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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01)화 (101/300)

달의 황홀경

101화

중천에 뜬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이설은 비로소 태금궁 황제의 침소를 떠날 수 있었다. 보내기 영 싫은 눈치였던 우찬이었지만 틈날 때마다 비은궁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이설의 청을 더 이상 무시하기 힘들었다. 문밖에서 상소문을 잔뜩 든 관원이 쩔쩔매는 일 따위에 마음이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내일 아침 일찍 찾아갈 테니 꼼짝 말고 침상에 누워 있어야 한다.’

타고 갈 가마 앞까지 마중을 나온 우찬이 신신당부했다. 우찬과 함께 있는 내내 기운이 쭉 빠진 이설은, 이 몸으로 갈 곳이 어디가 있겠느냐며 볼멘소리를 툭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고개만 끄덕였다. 우찬이 다정해졌다고 해서 버릇없어지면 안 되는데, 몸이 아프니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다.

“마마, 궁에 도착했습니다. 조심히 내리셔요.”

유난히 오래 걸렸던 것 같은 시간이 지나고 가마 문이 열렸다. 화홍이 내민 팔을 붙잡고 가마에서 내렸다. 찌릿하게 울리는 하체의 통증을 참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화홍은 뭐가 그리 좋은지 아까부터 연신 싱글벙글이다. 어찌나 좋은 티를 내는지, 이설이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주 상궁에게 꾸중을 들을 정도였다.

“걸을 수 있으시겠어요?”

“응 괜찮다.”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걸으셔요.”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입이 귀에 걸린 화홍이 이설의 팔을 바짝 붙잡았다. 그 뒤로 주 상궁이 조용히 쫓아 걸었다.

대문 앞 돌계단에 막 발을 얹으려던 이설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길게 이어진 담벼락에 능소화가 만개했다. 요즘 통 신경을 못 썼는데 알아서 잘 자라 주는 걸 보니 뿌듯하다. 제가 보기에 예쁜 것이 남들 보기에도 예쁘다고, 궁인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자자하다 들었다. 오가는 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꽃구경을 하는 것을 심심찮게 봐 왔다.

“왜 그러십니까, 마마?”

“저기 누가 있는 것 같은데.”

멀리 담벼락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능소화를 한 번, 다시 아래를 한 번.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것 같다.

걸음을 멈춘 이설을 따라 화홍도 덩달아 고개를 옆으로 쭉 뺐다. 그리고는 단번에 ‘아아’ 하고 아는 척을 한다.

“아마 창화군 나리인 것 같습니다.”

“창화군?”

“도국에서 유학 온 후궁 소생의 왕자인데 칠 년째 저희 황궁에서 지내고 계십니다.”

“황궁에서 산다고? 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황궁 북쪽 끝에 살고 계시는데 평소에는 궁 밖으로 나오실 수 없습니다. 우장절이 끝난 뒤에나 서너 달쯤 자유롭게 다니실 수 있고요. 인물이 저리 출중하신데 한 해에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되지도 않으니, 아까워 죽겠습니다.”

화홍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멀리 햇빛에 이목구비가 가려져 인물이 얼마나 출중한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키가 훤칠하니 전체적으로 옷맵시가 보기 좋았다.

타국에서 유학 온 왕족이 황궁 내에 기거하는 것도 의아한데 평소에는 궁 밖으로 나올 수조차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설에게 주 상궁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도국과의 북부 경계 수호 조약을 맺으며 금국으로 유학을 오신 분입니다.”

주 상궁의 말을 듣고 이설이 잠깐 생각을 해 보았다. 수호 조약을 맺으며 금국으로 유학을 온 후궁 소생의 왕자.

대략 그 사정이 상상이 된다.

“경계선 주둔하고 있는 주 병력은 도국 군사들이겠군.”

“예 하지만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은 대부분 금국인입니다.”

금국과 도국이 맞닿아 있는 북부 국경은 금국이라고 하기에는 일 년 내내 날이 좋지 않고 땅이 척박하여 군병이 항시 대기하기에는 사정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빈 곳으로 남겨 두자니 이민족의 침입에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니 귀찮고 국방비가 줄줄 새어 나가는 국방 책임은 도국에 떠넘기고 혹여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왕족 하나를 볼모로 데려왔을 것이다.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신경 꽤나 써 주는 생색을 내려 황궁에 거처를 마련해 주기는 했지만 허락 없이 궁 밖으로는 한 발짝 나갈 수도 없는 신세를 만들어 주며.

“창화군께서도 저희 궁의 만개한 능소화 소문을 듣고 찾아오셨나 봅니다. 그림으로 담기에 이보다 훌륭한 경치가 황궁 어디에 있겠어요?”

뭘 그리 열심히 하고 있나 했는데 그림을 그리고 있었나 보다.

얼굴 형체도 잘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을 이설이 유심히 쳐다봤다.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이설을 보고 화홍이 오해라도 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마마께서 원치 않으시면 쫓아내 드릴까요? 아니면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라도……,”

“그러지 말거라.”

성질 급한 화홍이 금방이라도 달려가 사내를 쫓아내 버릴까 이설이 말을 끊었다.

“화폭에 담긴 능소화가 궁금해서 쳐다본 것이니 괜한 짓 하면 안 된다, 화홍아.”

남의 담벼락 앞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궁인들도 참는 이설이다. 공들여 가꾼 꽃을 저 말고 다른 사람도 예뻐해 주는 게 좋아서, 이설은 까치발을 하고 담장 안을 구경하는 궁인들도 내버려 두었다. 몰래 꽃을 꺾어 가는 고약한 작태들이 언짢긴 하지만 이설이 나서지 않더라도 비은궁 궁인들 눈에 띄었다간 크게 사달이 나니, 그런 일도 빈도수가 꽤나 줄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것 따위가 뭐가 대수라고 쫓아내기를 한단 말인가. 몸 상태만 좋았어도 화폭에 담긴 그림이 궁금해 먼저 다가가 그 주변을 기웃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럼 다음에 제가 창화군께 그림을 보여 달라 직접 청해 보겠습니다. 일단은 안으로 드시지요.”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날이 차다며 화홍이 팔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이설도 빨리 자리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막 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내내 옆모습만 보이던 사내가 고개를 틀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 눈이 마주친 건지 몰랐는데, 사내가 예의 있게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이설도 마주 허리를 숙이려다 제 허리는 오늘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고개만 까딱하며 가볍게 묵례했다.

마중 나온 궁인들은 연신 웃는 얼굴로 이설을 귀찮게 하다가 주 상궁 불호령에 뿔뿔이 흩어졌다. 화홍의 말로는 아마 담장 밖에 창화군을 구경하러 간 것일 거라고 했다.

침상에 몸을 누이고 한결 편안해진 이설이 침구 정리를 해 주는 화홍에게 장난 가득히 웃음 진 어투로 물었다. 잘생긴 사내가 그리 좋냐고. 그러자 화홍이 당연한 걸 물으신다는 듯 부끄러운 내색 없이 ‘예’ 하고 재깍 대답했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게 묻는다.

“마마께서도 황제 폐하의 수려하고 훤칠한 인물을 보고 연모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사내 인물 안 보는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마마께서 여인이라는 말씀은 아니지만 아무튼 뭣도 모르는 정신 나간 치들이 인물 볼 것 하나 없다 심성만 고우면 된다 헛소리들을 하는데,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얘기는 귀담아들을 필요 없습니다. 심성 곱고 창창한 출셋길이야 두말할 것 없고, 사내란 모름지기 인물도 출중해야…….

때 이른 시간에 잠자리를 봐 주며 쫑알쫑알 열변을 토하는 화홍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황제를 연모하는 마음을 화홍이 알고 있다면 다른 궁인들도 모두 눈치챘을 테다. 혹 황제도 알고 있을까.

내심 황제가 알아줬으면 하면서도 들킬까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밤이 다 찾아올 때까지 이설 마음만 헤집어 놓았다.

*

화창한 날. 이른 아침 황제와 조찬을 들은 뒤 학운관에서 태자 없이 소운과 둘이 천자 공부를 빙자한 담소를 나눴다. 지난 뱃놀이 때 그냥 한 말은 아니었는지, 황제는 정말로 이설이 태자와 함께 수학하는 걸 금했다. 대신 학운관 출입만은 막지 않아 오며 가며 태자를 만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학운관에서 돌아온 뒤에는 도월소에 살고 있는 금잉어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유강이 궁 밖에서 사 온 금잉어 대여섯 마리가 지금은 몇 배로 불어나 은근히 처치가 곤란하게 되었다.

손을 씻고 침소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란이 찾아왔다. 빈손으로 찾아오는 법이 없는 차란은 오늘도 양손에 한 짐 가득이었다. 주섬주섬 가지고 온 물건들을 모두 꺼내 보여 주고 난 뒤에야 이설과 편히 마주 앉았다.

“지난번 잠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예. 황궁 밖은 처음이라 그런지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폐하께서 마마의 탄신일 선물을 무척 고심하셨는데, 마마께서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렇습니까?”

황제가 저를 위해 고심하였다니 사실이든 아니든 듣자 하니 기분이 좋다. 내심 흐뭇한 속마음을 숨기며 웃음만 지었다.

“헌데 받으신 선물이 그것만은 아니실 테지요?”

의미심장하게 웃는 차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설은 당황하지 않고 어깨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오늘 머리는 황제가 손수 묶어 주었다. 태자의 머리카락보다 얇고 풍성하여 손질하기 어렵다는 불평과 달리 여느 궁녀 못지않게 솜씨가 좋았다.

“금과 비단, 도국에서 들여온 세공품들과 도자기도 함께 받았습니다.”

“…….”

“그리고 폐하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차란이 기다리던 대답을 들려준 후에야 이설은 마른 입술을 차로 축였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한 차란은 놀라지도 않고 그저 생긋 웃어 보였다.

“무척 값진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부디 귀하게 여겨 주시옵소서.”

“여부가 있겠습니까.”

잔잔하게 흘러가는 대화지만 이설은 당부와도 같은 차란의 단호함을 여실히 느꼈다. 황제의 귀한 이름을 혹시라도 엄한 곳에 발설할까, 하찮게 대할까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사실 이설은 황제의 이름을 아예 기억에 붙잡고 있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 중이었다. 세상천지에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되지도 않는 그 이름을 제가 알고 있다는 게 그렇게도 부담일 수가 없다. 그리고 실수로라도 남에게 발설할까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황제가 왜 자신에게 제 이름을 알려 주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가짜 이름을 알려 주고 비밀을 엄수할 수 있는지 시험을 해 보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쨌든 이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금우찬’ 이 세 글자를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 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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