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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95)화 (95/300)

달의 황홀경

95화

“마마,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

“루 소의 마마?”

“……아, 응? 방금 뭐라고 했지?”

“의복에 불편한 곳은 없는지 여쭤봤습니다.”

“음……, 불편한 곳은 없네.”

이설이 체경에 비친 제 몸을 훑어보며 가볍게 팔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비단 옷감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몸을 간지럽혔다. 살갗에 오돌도돌 돋아 난 소름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새로 지은 의복이라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냐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

우두커니 체경 앞에 서있는 이설의 옆에 붙어 선 주 상궁은 손놀림이 바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 상궁의 손 안 닿은 곳이 없게 된 후에야 긴장 풀린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태금궁에서 곧 가마가 도착할 것이라고 기별이 왔습니다.”

“그렇군.”

그리고 다시 긴 한숨. 어깨가 처지며 그 위에 덮어 둔 붉은 장옷의 한쪽이 아래로 내려갔다. 주 상궁이 조용히 장옷을 끌어 올려 어깨를 덮어 주었다.

반나절의 꿈같던 잠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왔던 길과 반대로 돌아 나가니 담 밖에는 이미 금군과 가마가 대령되어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한 발자국 걷기도 힘들었던 이설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의 가마 안은 적막만 가득했다. 이설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는 데 급급했고 황제는 말없이 이설의 손만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달이 뜨면 비은궁으로 가마를 보내겠다.’

태금궁보다 먼저 도착한 비은궁에 막 내리려는 이설을 불러 세우며 황제가 말했다. 이설은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빈 가마가 되돌아온다고 해도 탓하지 않으마.’

내내 붙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아주는 황제는 그때 웃고 있었다. 이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꾸벅 인사만 한 뒤 궁으로 돌아왔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궁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앞마당에 한가득 쌓여 있는 함과 비단보들이 이제 막 정리 되던 시점이었다. 그 앞에서 주춤 발을 멈춘 이설에게 단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왔다.

‘아니 글쎄, 오늘이 마마의 탄신일인 걸 어찌 알고 여기저기서 폐물들을 이리 잔뜩 보냈지 말입니다!’

한껏 들떠 어깨춤이라도 출 것 같은 궁인들을 뒤로하고 이설은 주 상궁만 조용히 처소로 불렀다. 오늘 밤 태금궁에서 오는 가마를 빈 가마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이설의 말을 주 상궁은 단번에 이해했다.

몸을 씻고 새 의복을 입고 단장을 하는 내내 넋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환복 되어 있었고 다시 또 넋이 나가 있다가 면경을 보면 머리에는 새 비녀가 꽂혀 있었다.

체경에 가까이 다가간 이설은 틀어 올린 머리 중앙에 꽂힌 나비잠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마마, 금국에서 접잠을 꽂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주 상궁에게 이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 상궁마마, 대문 밖에 지금 막 가마가 도착했습니다.”

연화의 말을 듣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장지문이 열리며 사뿐한 걸음이 궁을 나섰다.

덜렁 가마만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가마 옆에 늘어 선 금군의 위압을 예상한 것도 아니었다. 입이 헤벌쭉 벌어진 궁인들과 굳은 표정의 기연이 배웅했다. 태금궁까지 따라나서는 건 주 상궁과 화홍이다.

불편한 의복을 입고 긴장된 마음으로 가마에 앉아 있는 일은 혼례 이후로는 없을 줄 알았다. 달 뜬 밤의 고요한 적막을 깨는 건 흙바닥을 밟는 수십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가마 안에 혼자 남은 이설이 황제와 잡았던 손바닥 위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상처 없이 매끈하고 하얀 손바닥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이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위에 황제가 그의 이름을 주었다.

“마마, 곧 태금궁입니다.”

열린 창 너머로 화홍이 소곤거렸다. 면경에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마가 멈췄다. 숨을 고르며 얼굴 쓰개를 내리자 시야가 흐릿해졌다.

가마 문이 아래에서 위로 접혀 올라갔지만 날이 어두운 탓에 사람 형체와 뿌옇게 흩어진 등불만 식별이 됐다. 발을 땅으로 내려 천천히 가마를 나오려고 하자 누군가 부축을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주 상궁일 거라고 생각하며 의심 없이 손을 덥석 잡았다.

“누군 줄 알고 손을 이리 쉽게 내어 주나.”

“……폐하?”

중년의 여인답지 않게 크고 굳은살 박인 손의 감촉에 의아한 순간 황제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숨이 후, 하고 뱉어지며 쓰개가 펄럭 휘날렸다.

“날이 찬데 왜 여기까지 나와 계셨습니까?”

“빈 가마가 올까 걱정되어.”

대꾸할 겨를 없이 황제가 잡은 손을 당겼다. 흰 날개를 퍼덕이는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몸이 황제에게 휙 안겨 들었다. 황제와 함께 나와 있던 태금궁의 궁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이설 어깨에 걸친 붉은 장옷을 이설 머리에 씌우고 어깨를 감싸 안아 얼굴을 가렸다.

“들어가자.”

황제와 함께 휙 돌아선 몸이 안겨 가듯 태금궁 안으로 들어섰다. 이전에 한번 와 본 적이 있지만 어두운 밤인 데다가 쓰개에 시야까지 흐릿하게 가려져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황제 걸음이 평소보다 빨라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느라 숨이 다 찼다.

“폐하, 송실전(送實殿)에 모두 준비 마쳤습니다.”

귀에 익은 윤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라는 말에 장옷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내 침소로 갈 것이다.”

“하오나 폐하의 침소는……, 명하신 대로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윤 내관의 발소리가 멀어진다. 다시 황제 걸음을 맞춰 급하게 걸었다. 보이지도 않는 신을 벗느라 몸을 휘청일 때는 황제가 직접 허리를 숙여 제 신에 손을 대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직접 하겠다는 고집은 두 번이 최대였다.

“폐하 이제 장옷을 내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쓰개에 장옷까지 두르고 있으니 여간 몸이 답답한 게 아니었다. 본래 쓰임의 용도를 생각하면 지금쯤 벗어도 되겠다 싶어 물었으나 황제는 단호했다.

“그대로 둬. 아직 창밖에 달이 밝아.”

비단 한 겹을 사이에 두고 귓가에 황제 입김이 닿았다. 창 밖에 달이 밝은 것이 장옷을 거두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제 명을 거스를 수는 없어 잠자코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황제에게만 의지한 채 한참을 걸었다. 문득 문득 코끝을 스치는 향냄새가 익숙한 걸 보아 이전에 금원으로 가던 복도를 걷고 있는 듯했다.

곧 황제가 걸음을 멈췄고 여러 개의 장지문이 닫히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렸다. 탁, 하고 닫히는 마지막 문소리를 끝으로 주변이 고요해졌다. 붉은 장옷이 스르르 내려가며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앉거라.”

떨어진 장옷을 밟고 이끌려 간 자리에 앉았다. 쓰개를 스스로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이내 직접 쓰개를 젖혀 올렸다. 선명해진 시야에 황제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낮동안 봤던 모습에 익숙해져 잠시 잊고 있던 황제의 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금색 장포를 걸치고도 그 화려함에 눌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반쯤 풀린 눈으로 넋을 놓은 이설이 황제의 말에 부정하며 도리질을 쳤다. 종일 걸어 다닌 뒤 조금 전 따뜻한 물에 목욕까지 마친 터라 몸이 노곤노곤하게 녹아내리는 듯 했지만 정신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다행이군. 일찍 재울 생각은 없었거든.”

미묘하게 웃음기 어린 입매다. 농이라면 의미 없이 흘려들으면 그만이지만 진심이라면 심히 걱정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제 발로 찾아 온 것도 아니면서 아직 마음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 밤중에 네가 왜 여기 앉아 있는지는 아는 모양이구나.”

“신첩, 그 정도도 모를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근심이 가득한 얼굴인가?”

“…….”

“뭘 그렇게 놀라느냐? 설마 티가 안 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일부러 감추려고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흘끗하는 눈빛에도 들킬 만큼 티를 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제 표정 관리가 형편없는 것인지, 황제 눈썰미가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이 안 된다고 하면…… 또 거짓말이겠지요.”

거짓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책잡힐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게 상책이다.

“왜 긴장을 하는 거지?”

“그야……,”

“그야?”

“……폐하께서 사내이시듯 신첩도 사내이니까요.”

“…….”

“제가 폐하께 안긴다는 사실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여인이 아닌 몸이다. 조건이 월등히 우월한 건 척 봐도 아는 사실이지만 수준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같은 신체 구조를 가진 사내에게 안긴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었고, 이전의 일로 그 행위에 대한 공포를 이미 경험했다. 이설처럼 겁이 많고 소심한 성정에, 이 자리에 태연히 앉아 있는 게 더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럼 설이 네가 나를 안는다면 마음이 좀 편해지겠느냐?”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화들짝 놀란 이설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느슨하게 틀어 올렸던 머리 장식이 흔들리며 머리카락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황제가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황제의 말은 상상조차 되지 않아 부끄러울 겨를도 없었다.

“그리 부정할 것까지야. 나도 네게 안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

“접잠(蝶簪:날개를 편 나비 모양으로 만든 비녀)을 꽂았구나.”

“예.”

“의미를 모르고 꽂은 걸 아닐 테고 말이야.”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흐음, 하고 내는 소리에 담긴 의도를 모르겠다. 흘끔 눈을 올려 황제를 쳐다봤다가 금방 시선을 피했다. 순간 마주친 황제의 눈에서 일전에 보았던 번들거리는 사내의 욕망을 엿봤다. 이설이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시선이 아니었다.

시선이 머물던 바닥에 금색 용포가 툭, 하고 떨어졌다.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하여라.”

“…….”

“어서.”

다정하게 다그치는 명령을 거절할 재간도, 이유도 없었다.

이설이 눈을 꼭 감자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신첩 연이설,”

“……”

“오늘 밤 폐하의 승은을 입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이 옷자락을 꽉 쥔 것과 동시에 고정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갖은 보석들로 장식된 값비싼 접잠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하찮게 나동그라졌다.

“허락한다.”

눈 깜짝할 새에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진 몸이 날아가듯 침상 위에 떨어졌다. 살짝만 당겨도 겉옷이 다 흘러내리니 황제의 침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꼭 조심하셔야 한다는 주 상궁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허리 끈 매듭이 느슨해지며 옷의 앞섬이 모두 풀어 헤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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