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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88)화 (88/300)

달의 황홀경

88화

황제를 만나면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가슴에 상처가 되는 칼날 같은 모진 말만 들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그때의 이설은 언젠가 자신이 황제와 뱃놀이를 가게 될 거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볼품없는 사내 후궁이 아니십니다.”

“…….”

“이설 님께서는 금의 황제에게 이름을 새기신 것은 물론 그 총애를 한 몸에 받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총애라는 말은 너무 과한 것 같은데.”

이설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콧잔등을 살살 긁었다. 총애라는 말은 제가 듣기에 어딘가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곳간 옆 창고며, 침소 구석에 쌓인 함들을 받아 보시고도 그리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

“아침저녁으로 비은궁을 찾으시는 폐하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게다가 그때마다 폐하께서 빈손으로 오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황제는 이설을 만나러 올 때마다 빈손으로 오는 법이 거의 없었다. 작게는 각 지방의 먹을 만한 지역 특산품부터 크게는 타국에서 공물로 바친 진귀한 물건이나 보석들을 가지고 왔다. 이설은 몇 번이나 한사코 사양했지만 ‘받아라. 황명이다’라는 말에는 토를 달 수가 없어 그 값진 것들을 꾸역꾸역 받아 침소 구석 함에 차곡차곡 모아 놓고 있었다.

*

넉 달 만에 주안 성문 앞에 보름 장이 열렸다. 약 보름 동안 이어지는 장은 금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기간 역시 긴 편이었다. 전국 각지는 물론 바다 건너 해국에서까지 상단이 물건을 대 줄 정도였으니, 이 장을 구경하기 위해 대륙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였다.

장이 들어선 지 셋째 날. 각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 한복판, 유독 두 사람이 주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거냐? 잠깐 한눈이라도 팔았다간 길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여기저기 신기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제 막 장 길에 들어선 것인데 벌써 무엇을 봤다고……, 옆에 바짝 붙어 걷지 않고 어딜 또,”

“폐하 저기 보세요! 어린아이가 허공을 걷고 있습니다!”

유독 사람들이 붐비는 길 위에서 황제는 군중 속에 이설을 빼앗기기라도 할까 싶어 허리를 바짝 당겨 제 옆구리에 붙였다. 멀리 허공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어린아이를 향한 팔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놀란 눈이 황제를 향했다.

“줄타기를 하는 사당패다. 그리고 여기 지금 폐하가 어디에 있지?”

“아……, 송구합니다. 고, 공……, 공자…… 님.”

지긋이 웃는 얼굴에서 무언의 압박감을 느낀 이설이 더듬더듬 호칭을 고쳤다. 황궁을 나서기 전까지도 몇 번이나 당부를 받았지만 역시 쉽게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변이 시끄러운 탓에 이설의 말실수를 귀 기울여 들은 자가 없었다. 설령 들었다 할지라도 제가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겠지, 설마하니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젊은 사내가 금의 황제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설은 황제가 느슨하게 팔을 풀어 주자 옆으로 몸을 빗겨 나며 흘끔 황제의 전신을 훑었다. 의복은 귀족 자제가 입을 만한 적당한 비단옷에 호신용으로 보이는 평범한 장검을 허리에 찼다. 검은 머리카락은 하나로 높이 묶어 그 위에 매의 모양을 한 장신구를 꽂았다. 황궁 정예병 수습 훈련 중인 귀족 자제를 구분하는 표식이라고 들었다. 이 정도 표식은 해 줘야 궁 밖에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는다며, 황제의 명으로 제가 직접 꽂아 주었다.

황제는 눈 아래를 무명천으로 가려 얼굴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유독 도드라지는 체격에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탓에 사람들의 이목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공자는 무슨. 형님이라 부르라니까.”

“안 됩니다. 그건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황명이라면, 그리하겠어?”

황제는 황궁을 나선 뒤로는 정말 황제의 신분을 벗어던지기라도 한 듯 다른 사람인 양 굴었다. 말에는 딱딱한 격식이 사라졌고 걸음걸이는 한층 가벼워져서 그간 느꼈던 거리감이 어느 순간 확 좁혀졌다.

“지금은 폐하가 아니옵시고 그저 제가 모시는 공자님이시니, 황명은 내리실 수 없습니다.”

혹여 누가 들을까 ‘폐하’라는 말에 목소리를 확 낮추었지만 제 뜻은 야무지게 전달한 이설이 기가 차 걸음을 멈춘 황제를 뒤로하고 씩씩하게 앞서 걸어 나갔다.

서너 걸음 앞서 나간 이설의 뒷모습을 보며 황제도 곧 뒤를 따랐다. 눈에 띌까 걱정되어 은색의 머리카락은 급한 대로 어두운 물을 들여 놓았다. 한두 번 정도 물에 감고 나면 다시 제 색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 걱정 말라며, 비은궁 상궁 하나가 묻지도 않은 말을 전했다. 검은 물이 든 머리카락으로 나타난 이설을 보고 눈썹 한번 찡그렸을 뿐인 황제의 마음을 단번에 간파한 노련한 상궁이었다.

황제가 뒤에서 저를 쫓아오는 것이 불안한지, 앞서 걷던 이설이 이내 걸음을 멈추고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나란히 옆에 붙어 서자 ‘어느 쪽으로 모실까요, 공자님?’ 하고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목적지는 없으니 어디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보자.”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만지며 한 손으로 자연스럽게 볼을 감쌌다. 햇빛에 열이 오른 보드라운 볼은 평소보다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볼을 감싼 손이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나며 목덜미를 감싸 쥐며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려던 순간,

“아이쿠! ……거참, 길바닥에 서서 뭘 하고 있는 거요? 가뜩이나 사람도 많아서 지나다니기 힘들구만.”

커다란 포대 자루를 어깨에 짊어진 사내가 황제의 어깨에 부딪혔다. 황제가 앞으로 밀려나며 그 반동으로 이설도 덩달아 뒤쪽으로 몸이 휘청했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지려던 차에 황제가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겨 안았다.

“다쳤느냐?”

“신첩은, ……아, 저는 괜찮습니다. 공자님은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가 이설을 놓아주었다. 주변을 다시 살피니 어깨를 부딪친 사내는 이미 저 앞으로 멀어진 뒤였다. 이설이 넘어져 다치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먼저 가면 좋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을 보니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졌다.

“해국에서 온 상단은 저쪽이다.”

“그럼 저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일러 주는 말에 고민도 없이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전에 없이 활기찬 걸음걸이를 보며 황제가 소리 없이 웃었다. 역시 데리고 나오길 잘했다.

황제는 이제까지 누군가의 탄신일 선물을 위해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기억하는 탄신일이라고 해 봐야 태자 하나가 전부였고, 재작년부터 태자는 갖고 싶은 선물을 황제에게 직접 청했다.

평생에 해 본 적 없던 고민의 끝은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황제는 이설이 황궁 밖 세상을 무척 궁금히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고, 무엇을 먹으며, 어떤 물건을 사고파는지, 이런 사소한 것들에 늘 관심이 많았다. 황제가 물을 때면 아닌 척 점잔을 빼도 역시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었다.

마침 잠행을 나갈 시기가 오고 있었다. 기간을 정해 두고 시찰을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매년 우장절이 끝나고 사람들의 일상이 돌아올 때쯤이면 잠행을 나가곤 했다. 지금이 적기였다.

“공자님, 저기 청색 기장이 있는 곳이 해국의 상단인가요?”

“아마도.”

멀지 않은 곳에서 대나무 대 꼭대기에 달린 청색 기장이 바람에 흔들렸다. 사람들 틈바구니를 이리저리 헤치며 걷느라 기진맥진하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공자님 빨리 오세요.”

들뜬 목소리로 황제를 재촉하는 이설은 당장이라도 저곳까지 달려갈 기세였다. 황제는 여전히 느긋한 걸음으로 이설을 애태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단의 규모는 작았지만 꺼내 놓은 물건들은 제법 봐줄 만한 게 많았다. 매대 평상에 늘어놓은 게 이 정도이니 상점 안으로 들어가면 쓸 만한 물건들도 꽤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황제는 평상 위 자잘한 물건들을 넋 놓고 구경하는 이설을 시선 닿는 곳에 두고 천막을 친 기둥에 어깨를 기대어 섰다.

“해국은 농기구도 신기한 게 참 많습니다.”

“그래, 뭐. 그런 것 같구나.”

“이보시오, 여기 이 갈고리처럼 생긴 건 뭐에 쓰이는 물건입니까?”

기껏 좋은 곳에 데려와 줬더니 눈독 들이는 물건이란 게 고작 농기구 따위다. 하도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여느 여인들처럼 노리개나 비녀 따위에 눈길을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사내라면 벽 한쪽에 걸린 검과 화살대에 관심이 갈 만도 한데, 이설은 그런 건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점인의 대답을 귀 기울여 들었다.

궁에 사 가지고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용도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고민하는 이설을 보며 황제가 의심했다. 다행히 미련이 가득한 얼굴이 손에 쥔 물건을 아쉬운 듯 내려놓자 황제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설이 옆으로 시선을 옮겨 각양각색의 자개함을 구경하는 동안 태자 또래의 여자아이 하나가 황제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꼬질꼬질 때가 묻은 작은 손이 비단옷을 잡아당겨 황제의 시선을 끌고는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 그 앞으로 손을 쓰윽 내밀었다. 손 위에는 종이에 대충 쌓인 당과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얼만데.”

귀찮은 말투로 묻는 황제에게 아이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였다. 날강도가 따로 없군. 황제가 코웃음을 치며 허리춤에 달려 있던 주머니 두 개 중 작은 것 하나를 통째로 떼어 아이 손에 건넸다. 손 위의 묵직한 느낌에 놀란 아이는 이내 함박웃음을 지으며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당과 두 개를 황제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는 황제가 다시 돈을 돌려 달라 하기라도 할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멀리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황제는 근처에서 평복을 입고 사람들과 뒤섞여 있는 흑영과 눈이 마주쳤다. 흑영이 가볍게 묵례를 하며 눈짓하자 황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 뒤 사람들 사이로 흑영은 흐려지듯 사라졌다.

황제가 다시 이설이 있던 곳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이설은 자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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