기거나 지우는 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뭐 일단은……, 그렇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술 중에 이미 여러 사람이 죽은 걸 알면서도 누가 그런 짓을…….”
“누군가의 이름을 새기고, 지우는 것이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사람도 있을 테지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지우거나, 새겨야 하는 이름이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모두 각자 나름의 사정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비슷한 또래라고 짐작했지만 소운이 하는 생각의 깊이는 훨씬 깊다. 살아 보지 않은 남의 인생이다. 목숨의 무게와 가치관, 소중한 사람에게 부여하는 의미는 모두 남다를 것이다. 천명을 거스르는 대가로 설사 목숨을 잃는다 해도 부여잡고 싶은 운명이 있을 수 있다.
제 편협한 사고방식을 스스로 질타하며 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조금 전보다 더 차분해진 소운의 표정이 신경 쓰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쌌지만 이내 당과 맛이 좋다는 소운의 말을 시작으로 다시 담소가 오고 갔다. 말주변이 없다는 겸손과는 달리 소운은 아는 것이 많고 뭐든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법을 알았다. 이설이 무엇을 물어보든 한심해하는 기색 없이 하나부터 열까지 어린아이 가르치듯 모두 알려 주었다.
이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금국인들의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쯤이었다. 문밖 너머 인기척이 들렸다. 발걸음 소리가 조심스럽지 못한 걸 보니 단향이다.
“마마, 승상 비차란 영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승상 비차란이 왜……. 순간 황제께 무슨 변고라도 생기셨나 불안감이 엄습했으나 쓸데없는 기우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때 별안간 챙, 하는 찻잔 부딪히는 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하니 찻잔을 놓친 소운이 굳은 표정으로 죄송하다 거듭 사과했다.
“승상께서 기별도 없이 직접 찾아오시다니 어지간히 급한 사안인가 봅니다. 마마께서 제게 이만 물러나라 명하시길 청하여도 괜찮겠습니까?”
아직 반이 넘게 남아 있는 이설의 찻잔을 확인 후 소운이 요청했다. 내내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궁에 갑자기 손님이 한꺼번에 찾아와 곤란하게 됐다.
머뭇거리던 이설이 소운에게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도 좋다 명한 뒤 차란을 안으로 불렀다. 양방으로 활짝 열리는 문밖에 서 있던 차란이 문지방을 한 걸음 넘어서며 자리서 막 일어나던 소운과 눈이 마주쳤다. 차란은 가볍게 묵례 하였지만 소운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이설에게만 허리 숙였다.
“그럼 시일 내에 태자 전하와 함께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