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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99)화 (99/300)

달의 황홀경

99화

5장. 귀한 손님

어둠이 걷히고 달이 물러난 하늘에는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창틀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가 아니었어도 이쯤이면 눈이 부셔서라도 일어날 때였다. 늘 어스름한 새벽 어귀에 기침하는 게 익숙해 있던 터라 늦은 아침의 쨍한 햇살이 새삼스러웠다.

뻐근하게 결리는 목을 양옆으로 꺾으며, 우찬이 평소처럼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할 때였다. 침상 위로 길게 뻗은 팔 위가 어쩐지 묵직했다.

“으으응…….”

뭉쳐 있던 포단이 꿈틀꿈틀 움직이며 작은 소리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팔로 머리를 괴고 포단을 걷어내자 웅크린 몸으로 잠든 이설이 있었다.

햇빛에 반짝은 은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를 감싸 듯 흘러내렸다. 드문드문 보이는 붉은 흔적들이 간밤의 지독했던 정사를 대변했다. 우찬은 졸음이 싹 가신 얼굴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어젯밤, 이설을 취했다.

그간 손끝만 스쳐도 몸이 달아오르던 날을 참고 또 참아 일궈낸 거사였다. 비은궁으로 보낸 가마가 빈 가마로 돌아온다 해도 이설을 책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밤의 이설은 무척 달았다. 입술을 대는 온몸 어디라도, 꿀을 발라 놓은 듯 달고 끈적했다. 열에 들떠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와중에 ‘폐하’ 하고 울며 부르는 모습을 이제야 봤다고 생각하니 지난 시간들이 끔찍할 만큼 아까워졌다. 좀 더 빨리 가져야 했다.

“흐으…, 추워…….”

나체 위에 포단을 들춰 놓은 상태라, 몸의 한기를 느낀 이설이 잠결에 칭얼댔다. 하얀 몸에 얼룩덜룩 새겨진 붉은 자국들을 흐뭇하게 감상하던 우찬이 어깨 위까지 포단을 잘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 위를 팔로 감싸자 작은 몸뚱이가 꼬물거리며 제 품으로 안겨 들어왔다.

숨죽여 웃던 우찬이 돌연 무표정이 되어 이설을 내려다봤다.

분명 저가 처음이라고 했다. 마음을 준 이도, 몸을 준 이도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거짓을 고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젯밤 이설의 반응으로 봤을 땐 그런 발칙한 거짓말을 지어낼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혹시라도 누군가 이 모습을 본 자가 있다면? 혹은 보게 되는 자가 생긴다면?

문득 든 생각과 함께 서릿발 같은 시린 웃음이 우찬의 입가를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 이설에게 했던 말은 농이 아니었다. 두 눈을 파고 사지를 잘라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는 고문은 우찬이 당장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유한 처벌이었다.

이설은 온전히 제 것이었다.

황궁 안에 모든 것 중 우찬의 것이 아닌 것이 없었지만 그 중 이토록 탐이 나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옥좌조차도.

몇 해 전 고열에 괴로워하는 어린 태자가 안쓰러워 안아 재워 준 걸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타인과 함께 잠이 들고 깼다. 후궁과의 합방에 밤을 새워 본 적도 처음이다. 하물며 후궁을 제 침소로 들인 적도 없었다.

쌔근거리며 미동도 없이 잠에 취해 있던 이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지 살피려던 우찬이 포단을 들춰낸 순간 죽은 듯 감겨 있던 눈꺼풀이 반쯤 무겁게 뜨였다.

“……폐, 하?”

잠이 가득한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광경이 황제라는 사실에 무척 놀란 눈치지만 몸이 반응하지 못했다. 잠이 깬 직후이기도 했고, 간밤의 여파로 아마 몸이 천근만근일 터였다.

“일어났느냐?”

“폐하께서 어찌 제 침소, 아니 신첩의……, 아!”

평소처럼 제 침소에서 눈을 떴다고 생각한 이설이 어젯밤 색사를 기억해 내자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우찬은 웃음을 참으며 “늦잠을 잤구나” 하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지난밤의 정사가 고되긴 했을 테니 이해하마.”

잠이 순식간에 싹 달아난 얼굴이다. 달싹이는 입술만 봐도 이설이 지금 얼마나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는지 짐작이 갔다.

“아직 더 잠이 오거든 더 자도 돼.”

“……아닙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힘이 쭉 빠졌다. 자꾸만 몸을 꼼지락거리는 게 자세가 불편해 그러는 줄 알았는데 우찬의 품에서 물러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우찬은 그게 괘씸해서 포단을 아래로 확 당겨 던져 버렸다. 맨몸이 그대로 드러나자 이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황제 팔에 막혔다.

“어딜 가려고?”

“비, 비은궁으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난 그리 명한 적 없는데.”

“허하여 주시옵소서!”

“불허한다.”

“폐하!”

부끄러움이 평소의 소심함을 이기기라도 한 것 같다. 우찬에게 언성이 높아진 것도 이설은 눈치채지 못하고 끝내 황제의 어깨에 얼굴을 처박았다. 몸을 가리지 못하니 얼굴을 가리기로 했나 보다.

우찬은 이설의 마른 어깨 위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이설이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정사 후 지아비를 홀로 두고 궁으로 돌아간다니, 나의 정인은 매정하기도 하지.”

과장된 말투에 이설을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이설도 분명 눈치챘을 테지만 대꾸는 못 하고 혼자 귀만 붉어졌다.

“……정 그러시면 포단이라도 덮어 주십시오.”

기껏 생각한 대꾸가 고작 포단이라도 덮어 달란다. 아프다고 울며불며 애원하는 걸 무시하고 밤새 괴롭힌 제게 원망이라도 한마디 해 볼 법한데 이설은 그럴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창밖에 전경이 푸르스름하게 물들 때까지 이설을 놓지 않았다. 이설도, 황제도 둘 다 서로의 몸에 몇 번이나 토정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정사 끝난 것도 탈진한 이설이 혼절하다시피 잠이 들었을 때쯤이었다.

저를 괴롭게 하는 황제가 밉다고, 다시는 황제에게 안기지 않겠다고 떼를 쓰면 기꺼이 달래 줄 용의가 있었다. 그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을 만큼 기분이 좋았고, 이설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설은 어젯밤 일에 대한 불평은 한마디 없이 황제가 다시 덮어 준 포단으로 꽁꽁 몸만 감쌌다.

“추워서 몸을 가리는 것이냐?”

“창피하고 부끄러워 그렇습니다.”

그래도 토라진 목소리로 툴툴거리는 걸 보니 간밤의 정사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한 것 같다.

“어차피 볼 건 어제 다 봤는데 뭐 하러.”

“그럼 오늘은 이만 보시지요.”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이설이 잽싸게 몸을 돌아누웠다. 몸이 아직 성치 않은지 겨우 그 정도 움직이고 난 뒤에 끙끙 앓는 소리를 냈지만 우찬은 모른 척했다.

황제에게, 하물며 침상에서 노골적으로 등을 보이는 이는 이설이 처음이었다. 어이가 없어 실소한 우찬이 이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낸 큰 소리에 깜짝 놀라 흠칫하는 작은 몸을 보니 이설도 홧김에 내뱉은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있었던 것 같다. 토라지고 삐쳐 봐야 초식동물은 초식동물이다.

웃음소리가 멎어들 때쯤 장지문 너머 인기척이 들렸다.

“폐하, 기침하셨사옵니까?”

새벽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윤 내관이었다. 이 시간까지 우찬이 일어나지 않으면 먼저 들어와 깨우곤 했는데 안에 이설이 있다는 걸 알아 섣불리 들어오지 못했다.

“아직 필요치 않으니 물러가 있거라.”

네, 하고 대답한 윤 내관이 사라지는 기척이 들렸다. 이어 이설이 조심스럽게 몸을 황제에게로 돌렸다. 지금은 몸을 함부로 쓰면 얼마나 아플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금일 조례는 아니 가십니까?”

“안 갈 생각이다.”

“…….”

“나는 정인을 홀로 침상에 남겨 두고 떠날 만큼 매정하지 않거든.”

농으로 한 말이었는데 이설은 아직 심각한 얼굴이었다. 어떻게든 우찬을 조례에 보내 빨리 비은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뻔히 엿보이는 불순한 생각에 기분이 상했다. 굳은 얼굴을 눈치채지 못한 듯 이설은 아직 무거운 눈꺼풀을 손등으로 부비적거렸다.

“나라의 정사를 돌보시는 황상께서 한낱 후궁 때문에 조례를 불참하시는 게 마음이 불편할 뿐입니다.”

“그 한낱 후궁이라는 게 너라는 건 알고 있느냐?”

굳은 표정이 한껏 누그러진 황제가 핀잔했다. 한 나라의 왕족이나 되는 신분에 왜 자꾸 스스로를 낮춰 생각하려고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러니 여기저기서 되도 않는 것들이 우습게 보고 맞먹으려 드는 건데 이설은 여태 그걸 몰랐다.

“겸손도 정도껏 해야 미덕이지.”

“네?”

“못 들었으면 됐다.”

들어 봤자 고치지도 못할 천성이다. 궁금함이 남아 있는 얼굴을 무시하고 동그란 머리만 쓱쓱 쓰다듬어 줬다.

한편 이설은 지금 이 시간이 몸도 마음도 모두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우선 온몸 여기저기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쑤시고, 결리고, 쓰라리고, 존재하는 모든 고통이 제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최악인 건 아래쪽 사정이다. 황제의 옥경과 손가락이 자비 없이 들락날락했던 좁은 구멍은 아무래도 찢어진 듯싶다. 피라도 난 게 아닐까, 손을 대 보려고 했지만 황제에게 안긴 자세가 어정쩡해 손이 닿지 않았다.

다리는 다리대로 저리고, 허리는 허리대로 끊어질 것 같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벅차 죽겠는데 황제가 자꾸만 다정하게 말을 건다. 빨리 비은궁으로 돌아가 봐야 하는데 황제가 저런 눈으로 봐 주니 총애받는 후궁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계속 여기에 머물고 싶어졌다.

황제가 저를 ‘정인’이라고 칭할 때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농담 어린 말이란 걸 아는 데도, 그걸 걸러 듣기가 쉽지 않았다. 주책없이 기대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애써 태연한 표정을 했다. 사실 아픈 것들을 참느라 그게 무척 어려웠다.

“이설아.”

“예.”

한참 동안 말없이 머리만 쓰다듬던 황제가 이설을 지긋이 불렀다.

“아프다는 말은 언제쯤에나 할 생각이냐.”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목을 지나 허리를 쓸며 내려갔다. 등과 허리를 위아래로 쓸어내리는 손이 따뜻했다.

“괜찮다는 말은 못할 테지.”

“궁으로 돌아가 의원을 부르면……,”

“의원 앞에서 네 다리를 벌리고 진찰을 받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

“애꿎은 의원 하나 잡고 싶으면 어디 그리해 보거라.”

뭘 어찌 잡으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둘째 치고 이설도 다른 이 앞에서 다리를 벌려 제 치부를 훤히 보여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의원은커녕 주 상궁이나 기연도 안 될 일이었다. 이설의 계획은 궁으로 돌아가면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삼일 밤낮을 꼬박 잠만 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오늘 밤까지는 너를 비은궁에 돌려보낼 생각도 없다.”

기겁을 하는 이설을 보고 황제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이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딱딱한 목소리가 침소 밖의 궁인을 찾았다. 동시에 황제는 포단으로 이설을 머리끝까지 덮어 가렸다.

윤 내관이 아닌 상궁 하나가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간밤에 정사가 거칠어 짐의 정인이 도통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으니,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가져오거라.”

노골적인 말에도 노련한 상궁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대답 후 침소를 나갔다. 다시 침소에 둘만인 것을 확인한 뒤 황제가 포단을 살짝 내렸다. 온몸이 새빨개진 이설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황제가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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