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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70)화 (70/300)

달의 황홀경

70화

“이제야 알겠군.”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황제는 이설이 아닌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빛에 드리운 감정을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는 확실히 아니었다.

정말 궁에서 소란을 피워 심기가 불편해지신 걸까. 그런 것 치고는 저를 이곳까지 데려와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게 하였으니 황제의 마음은 알 길이 없다. 차라리 저를 꾸짖기라도 하신다면 하찮은 변명이라도 해 볼 텐데, 황제는 다른 말없이 가만히 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이 없어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얼른 궁에 돌아가 삼설이 상처도 봐 줘야 하는데 마음은 자꾸만 황제 옆에 남아 있으라고 한다.

“그만 궁으로 돌아가도 좋다.”

덩달아 황제 앞에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이설에게 황제가 먼저 말했다. 이제 그만 이 금원에서 나가라 명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말 그대로 궁으로 돌아가도 좋다 너그러이 배려해 준 것이었을까. 잠시 고민하던 이설이 대답 없이 황제를 지나쳐 걸었다. 먼 곳만 바라보던 황제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이설의 뒷모습을 좇았다.

“밖에 있는 내 궁인들에게 부탁하네.”

금원으로 나오기 전 입구에 서 있는 황제의 궁인들에게 삼설이를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피투성이의 작은 토끼를 보고도 놀란 기색 없는 어느 궁녀가 허리를 깊게 숙이고는 종종걸음으로 뒤돌아 멀리 사라졌다.

삼설이 걱정을 한 칸 뒤로 미룬 이설이 다시 황제에게로 돌아왔다.

“후원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난데없는 말을 건네는 이설에게 황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무시하는 기색은 없이 이설에게 시선을 돌렸다. 빤히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할 말이 있으면 어디 더 해 보라는 듯하여 이설이 가벼이 웃었다.

“제 궁의 후원이라면 황궁의 어느 후원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었는데…….”

민망함에 웃는 얼굴로 손으로 가리려다 피 얼룩이 진 것을 알아챘다. 슬그머니 아래로 손을 내리며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이곳을 와 보지 못했으니 그리 자신만만했었나 봅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아무렇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직 다 가꾸지는 못한 후원이지만, 이설은 제 손으로 가꾼 제 궁의 후원이 제법 아름답다 생각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사실 속으로는 스스로 만든 전경에 늘 뿌듯함을 가지기도 했다. 이 황궁에서 제 궁의 후원만큼 자신을 감탄할 수 있게 만드는 곳은 없을 거라고.

그런데 이제 보니 황제의 후원이 있었다. 마치 숲 전체를 이 안으로 옮겨 놓은 듯 소야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에 심어 놓은 꽃들도 모두 형형색색의 탐스러운 것들이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거의 없다는 것만 빼고는 이설의 눈에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후원이었다.

“앞으로는 제 궁의 후원에도……, 폐하?”

제 궁의 후원에도 여러 꽃 종류를 심어야겠다는 다부진 포부를 알리려던 참이었다. 미처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황제에게 손이 붙들렸다. 놀랄 새도 없이 끌려간 몸이 황제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 근처에 있던 작게 만들어진 연못에 이르렀다.

“우선 손부터 씻거라.”

붙잡은 손을 놓아주며 황제가 말했다. 피투성이가 된 손이 내내 신경이 쓰였던 건지, 손 아래로 내려간 시선이 매우 언짢아 보여 이설이 군말 없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물에 손을 담갔다.

“어찌 이 몸은 다치지 않고 성하게 버티는 날이 하루도 없는지.”

“…….”

“이쯤 되면 네 몸에게 사과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냐.”

“……제가 흘린 피가 아닙니다.”

피 얼룩을 지워 낸 손에 물기를 탈탈 털며 이설이 변명하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황제는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기로 한 건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시무룩해진 얼굴로 다시 황제 앞에 선 이설이 젖은 손을 옷자락에 닦으려다가 황제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래서 평소 버릇이 중요하다. 후원을 정리하다 손에 젖은 흙이 묻으면 입고 있는 의복에 바로 닦아 버리는 좋지 못한 습관이 있었다. 덕분에 어린 궁녀들은 물론 주 상궁에게까지 가끔씩 한 소리를 듣곤 했다.

“다리를 다쳤잖느냐.”

“……제가, 말입니까?”

도리어 제가 다쳤냐고 되묻는 이설에게 할 말을 잃은 듯 황제가 헛웃음을 뱉었다.

“더 이상 놀랍지도 않으니 됐다, 그만하거라.”

“…….”

“이쪽으로 와.”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황제가 손을 휘저으며 얘기를 끝냈다. 허공을 저은 손이 그대로 이설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잡으라고 건네주신 걸까. 잡아도 되는 걸까. 갈팡질팡하는 이설에게 황제의 손이 더 가까이 들어왔다.

“손이 젖어 폐하의 용포가 상할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황제의 배려를 완곡히 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황제 쪽에서 그 거절을 받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내가 너를 둘러업고 저기까지 가는 것보다야 내 용포가 조금 젖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

“…….”

“내 팔을 얼마나 더 민망하게 할 생각이냐, 설아.”

설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이설은 냉큼 황제의 팔꿈치 아래를 덥석 붙잡았다. 옷자락만 겨우 붙잡은 것을, 황제가 손을 끌어당겨 팔목 어딘가쯤 이설이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는 곳에 위치를 옮겼다. 맨 손등에 황제의 손바닥이 닿아서인지, 아니면 황제가 저를 또 설아, 하고 불러 줘서인지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황제에게 그렇게 말을 듣고 난 탓인지, 정말 걸을 때마다 오른쪽 발목이 뻐근한 것이 느껴졌다. 한참 전 뒷걸음을 치다 넘어졌을 때 다쳤던 것일 수도 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니 한 며칠 조금 불편하고 말 것이다. 것보다 정말 황제의 말대로 근래 들어 제 몸이 아픈 곳 하나 없이 성했던 날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늘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하거나. 살면서 이렇게 몸이 꾸준히 아팠던 것도 처음이었다. 비은궁의 궁인들에게 말한다면 모두들 코웃음을 치겠지만.

“앉거라.”

근처 수풀을 걷어내니 작은 정자 하나가 있었다. 지붕이 무척 낮아서 수풀 반대편에서는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던 오래된 정자였다.

“앉아 쉬라 하였다.”

정자 앞까지 데려온 이설을 억지로 앉히며 황제가 말했다. 자리에 엉거주춤 앉아 있던 이설이 그 옆에 서 있는 황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폐하께서도 함께 앉으시는 게…….”

흘리는 말끝에는 황제의 대답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함께’라는 말은 하지 말걸 그랬나. 적절하지 못한 단어의 선택이 다소 후회가 되던 찰나. 황제가 옆자리에 나란히 앉으며 어깨가 닿았다. 반대편으로 자리가 충분히 많이 남았지만 굳이 몸을 옮겨 황제와의 사이에 거리를 만들지는 않았다. 황제의 반대편에도 이미 넓은 자리가 있었다.

말없이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를 미풍이 스치고 지나갔다. 풀잎 흔들리는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지다 이내 사그라들고, 다시 울려 퍼지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 그 사이사이마다 새가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 연못에 잉어들이 튀어 오르는 소리가 빈 적막을 채웠다.

늦은 오후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간 존체 평안히 두루 강녕하셨습니까?”

“……방금 뭐라 하였느냐?”

“존체 평안히 두루 강녕하셨는지를 여쭈어보았습니다만…….”

평범한 안부 인사였을 뿐인데 되묻는 황제의 태도가 다소 사나웠다. 그 기세에 눌린 이설이 주춤거리며 대답했지만 미간에 접힌 인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정녕 내 강녕이 궁금했다면 진작 찾아와 묻지 그랬느냐?”

“예?”

천성도 그러하거니와 황제의 앞에서라면 더욱더 태도를 조심히 하려고 애쓰던 이설이었는데, 난데없는 황제의 말에 제 감정이 얼굴과 목소리에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당황함에 놀라 커진 눈동자는 물론 커진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전 같았으면 저를 위협하는 태도라고 여겨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을 이설이었지만, 이번에는 긴 심호흡으로 침착함을 되찾았다.

“폐하께서 기다리라 하셨기에 내내 기다렸습니다.”

“…….”

“제가 먼저 찾아뵈어도 되는 줄 알았으면 일찍이 찾아뵀을 텐데, 송구합니다.”

한 치의 거짓말도 없었고, 황제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다급히 하는 변명도 아니었다. 황제가 얌전히 저를 기다리라고 하기에 의심 없이 기다렸다. 먼저 찾아와도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없기에 일부러 찾아가 본 적도 없다. 간혹 궁인들은 담장 앞에서 목이 빠져라 황제를 기다리고 있는 이설을 답답해하며 황제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이 어디인지를 알려 주려고 했지만 귀담아들어 본 적도 없었다.

오신다 하셨으니 곧 오시겠지.

차라리 먼저 태금궁으로 찾아가 보시는 게 어떠냐며 기연이 물었을 때 이설이 해 주었던 대답이었다. 그때 이설은 담장의 파산호를 살피는 척했지만 사실은 황제가 오고 있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밖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어쨌든 이설이 먼저 황제를 찾아가지 않았던 것은 황제가 기다리라 명하였기 때문이며, 동시에 자신이 황제를 직접 찾아뵈러 가도 될 만한 처지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자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황제와의 관계는 아직 어려웠다.

“곧 찾아오신다고 하셨기에 정말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어째 나를 원망하는 소리처럼 들리는구나.”

“…….”

“오늘은 또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느냐? 전처럼 원망하지 않는다 냉큼 대답하지 않고.”

황제를 다시 만나도 그 관계는 변함없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함께 있어도 너무 멀리 있는 고귀한 분이라서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절대 가까워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황궁을 떠나는 그 날까지도 황제와의 간격은 이 이상 좁힐 수 없을 줄 알았다.

“어서 대답하지 않고 뭘 그리 빤히 보고만 있느냐?”

정말 그럴 줄 알았는데.

“진정 나를 원망하였느냐?”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묻는 황제에게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가 없었다. 입꼬리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단 한 순간도 폐하를 원망한 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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