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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82)화 (82/300)

달의 황홀경

82화

“태자에게 속지 말거라.”

“송구하오나 신첩, 태자께 속을 정도로 무지렁이는 아닙니다.”

의도치 않게 토라진 목소리가 볼멘소리처럼 튀어나왔다. 불퉁한 목소리를 듣고 황제가 피식 웃으며 이설의 볼을 상냥하게 문질렀다.

“그래, 네가 무지렁이인 것보다 태자가 간교한 게 낫다면 그렇게 하자.”

“……그냥 신첩이 세상천지의 둘도 없는 무지렁이인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무렴 황제가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어떻게 태자를 감히 간교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수 없이 스스로를 세상천지에 둘도 없는 모자란 사람으로 만든 이설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이설이 내쉰 긴 한숨에 황제의 머리카락이 옆으로 휘리릭 넘어갔다. 동시에 황제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자 이설이 깜짝 놀라 어깨를 흠칫 떨었다.

“삐친 것이냐?”

“아닙니다.”

“근데 왜 나를 쳐다보지 않는 것이야?”

“신첩은 원래 폐하의 옥안을 함부로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그게 황궁의 법도이니까요.”

스스로 미쳤나 싶을 정도로 황제에게 따박따박 말대답을 잘도 한다. 오냐오냐해 줬더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성이라도 낼까 싶던 황제는 역성을 내는 대신 피식 웃는 웃음으로 이설을 더 당황하게 했다.

“그럼 여태 이 옥안에 홀려 넋이 나가 눈을 떼지 못한 것은 어느 궁의 누구였단 말이냐?”

순식간에 사색이 된 얼굴 위로 다시 붉은 빛이 뒤덮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색을 들여다보며 황제가 쐐기를 박았다. ‘그래 딱 이렇게 넋이 나간 얼굴이었어.’ 그 와중에도 황제 얼굴을 본 채로 굳었었나 보다.

가끔씩 황제가 물을 때가 많았다. ‘뭘 그리 쳐다보고 있는 것이냐’ 하고 물으면 이설은 옥안에 넋이 나가 있었다는 대답 대신 그때그때 생각나는 변명으로 순간을 모면하였다. 그럼 황제는 그러하냐, 하며 더는 캐묻지 않고 넘어가 주곤 했다. 근데 이제 보니 황제도 다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자신이 황제의 얼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것을.

“뭘 그리 놀라.”

“놀란 것이 아니라,”

“그럼 뭘 그리 부끄러워하는 것이냐.”

“…….”

“너만 그리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코웃음을 치며 황제가 식은 차로 목을 축였다.

하기야 황제 옥안에 넋이 나간 사람이 어디 저 한 사람뿐일까. 탄영당에 찾아온 황제를 바라보던 뭇 여인들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한다.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을 것이다.

입궁 전 황궁의 법도를 배울 때 주 상궁이 몇 가지 신신당부했던 것 중 하나가 황제의 옥안을 정면으로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주 앉아 독대를 할지라도 눈은 언제나 아래로 내리깔아 황제의 얼굴을, 두 눈을 피하라고 하였다. 그때는 누가 황제의 얼굴을 감히 정면으로 마주 볼 생각을 한다고 이런 걸 신신당부할까 싶었는데 주 상궁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

그래도 그동안 황제가 지적하지 않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었던 것 같다.

“신첩의 결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주의할 필요 없다. 하던 대로 하거라.”

“…….”

“무슨 뜻인지 이해하였느냐?”

“네. 이해하였습니다.”

바닥으로 내리깔았던 눈이 다시 황제의 눈높이로 올라섰다.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곧바로 대답하자 황제가 흐뭇하게 웃으며 이설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석반을 들기 전까지 황제와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이설이 엉망진창으로 그린 그림을 자개함 아래에 접어 놓았는데, 그걸 황제가 발견하는 바람에 무척 민망하던 것만 제외하면 즐거운 한때였다. 사실 그 민망한 와중에도 황제가 저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는 게 좋아서 창피한 그림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

작은 호롱불 하나만 밝히는 어두컴컴한 집무실. 불빛을 등진 두 남자가 탁자 끝자락에 나란히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창을 활짝 열어놓아도 밤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터라 제법 더울 만한데도 뒤집어쓴 복면은 벗을 생각도 안 하는 흑영을, 차란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더워?”

“덥지.”

차라리 덥지 않다고 하면 이해라도 할 텐데.

“그럼 좀 벗지?”

“…….”

“그래 됐다, 됐어.”

무슨 고집이 쓸데없이 저렇게 센지 모르겠다. 무관 외골수로 자란 성장기를 감안해도 이건 좀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싶은데 이 험담을 주변에 할 사람이 없다는 게 속이 터진다. 하기야, 주변 사람이라고 해 봐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그네들이 흑영의 고집머리 비난할 양반들은 못됐다.

“그럼 보고하시지요, 금위군장 나으리.”

차란이 예의 그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흑영 앞에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금군의 흉내를 내는 모양이었지만 자세가 엉망진창이었다. 타고난 좋은 골격이 다 아까울 지경이었다.

수일 동안 밤낮없이 조사해 온 기밀 사항을 왜 이 머저리에게 보고해야 하는 걸까, 흑영은 황궁의 보고 체계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목격된 인원은 최소 셋에서 최대 다섯. 모두 검은색 복면을 쓰고 있었고, 그중 두 사람은 체구가 무척 작은 것으로 보아 여인 또는 아이로 추정. 모두 화살통을 매고 있었다더군.”

“닷새 동안 찾은 게 겨우 그 정도야?”

이죽거리는 차란의 얼굴 위로 호롱불 빛의 그늘이 너울졌다. 죽일까. 창문으로 몰래 들어왔으니 여기서 차란을 죽여도 용의 선상에는 오르지 않을 텐데.

“목격자 진술로는 기마 자세로 보아 산에 근거하는 화적패로 추정한다는데,”

“금위군장의 생각은 다르시겠지.”

“나덕산에는 화적패가 있을 수 없어.”

나덕산은 황궁의 산이다. 일반인의 입산이 제한적이고 주기적으로 군병들이 순찰을 돌며 산을 관리하고 있다. 나덕산 순찰을 맡는 군병은 금위군 소속이고, 그 말인 즉 나덕산 관리의 총책임군관은 흑영이다. 나덕산에 화적패 따위가 있다는 사실은 흑영에게는 치욕일 것이다.

“북방 이족이다.”

“……확실해?”

“증언이 정확해. 북방 이족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은 흔히들 화적패로 착각하기 쉬워.”

“정말 화적패가 맞을 수도 있잖아.”

“…….”

“그렇게 쳐다보지 마. 모든 경우의 수를 내다보는 게 내 일이야.”

“모든 위험한 수를 대비하는 게 내 일이고.”

언짢아하는 흑영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차란 역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수를 훤히 내다보아야 한다. 흑영의 말대로 황제를 습격한 무리가 고작 화적패 따위였다면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수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를 사소한 사건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흑영이라고 화적패가 황제를 의도적으로 해하려 했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북방 이족과의 비교 선상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현시점에서 황제에게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은 금국 안에서는 태자의 외조부인 손조익, 그리고 금국 밖으로는 북방 이족이 있다.

금국에 지금과 같은 태평성대가 찾아오기 직전, 대륙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험한 산세와 지형으로 빗장을 걸어 잠그고 세상과 단절된 연국을 제외하고 지도 위의 모든 나라들은 서로가 서로를 침략하고 약탈하며 시체를 쌓고 검은 연기를 하늘로 올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이 죽었고 초가삼간이 불태워졌다.

이 전쟁의 시작이 북방 이민족이었다. 북방의 어느 일족에서 뿌리가 시작되었다는 이민족들은 지금에 이르러 여러 갈래의 부족으로 나뉘었고 척박한 북쪽 땅의 한정된 거주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발발된 전쟁이 결국 온 나라 간의 영토 싸움으로 번졌다.

긴 여행을 종식시킨 것은 금국의 왕이었다. 스스로를 초대 황제로 추대한 그는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민족들을 가차 없이 몰살했고, 살아남은 이민족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만설지 근처로 추방당하거나 부족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다른 나라로 편입되어 숨어 살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이민족들에게 금국은 철천지원수 같은 나라이고, 그중 황제에게 갖는 증오심은 지금까지 끊이지 않았던 암살 시도들이 증명했다.

단 한 차례도 성공한 적이 없었던 암살이었다. 성공은커녕 위협이 되었던 적조차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민족들도 세력이 약해지며 전통과 결속을 잊고 각 나라에 스며들어 살아가고 있는 탓에 경계가 느슨해지기는 했다.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탁자 위의 서신을 들어 올리며 차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양손에 펼친 서신은 지난번 사냥대회 때 나덕산에서 죽은 궁녀의 인적 사항이다. 부모도, 형제도 없는 그 궁녀는 최근 몇 달 동안 외출 기록이 빈번하다. 그 외에는 평소 행실에 특이점은 없었다. 태금궁 궁녀들 모두가 그러하듯, 그녀 역시 입이 무겁고 몸가짐이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죽은 궁녀와 황제를 급습했던 자들 간의 연관성은 아직 파악할 수는 없지만 두 사건을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많다. 하필 황제가 낯선 자들에게 쫓기며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날, 황제의 이름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한 궁녀가 죽었다. 두 사건을 아는 자들 중에서 이 일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보가 부족해.”

“각 국경에 은밀히 금군을 보내 놓았어. 열흘 후 복귀 예정이니, 그때 다시 보고하지.”

“편국에서 간암산을 통해 연국으로 가는 길에 작은 화전촌이 있어. 편국에서 쫓겨난 이민족들이 사는 마을인데 정보력이 좋은 편이야. 잘 구슬려서 뭐라도 좀 건져와 봐.”

“구슬리는 건 네가 하는 방법이고.”

“다짜고짜 찾아가서 혀부터 뽑아 버리는 짓 좀 하지 말라는 말이잖아. 배고픈 사람들이야. 쌀 두 가마니면 되는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마.”

“넌 정말 뼛속까지 장사치네.”

“그러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줄 알았는데, 난 여기 앉아서도 머리가 그렇게밖에 안 돌아간다?”

차란이 들고 있던 서신을 도로 말아 그 끝으로 제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자조 섞인 너털웃음을 보고도 흑영은 따라 웃지도, 그 농담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복면 밖으로 드러난 유일한 두 눈이 차란을 가만히 응시했다.

비가랑 상단의 철부지 막내아들 비차란이 금국 황제의 최측근인 비 승상이 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더라. 자신이 금위군장을 맡은 뒤 얼마 안 있어 올라온 자리이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단코 그 자리를 사양하는 차란에게 황명으로 검 끝을 겨눈 적도 있었다. 황제는 물론 진심이 아니었고, 흑영도 그 마음을 알고 있지만, 그때 그 일은 흑영이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차란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일이었다. 요즘도 차란이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하며 짜증 나게 굴 때면 그때 생각을 하며 인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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