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92화
꽃나무 사이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작열하는 햇빛은 사그라들었고 꽃가지 사이사이를 지나 부는 바람의 찬기가 조금 더 강해졌다. 밤바람의 찬 기운 만큼은 아니지만 해가 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정도는 충분했다. 궁에서 같았으면 주 상궁이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며, 창의 빗장을 걸어 잠갔을 바람이다.
꽃잎은 하염없이 떨어지기만 하는데 아직 가지 위에 꽃잎은 가득하다. 날이 더 추워지면 저 꽃들도 곧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겠지. 그 전에 한 번 더 이곳에 올 수 있으려나. 이곳은 고사하고 다시 궁 밖에 나올 수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가끔 이상한 꿈을 꿨어.”
“꿈, 이요?”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가 나직이 말했다.
“지금은 더 이상 꾸지 않지만, 꽤 오랫동안 같은 꿈을 꿨었다.”
“좋은 꿈이었습니까?”
“좋은 꿈은 뭐고 나쁜 꿈은 뭐지? 어차피 그저 한낱 꿈인데.”
피식 웃으며 황제는 한입 베어 문 사과를 반으로 나누어 정자 밖으로 던졌다. 왜 그러시는 거지, 생각이 들기도 전에 수풀에 숨어 있던 토끼 두 마리가 날쌔게 튀어나와 사과 조각을 하나씩 물고 다시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좋은 일이 일어나는 꿈도 좋은 꿈이고, 깨고 난 뒤에 기분이 좋았다면 그 또한 좋은 꿈이 아니겠습니까? 뭣보다 꿈을 꾼 후에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꿈 따위에 그런 의미를 가져 봤자지.”
“오랫동안 반복된 꿈이라면 분명 보통 꿈은 아닐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면 그 꿈을 꾼 뒤로 길사나 흉사를 만나셨을 수도 있습니다.”
눈을 반짝이며 조잘거리는 이설은 황제에게 기억을 더듬어 보라는 듯 재촉했다. 황제는 혼자 생각에 잠기는 대신 조용히 이설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남들보다 색이 옅은 진회색 눈동자에 황제의 모습이 흐릿하게 투영됐다.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길한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흉한 것이었습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황제의 꿈 얘기를 듣는 것에 들뜬 이설이 상체를 다과상 앞으로 한껏 기울였다. 이곳으로 향하는 길에 샘물에서 손을 씻고 머리카락을 만지는 바람에 물든 게 지워져 희끗희끗 은사들이 드러났다.
황제가 흐음, 하는 소리를 크게 흘렸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온 이설 얼굴의 턱 부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흉한 것보단 길한 것에 더 가까운 것 같긴 한데…….”
“…….”
“좀 더 두고 보면 알겠지.”
찻잔을 쥐고 있느라 따뜻하게 데워졌던 손이 닿은 얼굴에 온기가 느껴졌다. 곧 손이 떨어져 나가며 온기가 허전해진 얼굴을 이설은 두 손으로 문질렀다.
“모쪼록 길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발그레 물들인 두 볼을 양손으로 감싸며 이설이 싱긋 웃었다. 황제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지만 거기에 따른 별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 꿈에 나오던 장소가 있었어.”
“예.”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와서 보니 이곳과 비슷한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지금은 꾸지 않는 그 꿈의 배경을 다시 생각해 보려는 듯 황제가 멀리 시선을 보냈다. 감정 없는 눈동자의 초점이 점점 흐려지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는 꽃잎 때문인 건지 아니면…….”
흐려지던 초점이 이설에게 닿으며 순간 또렷해졌다. 이설은 갑자기 날카롭게 저를 직시하는 황제가 어색해 뒷덜미를 긁는 척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 시선을 피했다.
“닮은 사람을 만나서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작은 소리로 하는 혼잣말이었지만 주변이 고요한 탓에 알아듣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닮은 사람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물을까 고민하는 사이 황제가 다른 화젯거리를 입에 올렸다. 난데없이 차란과는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라 하셔서 할 말을 잃었다. 용기를 내 그 이유가 뭔지 여쭙자 차란은 근본적으로 질이 나쁘고 방자하기 짝이 없어 가까이 두어 좋을 게 아무것도 없다며, 늘 머릿속에 하고 있던 생각을 말하듯 고민 없이 대답했다.
“말씀은 그리하셔도 폐하께서 승상 자리를 내어 주신 것 아니십니까?”
“항상 후회 중이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황제가 탁, 하고 소리가 나게 찻잔을 상에 내려놓았다.
“아까운 인재 하나만 버린 셈이 된 거지.”
“……단소운 태감 말씀입니까?”
입술을 짓이기며 진심으로 짜증을 담아 말하는 황제에게 괜한 아는 척을 했다. 홀리듯 물은 말에 황제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마주 봤다.
“네가 어쩐 일로 그런 눈치를 다 가지게 되었느냐?”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닌 것을 알아 더 민망해졌다. 괜히 아무것도 없는 망망한 호수 위를 보는 척하며 ‘그냥 어쩌다 보니…….’ 하고 말끝을 흐렸다.
이설이 세상사, 특히 인간관계에 심히 무딘 것은 맞지만 차란과 소운을 보고도 둘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겠거니, 넘어갈 정도로 맹탕은 아니었다. 소운이 노골적으로 차란을 피하고 차란도 구태여 소운에게 아는 체를 하는 게 아닌 정도의 모습만 몇 번을 보고 나면 뭔가 이상하다는 조짐은 누구나 할 만했다.
이설은 겨우 이 정도의 눈치를 칭찬받았다는 사실이 못내 낯부끄러워졌다.
“어리석은 놈 하나 때문에 엄한 소운의 앞길만 막혔어.”
“비 승상께서 태감께 뭘 크게 잘못하신 겁니까?”
황제가 말없이 고개만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래서 소운이 차란만 보면 못 볼 사람을 본 것처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쌩하니 자리를 피하려던 건가 싶었다.
“근데 소운도 만만치는 않았지.”
입술 사이로 헛웃음을 뱉는 황제는 아직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는 이설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미련한 것들의 얘기는 그만두고, 이쪽으로 자리나 옮겨 보거라.”
눈앞을 휘휘 날리던 손이 황제의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주춤거리는 사이를 참지 못하고 황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항상 내가 움직이게 만들어.”
상을 돌아 제 옆자리에 털썩 앉은 황제가 어깨를 가까이 기대 왔다. 등 뒤로 한 바퀴를 두른 팔로 당기는 힘을 버틸 수가 없어 그 품으로 쏟아지듯 몸이 답싹 안겨 들었다.
“한 번쯤은 네가 먼저 이렇게 안겨 봐도 되지 않겠느냐?”
“폐, 폐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부디 팔만큼은 거둬,”
“보는 눈이라니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아래 수풀 사이에 토끼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저기 나무에 앉아 있는 산새를 말하는 것이냐?”
“폐하의 호위군이 아직…….”
황제의 가슴팍에 묻은 얼굴이 그새 부끄러움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황제를 예의 주시하고 있을 호위군이 이 모습을 보고 있을 걸 생각하니 낯뜨거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인기척 한번 없었지만, 고도로 훈련된 그들이라면 이설 한 명 따위는 충분히 속이고도 남을 만큼 존재를 은폐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려고 애썼지만 황제의 힘을 이길 방도가 없었다. 애원하기까지 하는 목소리가 ‘폐하’ 하고 불렀지만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잔에 차를 부었다.
하지만 이설이 끝내 부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빼고 꿈틀대며 품을 벗어나려고만 하니 그게 성가셨는지 짧게 한숨을 토해 냈다.
“호위군은 없다. 그러니 가만히 좀 있거라.”
“……또 제게 거짓말을 하시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이설이 괜히 꿍얼거리면서도 정말 호위군이 근처에 없는지 확인하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차피 있으나 없으나 이설에게 들킬 오합지졸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지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여긴 비가랑 상단의 사유지다. 사병들은 모두 담장 바깥에나 있을 테지.”
“…….”
“흑영에게는 저 위에 돌계단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신신당부하였다. 걱정할 것 없으니 얼굴이나 보여다오.”
사실 호위군의 핑계를 댔지만 보는 눈이 없다고 하여 황제의 품에 안겨 있는 제 모습이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후궁 된 신분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저도 사내라면 사내인데 가냘픈 여인들이 그러하듯 황제의 품에 쏙 안겨 들어가 있는 꼴이 어찌나 볼품없을지 안 봐도 남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제 마음도 모르고 황제는 자꾸만 아이 어르는 말투로 고개를 들라고 하는 통에 난감해 죽을 지경이 됐다. 긴 심호흡으로 겨우 마음을 가다듬어 고개를 들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다음 다과상에는 홍옥이 아니라 네 얼굴을 올려놓으면 되겠다며 놀려 웃어 댔다.
“그만 놀리십시오. 폐하 때문에 숨이 막혀 얼굴이 붉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애써 침착한 척하는 이설이었지만 황제에게 씨알도 안 먹힐 핑계라는 걸 안다. 종일 같이 다닌 탓인지 황궁에서 황제를 대하는 것에 비해 훨씬 격이 없어졌다. 제 툴툴거리는 태도에 순간 아차 싶었지만 황제는 별로 개의치 않은 듯했다.
“그래 다 내 탓이지. 내가 설이 네 얼굴을 이리 붉게 만든 것이다.”
“아무렴요.”
아직 황제에게 어깨가 붙잡힌 이설은 몸을 돌리지도 못하고 작게 혼잣말했다. 제발 황제가 맞은편 자리로 돌아가 앉기만을 바라는데 귓가에 더운 바람이 훅 들어왔다.
“혹 다른 사내에게 얼굴 붉힐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거라.”
“……예?”
“여인도 예외는 없어.”
그제야 이설이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안긴 자세 탓에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이설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 것을 보며 황제는 옅게 웃었다. 그리고 이내 눈가에 그늘이 지며 황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려 피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보다 황제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는 게 더 빨랐다.
물기 젖은 두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며 소리가 났다. 그저 살과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일 뿐이라는 걸 아는 데도 그게 너무 외설스럽게 들렸다.
“……아…….”
입술이 떨어지고 얼굴 위를 덮은 그늘이 반쯤 걷어졌다. 온전히 보이는 황제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뒤늦게 황제와 입맞춤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하는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둘 사이에 일어나는 흔한 일도 아니었다. 마냥 부끄러워만 하기에는 이 일을 너무 의식하는 것 같아 민망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기에는 저가 뻔뻔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친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설의 얼굴 위로 다시 어두운 그늘이 지어졌다. 학습된 반응처럼 다시 눈을 꼭 감으며 황제의 옷자락을 꽉 쥐어 잡았다. 입술로 집중된 모든 감각을 비웃듯 귓가에 더운 바람이 불었다.
“오늘이 네 탄신일이라지, 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