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73)화 (73/300)

달의 황홀경

73화

“황족 서고라 하면 무슨 대단한 서책이라도 숨겨 놓은 줄 아는데.”

책장과 책장 사이 넓지 않은 공간에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함께 지난번 태금궁의 긴 복도를 지날 때 맡았던 향초 냄새가 났다.

“이런 쓸모없는 게 반이지.”

이설에게 건네준 서책의 표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손에 들린 서책의 표지를 확인한 이설은 겸연쩍게 웃으며 제자리에 서책을 다시 꽂았다. 살이 빨리 찌는 방법을 글로 엮은 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으며, 그것을 제 손에 들려 준 황제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둘러보기에 오래 걸릴 만큼 큰 서고는 아니지만 꽂힌 서책들은 대부분 허투루 지나칠 게 없을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다. 쓸모없는 게 반이라던 황제의 말을 믿지 않기를 잘했다.

“땅에 호미질이나 할 만큼 혼자 보내는 시간이 따분하거든 가끔씩 들러 서책이라도 보거라.”

“말씀드렸지만, 흙에 박힌 돌을 고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오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그런 뜻으로 드리는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혹여 황제가 말을 번복이라도 할까 봐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이설이 꼬리를 내렸다. 전전긍긍하는 이설의 모습을 보며 황제가 입꼬리를 올린 채 등을 돌렸다. 쭈뼛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이설도 이내 한 품 가득 서책을 골라 안았다.

*

그 뒤로 이설은 종종 황제의 서고를 찾았다. 금원에 처음 발을 들였던 이후 황제는 며칠 동안은 종종 비은궁으로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며칠 전 회국과의 군사 경계선에 주둔 중이던 경비 수십 명이 하룻밤 사이에 목이 날아간 시체로 발견된 사건 이후로 다시 걸음이 뜸해졌다. 이른 아침 태금궁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길에 들러 서로 얼굴만 잠깐 보는 게 다였다.

화초를 가꾸는 일은 이제 이설의 감독이 없어도 아이들이 알아서 척척 잘하니 궁에 있어도 할 일이 없다. 자수 놓는 일은 진작 관뒀고 가끔씩 그림을 그리기는 하지만 실력이 늘지 않으니 흥미도 생기지 않는다. 역시 종이 냄새 그득한 서고에서 조용히 서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마마, 찾으시던 서책입니다.”

“고맙네. 항상 내가 찾을 때는 보이지도 않는 것이, 자네가 찾으면 이리 금방 찾는단 말이야.”

“마마께서는 저기 맨 위에 있는 선반까지는 눈이 닿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지요.”

며칠 새 자주 들러 친해진 서고 관리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농을 쳤다. 그렇지 않다 당장에라도 반박을 하려던 이설이 끝내 입을 떼지 못하고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건네받을 서책을 펼쳤다.

“그런데 마마, 매일 이곳에 오는 것이 지겹지 않으십니까?”

이설이 다 읽고 한쪽에 쌓아 둔 서책들을 정리하며 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제가 총애한다 소문이 자자한 후궁이라 처음에는 말을 붙이는 것도 섬뜩했는데 지금은 곧잘 농도 걸 수 있게 됐다. 그래도 혹여 말실수라도 하여 심기를 언짢게 할까 말을 걸 때는 조심을 하는 편이었다.

이설은 눈치를 살피는 관리의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자네야말로 내가 매일 찾아오는 게 성가시지 않은가?”

“성가시다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혼자 적적하던 차에 아주 잘됐지요. 요즘은 태감께서도 영 찾아와 주시질 않으니 말입니다.”

“아, 태감께서도 이 서고에 출입을 허락받으셨다 들었네.”

처음 이곳에 오던 날 황제가 그리 말했다. 소운의 개인 서고라 불리어도 할 말이 없는 곳이라고. 황궁의 일반 서고만 해도 그중에 읽지 않은 서책이 없다고 들은 소운이었는데, 이 서고의 있는 책들도 그러했을까.

“예, 폐하가 즉위하신 해부터 태감께서도 이 서고를 밤낮없이 찾아오셨지요. 모르긴 몰라도 저보다 여기 있는 서책을 더 많이 읽으셨을 겁니다.”

그럴 줄 알았다. 금국에 와서 저보다 서책을 더 좋아하고 더 많이 읽은 사람은 소운이 처음이었다. 무엇을 물어도 모르는 것이 없고 필요한 지식은 어느 서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지도 막힘없이 알려 주었다. 과연 그 어린 나이에 태자의 스승을 할 만하였다.

“근데 뭐, 그리 박학다식하시고 가문이 대단하시면 뭘 합니까. 태자 전하의 스승을 자처하셨다고 하니, 앞으로 출셋길은 끝났다고 보셔야지요.”

마치 제 출셋길이 막히기라도 한 듯 관리가 한숨을 길게 내시며 탄식했다. 의미를 알아들은 이설은 맞장구치지 않고 서책 끝 모서리만 가만히 응시했다.

황태자의 관리, 교육을 담당했던 태감은 태자가 황제로 즉위한 후에는 다른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 명을 달리하는 날까지 모든 부와 명예를 다 누릴 수 있지만 가질 수 있는 권력에는 제한이 있다. 제 손으로 훈육을 도맡아 한 황제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위함이었으며, 자칫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도 있는 기회를 막기 위해서였다.

근래 들어 기분 좋은 날들이 이어지며 잊고 있던 손조익의 존재가 상기되었던 것도, 소운의 이런 처지를 듣게 되면서였다. 선황이 태자였던 시절부터 훈육을 도맡아 했다던 태감 손조익은 스스로 더 높은 관직에 나갈 수 없는 대신 제 딸을 황궁으로 들여보내며 권력으로 향하는 다른 길을 꿈꿨다. 선황과 그의 황후인 제 딸이 너무 이른 나이에 명을 달리하여 계획이 틀어진 것만 아니었다면 황궁의 판도가 지금과는 무척 달랐을 수도 있다고, 단향에게 그리 들었다.

이따금 알현을 요청하던 손조익의 서신은 더 이상 없다. 언제쯤 끊겼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굳이 신경을 써야 할 만큼 중차대한 사안이 아니었다. 오늘은 황제가 오시려나, 하는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바빴다.

“그러니 여태껏 들어오는 혼처 하나 없으시고 혼기 꽉……, 아이고 제가 무슨 경망스러운 소리를! 송구합니다, 마마. 미천한 놈이 주제를 모르고 지껄인 헛소리였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무 소리 않고 제 말을 들어주는 이설에게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관리가 그제야 도를 넘은 제 말을 깨닫고 허리를 급히 숙여 사과했다. 관리가 품에 안고 있던 서책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표정 없이 관리를 쳐다보던 이설이 자리에서 일어나 떨어진 책을 주워 들기 시작하자 관리도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이설을 도와 서책을 주워 들었다.

“죽을죄를 지었을 것까지야.”

“…송구하옵……,”

“하지만 주제를 모르는 헛소리였던 것은 맞아.”

“…….”

“다음부터는 조심하게.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는 황궁이잖은가. 듣는 이가 많아.”

이설이 제 한쪽 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새 사색이 된 관리는 다시 한번 깊게 허리를 숙이며 사과하고는,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시라 말한 뒤 구석진 제 자리로 돌아가서 이설이 부르기 전까지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서고에는 창이 없다. 아마 서책을 장기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햇빛을 모두 막기 위해서였을 거다. 그래서 서고에만 있으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해가 중천에서 조금 기울어졌을 때쯤 궁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해가 기울어 나덕산 봉우리에 끄트머리가 걸릴 때쯤 돌아갔고, 지금은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아쉬움에 책장을 덮었다. 그나마 이 시간도, 비은궁에서 참다 참다 연화나 단향이 이설을 데리러 왔을 때야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어제는 달이 휘영청 밝고 별이 촘촘하던 한밤중이 되어서야 궁으로 돌아갔다. 진작부터 이설을 데리러 나온 연화는 서고까지 들어올 수가 없어 마당 한쪽에서 언제쯤에나 이설이 나오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리던 중 관리가 가져다준 연서집에 정신을 홀랑 빼앗겼다.

준비해 온 석반을 먹은 뒤로도 한참이 지난 것 같다. 담 너머 궁인들의 발소리나 말소리가 잠잠해진 것을 보니 벌써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모양이다. 보통은 해가 질 때쯤, 지고 나서, 날이 캄캄해질 즈음마다 관리가 와서 시간을 알려 주는데 오늘은 제 경거망동에 몸을 사리느라 멀리 숨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연화나 기연이 저를 데리러 오지도 않은 것 같아 이설은 새로 한 권의 첫 장을 펼쳤다. 이것만 다 보면 미련 없이 궁으로 돌아가야지, 스스로 다짐하며 다시 서책 내용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채 반도 다 읽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간간이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던 서고에 부산한 소음이 밀려들어 오듯 커졌다. 담 너머로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더니 이윽고 잠잠해졌다. 글을 읽다 말고 그 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이던 이설은 서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멀리 책장과 책장 사이 어둠 속에서 누군가 등불도 들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놀란 이설이 누구냐 물으려던 찰나, 관리가 아니고서야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을 기억해 냈다.

“도대체 이 시간까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탁자 위에 놓았던 등불이 비추는 거리까지 가까워진 황제가 이설을 보자마자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애써 고성을 내지 않으려고 화를 누른 낮은 목소리가 더 무서웠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무표정 위로 반쯤 덮인 그림자 음영이 이 순간의 분위기를 더 섬뜩하게 고조시켰다.

“서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모르지만 제게 그 화를 다 뱉어 내지 않기 위해 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황제의 기분이나 배려도 모르고 무작정 겁을 먹고 싶지 않다. 다만 이설의 동요 없는 침착한 대답에 황제가 하, 하고 웃음을 뱉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여기서 서책을 읽고 있었다고?”

“예.”

“달이 중천이고, 여기서 네 궁까지는 걸어 한참인데. 언제쯤에나 돌아갈 생각이었느냐? 그 길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고?”

“호위 무사가 데리러 오면 곧바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밤은 깊었지만 이곳은 황궁이니 그리 위험할 것…….”

“그리 위험할 것 같지 않은 황궁에서 대낮에 짐승에게 쫓겼느냐?”

정곡을 찔린 이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탁자 아래로 모은 두 손만 꼼지락거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