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81화
드물게 이설이 단호한 태도로 말하는 것을 보고도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생각이야.”
“…….”
“모처럼 둘이 있을 수 있는 긴 시간에 서책 따위에 너를 뺏길 수는 없지.”
황제는 아직 잡고 있던 이설의 어깨를 부드럽게 당겼다. 이설이 힘없이 끌려와 황제의 품에 안겼다.
“다 읽지도 않은 서책이 불타는 꼴 보고 싶지 않거든 오늘 독서는 거기까지만 하거라.”
“…….”
“대답하지 않아도 서책을 모두 불태우겠다.”
“오늘은 더 이상 서책을 읽지 않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황제는 내내 숨기느라 애쓰던 웃음을 이제야 밖으로 드러냈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입술이 이설의 머리 꼭대기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이설은 그게 황제의 입술이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침소로 돌아온 황제가 이설에게 작은 비단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주기로 약속했으니 주는 거지만 주는 게 영 내키지는 않는다, 라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라서 받아도 될지 한참을 고민했다.
상자에는 비단 머리끈이 들어 있었다. 특히 색이 마음에 든다며 무척 좋아하는 제 모습을 보고 어쩐지 황제가 기분 나빠하는 것 같아 적당히 좋은 티를 내다 그만두었다.
아침부터 치렁하게 풀어낸 머리를 묶어 바로 사용하려다가 아직 긴 머리를 혼자 묶는 게 익숙하지 않아 들어 있던 상자에 다시 담아 문갑 안에 잘 넣어 두었다.
이설이 조심스럽게 문갑 안에 상자를 넣어 두는 것을 보며 황제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비 승상과는 요즘도 자주 만나느냐?”
“차란 님 말씀이십니까?”
“차란 님은 무슨. 일개 상단 집안 내놓은 자식에게 그리 공손할 필요 없다.”
황제는 차란의 얘기만 나왔다 하면 미간부터 찌푸리고 본다. 차란이라고 별로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차란도 황제의 얘기를 꺼낼 때며 일단 한숨부터 길게 내쉬고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그리 자주 찾아오는 편이 아니셨는데 근래에는 가끔씩 들리시기도 합니다.”
“그래?”
“예. 학운관에 가지 않은 이후부터는 꽤 자주 찾아오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차란은 좋은 사람이다. 연국에서 황제를 처음 만났던 날 봤던 첫인상과는 달리 사람 자체가 서글서글하고 붙임성이 좋아 낯을 가리는 이설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대화를 이어 나가는 솜씨가 좋았다.
승상으로서 능력도 좋아 황제가 즉위하고 난 뒤 큰 도움이 됐다고, 주 상궁조차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인재를, 황제는 왜 이렇게 늘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별 내용도 없었던 이설의 말을 듣자마자 황제가 보란 듯이 인상을 썼다.
“그전에는 소운이 비은궁을 자주 찾았었고?”
“예. 그런 편이었습니다.”
“……한심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예?”
“됐다, 신경 쓸 것 없어. 앞으로 두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거라. 한심한 것도 병이야. 옮을까 걱정이다.”
신랄하게 혀를 차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알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황제와 차란, 소운 그리고 황제의 최측근 호위 무사인 흑영 네 사람이 어릴 적부터 친우 사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 목숨을 맡기는 흑영은 물론, 늘상 핍박하고 무시하는 차란도 사실 황제가 제 최측근인 승상 자리에 직접 앉혔다는 사실에서 이미 무척 신뢰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소운 역시, 태자의 학문과 훈육을 도맡는 태감이다. 어지간히 신뢰하는 자가 아니고서야 그런 중요한 자리를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두 사람에게 신랄하다. 소운에게는 그 정도가 조금 덜한 것 같았는데 오늘 이렇게 대놓고 한심한 것도 병이라며 친하게 지내지 말라 엄포를 놓는 걸 보니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던 것 같다.
“네 분께서는 어렸을 적부터 친우이셨던 게 맞으시지요?”
“흑영은 좀 늦게 만난 편이었지. 선 황후가 입궁하며 데려왔으니까.”
“사이가 무척 각별하시겠습니다.”
“그래 보이더냐?”
심술궂게 웃어 보이며 묻는 황제에게 그래 보인다, 하고 대답하지 못했다. 어색하게 마주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뭣 모르던 어렸을 적에야 각별했을지도 모르지.”
옛날 생각에 잠긴 듯 황제가 씁쓸하게 웃는 입가를 문지르며 혼잣말했다. 그 의미가 궁금하긴 했지만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렸다.
“태자 전하께서 폐하와 함께 사냥 가시는 날을 학수고대하고 계십니다.”
이설이 뜬금없이 태자의 근황을 전했다. 대화의 흐름상 태자의 얘기가 튀어나올 만한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기에, 황제가 의아해하며 이설을 쳐다봤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는 이설을 보고 별말 없이 대답해 주었다.
“태자가 너더러 내게 귀띔이라도 해 주라 그렇게 청하더냐?”
“전하는 그러실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태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걸.”
단호하게 반박하는 황제의 말을 듣고 이설은 얼마 전 태자와 나누던 얘기를 떠올렸다. 손에 굳은살이며 붉게 까진 상처가 역력하여 물으니, 습사(習射: 활쏘기를 연습하다)를 하며 생긴 흔적이라고 했다. 손이 많이 아플 텐데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연습을 하느냐 걱정하는 이설에게 태자는 요즘 들어 좀처럼 보기 힘든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황제와 함께 사냥을 가기 위해 애쓰는 중이라 했다.
무척 진심 같았는데.
자신이 본 태자는 말 한마디, 한마디, 표정 한 겹, 한 겹이 모두 진심에서 우러러 나온 것 같아서 황제가 저렇게 냉소적으로 단정 짓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아, 태자는 말이다.”
“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악하고 잔망스러운 아이다.”
“영악하고 잔망스러워도 아이는 아이입니다.”
“태자는 태자일 뿐. 아이여서는 안 돼.”
황제는 태자에게 너그럽고 인자한 것 같으면서도 냉정하고 단호하다. 그 이유는 아마 태자를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만큼 그를 무소불위의 완전한 다음 황제로 군림하게 하기 위한 것일 거다.
여태껏 황제와 담소를 나누며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황제는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을 무척 귀찮고 성가시게 생각했다. 아침마다 조례에 나가는 것도, 걸핏하면 빗발치는 상소와 대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도, 이따금 경사방 늙은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합궁을 해야 하는 것도 모두 짜증스러워했다.
그래서 황제는 가능한 빨리 그 자리를 태자에게 넘겨주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태자가 얼른 이 자리에 어울릴 만한 그릇이 되어야 했다.
차란은 이게 다 황제의 욕심이라고 했다. 하늘 아래 황제만큼 천자의 자리가 어울리는 사람이 없는데 그걸 황제 한 분만 모르신다며, 혀를 내두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황제가 태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상황으로 물러나면 이설은 자유다. 황제의 욕심은 이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는 촉진제가 될 것이다. 상황만 보자면 이설도 태자를 다그쳐 얼른 율령을 외우시고 군도를 깨우쳐 어진 황제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시라 해야 한다.
근데 상황을 이해하고서도 이설은 태자에게 그런 말일랑 한 소리 꺼내 본 적도 없었다. 한때는 태자가 어서 황제가 되어 이 황궁을 벗어나는 날만을 학수고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런 기대감은 아련히 멀어지고 황궁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하루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왜. 너도 내가 무정한 아비 같다 생각하는 중인 것이냐.”
생각이 돌고 돌아 한참 다른 곳에 머물러 있던 이설의 머릿속을 오해하며 황제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질문 자체가 이전에도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던 듯싶은데, 상대야 안 봐도 뻔할 뻔 자였다.
“아닙니다. 그저,”
“그저?”
황궁에서 폐하를 보며 사는 것이 너무 좋아서 막상 때가 되어도 황궁을 떠나고 싶지 않을까 걱정 중이옵니다.
실제 하고 있던 생각은 마른침과 함께 한 번 꾹 삼켜 내고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거짓을 고했다.
“태자 시절에 폐하는 어떠셨을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임시방편으로 내놓은 대답치고는 제법 괜찮았다. 일단 황제가 의심하는 눈치가 아니고, 혹시 대답을 듣게 되어도 손해 볼 게 없었다.
“나는 태자였던 적이 없어. 태자는 내 형님이었던 선황 폐하셨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황제와 달리 이설만 화들짝 놀라 눈치를 살폈다. 황제가 즉위하기 전에는 황태제였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황제는 친모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황제가 될 준비를 마친 사람 같아서 어쩌면 황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럼 그, 폐하가 어렸을 적에 어떤 분이셨을지…….”
“내가 어렸을 적 황태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너를 당황하게 할 만큼 곤란한 사실이냐.”
“아닙니다. 제가 그저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당황하였습니다.”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내가 황위를 이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어. 그러니 너도 당황할 필요 없다.”
황제의 자리를 성가셔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황제가 되지 않을 자신의 운명에 안도했다니. 과장된 말이라는 걸 알지만 황제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농담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꼭 태자가 아니었더라도 황제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한 번쯤 듣고 싶었는데 오늘도 듣지 못할 성싶다. 어린 시절부터 친우였다는 소운과 차란에게 넌지시 물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실례가 될 것 같아 묻지 못했다. 두 사람도 쉬이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고.
“태자가 되면 여간 귀찮은 일이 많은 게 아니야.”
“그 귀찮은 일들을 지금 태자 전하께서 모두 성심성의껏 임하고 계십니다.”
“성심성의? 넌 정말 태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태자는 아마 지금 네 여기쯤에서 놀고 있을 거다.’ 황제가 검지 끝으로 이설의 이마 중앙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면 벌써 여기쯤일 수도.’ 이마를 두드리던 손끝이 정수리로 향했다. 톡톡톡. 가볍게 두드린 손끝이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