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90화
우당탕탕―
가뜩이나 소란스럽던 가게 안의 모든 소음을 뒤덮는 소리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황제와 이설뿐만 아니라 가게 안에 있던 모든 손님들이 고개를 돌린 곳에 건장한 체격의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취한 게 분명한, 붉게 상기한 얼굴은 잔뜩 성이나 보였다. 그 감정을 대변하듯 발치에 부서진 나무 의자가 내동댕이쳐 있었다.
“이것들이 말이야! 사람을 뭘로 보고, 거지 취급을 해! 어? 내가 말이야! 누가 돈을 안 내겠다고 했어? 아, 내긴 낼 건데! 이따…, 끄억, 거, 이따 다시 와서 낸다잖아!”
“하지만 나리께서는 어제도 외상으로……, 주인어른께서 오늘은 꼭 어제 드신 술값까지 받아……!”
“거 참 말 더럽게 못 알아 처먹네.”
딱 봐도 무슨 일인지 알 만한 상황이다. 조금 전 이미 만취한 상태로 들어온 사내 무리가 술값을 외상으로 달고 나가려던 걸 막아서자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제 반 토막 밖에 안 되는 여자아이를 위협하려고 던진 국그릇이 건너편 탁자를 맞고 튕겨 나갔다. 겁을 먹고 덜덜 떠는 아이를 보고 사내 무리들이 낄낄대며 비웃었다.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이 불쾌한 시선을 보내긴 했지만 나서서 사내를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식사 중이었다.
“아, 그럼 주면 될 거 아냐! 이깟 푼돈 뭐 얼마나 한다고. ……저리 꺼져 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잠행 중 신분이 노출되어 황제가 곤란해질까 이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사내가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보통 험악하게 생긴 몰골이 아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주머니도 제법 두둑할 것 같은데. 거, 술값 좀 빌립시다, 도련님들.”
사내의 투박한 손이 이설의 앞에 내밀어졌다. 그제야 황제가 식사를 멈추고 사내를 올려다봤다. 이설에게 농을 치며 웃을 때와 확연히 달라 마치 다른 사람을 마주한 듯했다.
“푼돈 얼마 되지도 않소. 금방 갚을 테니 가진 돈 좀 내놔 보쇼.”
자연스레 돌아간 고개가 사내가 앉아 있던 자리를 향했다. 건장한 장정 다섯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나뒹구는 술병이 어림잡아 일곱 병을 넘어섰고, 빈 그릇이 잔뜩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대충 빌려 볼 수 있는 푼돈은 아닐 게 틀림없었다.
금국에 와서 여러모로 수모를 당하긴 했지만 평생을 곱게만 자란 이설이 대면한 너무 무례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사내의 부탁-이라기에는 협박-을 거절하자니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것 같았고, 이설이나 황제 입장에서야 정말 푼돈인 그 돈을 그냥 주자니, 사내의 태도가 괘씸해서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표정 한번 더럽게 재수 없네. 돈 많은 도련님이라고 댁도 날 무시하는 거야, 뭐야?”
비죽거리던 사내가 갑자기 이설의 얼굴 앞에 삿대질을 하며 대뜸 고함을 쳤다. 가까이 다가온 사내에게서 술 냄새가 역하게 퍼졌다. 가뜩이나 못마땅한 기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던 표정 위에 짙은 불쾌함이 번졌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그따위……. 도련님 그 곱상한 얼굴에 칼자국이라도 내 드려 봐야 정신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이 이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때였다. 위협적인 태도로 다가오는 사내가 하는 말이 그저 말뿐인 협박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온 순간 황제가 사내의 뒤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바로 황제가 사내의 멱살을 붙잡아 탁자 위로 단번에 내리꽂았다. 기세등등하던 건장한 사내는 반항도 한번 해 보지 못하고 탁자에 얼굴을 정면으로 처박은 뒤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탁자 위 그릇들이 서로 부딪치고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와중에 이설은 분명 사내의 턱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방금 했던 말 다시 해 봐.”
스산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는 황제가 바닥에 쓰러진 사내의 몸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사내는 곧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이 얼굴에 무슨 짓을 하겠다고?”
황제를 피해 바닥을 기어 도망가는 사내의 얼굴 위로 황제의 가죽신이 올라왔다. 이미 으스러진 턱뼈를 짓누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사내가 꺽꺽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침을 질질 흘렸다.
손 쓸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던 사내의 일행이 이내 사태를 파악하고는 욕지거리를 하며 달려왔다. 황제가 사내의 얼굴을 밟는 힘을 더 세게 가하자 숨넘어가는 비명 소리가 귀를 찢을 듯 들렸다. 그 끔찍한 일을 행하고도 황제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숨소리조차 평온했다.
“대답해. 연이설의 얼굴에 무슨 짓을 하겠다고 한 건지.”
“어이, 도련님. 얼마나 귀한 집 아드님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감당 못 할 텐데.”
황제가 사내를 정말 죽이기라도 할까 쉽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와중에 일행 중 한 사람이 어르는 말투로 말을 붙였다. 하지만 황제에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황제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사내의 얼굴을 다시 한번 걷어찼다. 사내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황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게 있을 리가.”
황제가 식사 중 마시던 술병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기울어진 술병에서 맑은 술이 천천히 쏟아져 나와 사내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숨을 헐떡이는 사내 얼굴 위로 빈 도자기 술병이 뚝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에 움찔한 이설이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굳었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금세 사라졌다.
처음 보는 황제의 면모에 두려움이 드는 한편 저를 보고 웃는 모습을 보니 미묘한 안도감이 찾아드는 듯했다.
“……뭐, 하나 정도는 있을 수도 있겠군.”
황제의 손가락 끝이 이설의 볼을 가볍게 통 튕겼다.
“다치지 않았느냐?”
다정하게 묻기에 고개를 저었지만 건장한 사내가 주는 위협에 겁먹은 마음이 완전히 진정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직 상황이 좋지 못했다. 최악의 수는 황제가 신분을 밝히는 것인데 그렇다 한들 이 상황이 진정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는 걱정과 불안들이 이설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불안한 눈빛은 의지할 곳 없이 황제만을 향했다.
“겁 많기는.”
황제가 잠시 고민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뒤 짧게 한숨을 쉬며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끼고 있던 머리 장신구를 뽑아 바닥으로 휙 던졌다. 갑자기 장신구는 왜……? 의아함에 눈을 올려다보는 사이 다시 우당탕탕 빈 접시들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둘이 뭘 그렇게 떠드는 거야? 이봐, 여기 사람 말 안 들려?”
“더 볼 일 없으니 이만 가자 설아.”
뒤에 선 사내가 뭐라 떠들든 눈길도 주지 않고 황제는 이설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잡아끄는 힘에 이끌려 엉거주춤 일어나긴 했지만 순순히 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장이 들어선 길목마다 이런 소동을 막기 위한 경비들이 배치되어 있긴 했지만 아직 들여다보지 않는 걸 보니, 먼저 나간 손님들 중 이 사실을 알린 이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이설을 일으켜 세워 어깨를 감싸 안으며 황제가 몸을 틀었다. 의식을 잃었는지 미동도 없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내의 다리가 걸음에 방해가 되자 고민 없이 밀어 걷어찼다. 그 난폭한 행동이 도화선이라도 된 건지 내심 화를 참고 있던 그 일행들이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껏 해야……!”
고작해야 네댓 명이 달려드는 소리치고는 바닥 울리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다 싶었다. 사내의 고함과 동시에 이설은 황제의 가슴팍에 달라붙듯 끌어 안겨졌다. 캄캄한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수 명의 발소리와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낭자하게 들렸다.
“폐……, 폐하?”
“쉬이-, 가만히 있거라.”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잘…….”
“놀랐느냐?”
천천히 황제에게서 떨어진 이설이 고개를 빼꼼 옆으로 기울였다. 당장에라도 저와 황제에게 달려들 것 같았던 사내들은 한자리에 모여 우두커니 서 있고 그 주위를 빙 두른 자들이 모두 하나같이 그들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검을 든 자들은 모두 방금 전까지 이설과 황제의 주위에서 밥과 술을 먹고 있던 평범한 자들이었다.
“내내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정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어?”
“예……, 호위군이 함께 다니고 있을 줄은…….”
“둔한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놀란 마음은 놀란 것대로 진정이 되지 않고 그 와중에 걱정했던 것만큼 큰일은 일어나지 않게 됐다는 안도감이 더해져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을 뻔하던 것을 황제가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제 쪽으로 당겨 간신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아무렴 너를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오는데 호위도 없이 나왔을까.”
한참 만에야 제대로 된 웃음을 짓게 된 황제를 보고 나서야 모든 불안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바닥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자, 잘못했습니다!”
목청 좋던 목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벌벌 떨리는 소리가 사내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장한 사내들이라 해도 당장 제 목 앞에 겨누어진 칼을 보면 없는 잘못도 만들어내서 나와야 할 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나리.”
유일하게 사내들에게 검을 겨누지 않고 있던 자가 황제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이설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 자가 누구인지 곧바로 눈치챘다.
“후환이 없으려면 지금 죽이는 게 가장 낫지 않을까 싶은데.”
“해국에서 온 외교 고문의 자제들입니다. 죽이시면 일이 복잡해질 겁니다.”
“상관없다. 모두 죽여라.”
“……비 승상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무척 시끄러워질 텐데요.”
흑영의 무표정한 얼굴에 스쳐 지나간 짜증을 간파한 황제가 혀를 쯧, 하고 찼다.
“무전취식을 하고 난동을 피워 가게 물건을 파손하고 어린아이를 폭행하려고 했다. 또한 무고한 사람들을 협박하여 돈을 갈취하려고 한 자들이다. 압송하여 법도에 따라 처리하라.”
“네.”
흑영이 뒤돌아서며 검집에 검을 넣었다. 황제는 사내들의 목숨을 당장 이 자리에서 끊을 수 없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쉬운 것인지 영 꺼림칙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설을 돌려세워 가게를 나가다 말고 황제가 멈춰 섰다. 사내에게 큰일을 당할 뻔한 여자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봤다.
“받아라.”
“……예?”
아이의 발치에 비단 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나무 바닥에 울리는 묵직한 소리에서 주머니 속 돈이 어느 정도일지 예상 가능했다.
“저자들이 치러야 하는 값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그것도 잊지 말고 마저 받거라.”
“그, 그치만 이 돈이면 충분히……,”
“이만 가자.”
더듬더듬 울먹이는 아이를 뒤로하고 황제와 함께 가게를 나왔다. 고개를 돌려 뒤에 남겨진 상황을 보려고 했지만 황제가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그럼 이제 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겁니까?”
중천보다 많이 기울기는 했지만 아직 날이 훤했다. 벌써 황궁으로 돌아가자니 아쉬운 마음에 발이 떨어지지 않아 조심스레 물었다.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자.”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설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예상한 대답 그대로였지만 황제는 이설을 짓궂게 놀리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한 황제가 주변을 둘러봤다. 살짝 찡그린 얼굴은 가야 하는 길을 고민하는 듯 보였다. 방향을 확인한 뒤 이설의 손을 잡아끌었다. 종일 같이 있는 내내 손을 잡은 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들를 데가 있어. 같이 가자.”
잡은 손을 놓지 않고 황제가 그대로 걸음을 뗐다. 조금 전 난장판 가운데 황제 얼굴에 씌었던 가리개를 잃어버렸다. 훤히 드러난 얼굴 탓인지 걷는 걸음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그게 신경이 쓰인 것도 잠깐이었다. 황제가 이끄는 길로 깊이 들어갈수록 행인은 줄어들고 시끌벅적한 말소리 대신 새소리만 높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