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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02)화 (102/300)

달의 황홀경

102화

“비가원(庇迦湲)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커다란 연못과 꽃나무가 잔뜩 있던 곳을 말씀이시죠?”

“예. 저희 집안 상단이 소유하고 있는 사유지입니다.”

“듣기로는 폐하께서 상황으로 물러나시면 황궁을 나와 살게 될 곳이라 하던데요.”

차란이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 끝을 비죽였다. 뭔가 단단히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폐하께서 헐값에 사들이시긴 했지만 아직은 저희 상단의 사유지입니다.”

“헐값이요?”

“예, 아주 헐값이지요. 거저 가져가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폐하께서 설마요.”

암만 황제라도 남의 사유지를 사는 데 충분한 값을 치르지 않을 수는 없었을 거다. 황제의 말을 빌리자면, 뼛속까지 장사치인 차란의 성에 찰 값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황제도 거저 가져가듯 값을 치렀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달리 깊은 고민 없이 자연스레 나온 말이었는데 문득 저를 쳐다보는 차란의 눈빛이 이상하다. 흘겨보는 것 같기도 하고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하였습니까?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는지…….”

“서운해서 그렇습니다.”

“예?”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표정의 차란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는 마마께서도 폐하의 편을 먼저 들어 주시니, 제가 조금 서운해서 그렇습니다. 크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모양의 얼굴을 하고 대놓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으면서 마음 쓰지 말라니, 참 곤란하다.

매사에 능청스럽고 뻔뻔한 게 일상인 차란이 기 죽은 얼굴로 앉아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모르면 모를까, 소운과 단둘이 있던 모습을 우연히 보고 난 뒤라 더 그랬다.

그제 서고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기연을 보러 대련장에 들렀다. 훈련에 방해가 될까 싶어 잠깐 얼굴이나 비추고 오려고 했는데 화홍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대련장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화홍이 기연의 훈련에 눈을 못 떼는 동안 대련장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이설의 눈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뭔가를 봤다고 하기에는 눈 깜짝 할 찰나이긴 했다. 앞서 걸어가는 소운의 뒤를 쫓아 차란이 팔을 잡아 돌려 세웠고 소운이 매몰차게 차란의 손을 걷어 치웠다. 대련장에서부터 울리는 기합 소리에 잘 듣지는 못했지만 차란은 아마 소운의 손목에 난 상처를 걱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의 소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란만 조용히 노려보다 자리를 떠났다. 당황한 이설이 우물쭈물 하다가 자리를 떠나기 직전까지도 차란은 소운이 떠난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어차피 이 황궁에 제 편이야 누가 있겠습니까.”

기운 빠진 목소리를 면전에서 듣고 있으니 그제 모습이 생각나서 마음이 약해졌다. 두 사람의 사정이야 깊이 알 수는 없지만 이설은 소운과 차란 두 사람 모두에게 친절하고 싶었다. 입궁 후 누구 하나 제게 살갑지 않았을 때에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어 준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매정하고 싶지 않았다.

“저도 저지만, 누구보다 폐하께서 비 승상을 아끼신다는 걸 알지 않으십니까?”

“소신만큼 폐하께 뒷전인 자는 황궁 어디에도 없습니다.”

평소에는 농처럼 한차례 웃고 지나가면 될 말인 것을 오늘따라 씁쓸하게 웃는 저 얼굴로 내뱉는 모든 말이 진심처럼 느껴진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도 부쩍 수척해진 것이 유난히 피곤해 보이긴 했다.

평소 나누던 담소와 분위기가 달라 이설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니 이내 차란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표정 마옵소서, 마마. 그저 소신의 농이었습니다. 마마께서 폐하의 편을 들어 주시는 게 당연한 것을, 제가 왜 서운해하겠습니까?”

“…….”

“송구합니다. 제 농이 너무 짓궂어 마마께 결례가 된 것 같습니다.”

금세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차란이 정중히 사과했다. 농이 아니었던 게 분명한데, 캐물어 봤자 차란이 속마음을 드러낼 것 같지도 않고 괜히 둘 사이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도 싫어서 이설도 별말 없이 웃어넘겼다.

평소 알고 있던 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 차란이 황제의 얘기를 꺼낼 때마다 속으로 뜨끔뜨끔 놀랐다. 며칠 전 황제와 동침했다는 사실이 황궁은 물론 주안 바닥까지 파다하게 퍼졌다고 들었으니 차란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설은 사내인 자신이 황제에게 안겼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딜 만큼 부끄러웠다.

“……시는 태자 전하 때문에 요즘 폐하께서도 골치가 아프신 모양입니다. 이렇게 보면 전하도 참 보통은 아니…… 마마?”

“……예?”

차란은 동침의 ‘동’ 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혼자 제발 저려 민망해진 이설이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차란이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듯 정신을 차렸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혹시 아직도 몸이 좋지 않으신 건 아니신지 염려 되옵니다만.”

걱정 가득한 눈이 이설을 바라본다. 순간 할 말을 잃은 사이 차란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사정 봐주셨을 거라 기대는 하지도 않습니다. 효과 좋은 약들을 준비해 드릴 수 있으니 말씀만 하시지요.”

“아, 아닙니다. 저는 괜찮으니 그……, 신경 써 주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몸은 거의 나아지고 있었다. 가끔씩 아래가 쓰라리고 오래 걷다 보면 엉덩이 부근이 뻐근하긴 했지만 앓아누울 정도는 아니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고 창피할 일만 만들었다.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을 모르고 차란의 걱정은 진심처럼 보였다.

오늘만큼 차란이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줬으면 하고 바란 적이 없다. 눈치가 백단인 차란이 이설의 밍숭맹숭한 태도를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피곤하니 이만 물러가 달라 말할 위치가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본인은 그럴 성격도 못됐고 설령 그렇게 말했다가 제 몸이 아직 안 좋은 줄로 알고 좋은 약이라도 진상하겠다 호들갑을 떨까 걱정이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오늘따라 무척 한가하신가 봅니다.”

“제가 한가한 날이 언제가 있겠습니까. 그제부터 퇴청도 못 하고 녹사관(錄伺館) 쪽방에서 눈만 붙이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수척해 보이던 이유가 이런 것일까. 저와 의미 없이 이런 담소를 나눌 바에야 사가로 돌아가 편히 한숨 자는 게 더 나을 텐데 왜 여기 앉아 시간만 축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유독 별나게 구는 차란을 이리 저리 살피기를 오래 지나지 않아 곧 내내 궁금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제 발로 찾아왔다.

“태감 단소운, 기별 없이 루 소의 마마를 뵙나이다.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밥은 제때 먹었느냐 설아.”

황제와 소운이 찾아왔다. 우찬을 보고 표정이 밝아졌다가 뒤이어 들어오는 소운을 보고 반사적으로 차란의 눈치를 살폈다. 동요하지 않는 걸 보니 차란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싶고, 미묘하게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소운은 몰랐던 것 같다.

“예. 폐하께서도 수라는 잘 드셨는지요.”

“짐은 조례가 이제 끝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근데 승상이라는 놈은 내 정인과 함께 태평히 차나 마시고 있으니, 퍽 좋은 광경이구나.”

분명 이설에게 하는 말이면서도 시선은 차란에게 고정이다. 차란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설을 봤다. ‘보십시오, 이 황궁에는 제 편이 아무도 없잖습니까’ 하고 말하는 것 같다.

달달 외운 말처럼 차란이 ‘그런 것이 아니오라,’ 하고 이어 하려던 말이 있었는데 우찬이 ‘듣기 싫다’ 하고 차갑게 무시했다.

“날이 좋아 산책이나 하고 올 테니 소운이 너는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거라.”

“예, 폐하.”

“설아, 이만 나가자.”

자리에 멀뚱히 서있는 이설의 팔을 붙잡은 우찬이 후원으로 향했다. 얼떨결에 따라 나가며 뒤를 돌아보자 소운이 마지못한 얼굴로 자리에 앉고 있다. 후원으로 나온 뒤 우찬이 양쪽 문을 닫았다.

이설을 발견하고 뛰어오던 삼설이가 우찬을 보고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수풀 뒤로 숨었다.

이설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우찬을 봤다.

“차란에게 빚진 것이 있었는데 방금 되갚은 참이다.”

차란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이 끔찍할 만큼 싫은 게 분명한 우찬이 말했다. 이설이 생각하기에는 빚을 지고 주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신분 차가 너무 명확하게 크지 않나 싶었지만 우찬이 빚을 졌다 하니 그런가 보다 했다. 마침 갚기도 했다 하였고.

“무슨 빚을 졌고, 어떻게 되갚았는지 묻지 않느냐?”

천천히 후원을 거닐며 우찬이 물었다. 이설은 나무 아래에 돌을 쌓아 단을 만든 곳으로 우찬을 안내했다.

“빚진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어떻게 되갚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

“비 승상께 소운 님과 독대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너도 제법 눈치가 늘었구나.”

우찬이 돌로 쌓은 단 위에 걸터앉았다. 물을 뿌리고 난 뒤라 젖은 흙이 금색 비단옷을 보기 싫게 더럽혔다. 이설이 입고 있던 장옷이라도 벗어 돌 위에 깔아 드리겠다 했지만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으며 이설을 제 옆에 앉혔다.

“하루 이틀 쯤 쉬게나 해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저딴 되먹지 못한 청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열어 둔 창으로 보이는 차란을 노려보며 우찬이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괜찮을까요?”

“안 괜찮을 건 또 뭐겠느냐.”

“…….”

“걱정은……. 흑영이 안에 있으니 신경 쓸 것 없다.”

“흑영 님이 들어오는 건 보지 못했는데요?”

“네 눈에 들킬 흑영이었으면 내 등 뒤를 맡기지도 않았지.”

우찬이 가는 곳 어디든 흑영을 비롯한 호위군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걸 알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가끔씩 우찬과 단둘이 있다고 여기고 있을 때도 우찬의 손짓 한 번에 어디선가 모습을 쓰윽 드러내는데, 그때마다 이설은 저 혼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찬의 말대로 제 눈에 들키는 호위군이라면 황제의 뒤를 맡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겸연쩍은 얼굴로 콧잔등을 긁으며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마땅한 얘깃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두 사람의 사정이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 얘기는 원점이다.

“싸우고 있는 걸까요?”

“그렇겠지.”

“말리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흑영이 있다 하지 않았느냐.”

“꼭 흑영 님이 나설 일이 아니더라도 혹시 모르니…….”

이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사실 이설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정이야 잘 모르지만 케케묵은 감정의 골은 결국 얘기를 나눠 봐야 털어 낼 수 있을 거라는 걸.

“네가 보기에는 저 둘이 어떻더냐?”

“뭐가, 말입니까?”

“네 눈치가 얼마나 늘었는지 봐야겠다. 네가 지금까지 본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것 같은지 말해 보거라.”

돌연 이런 시험을 왜 당해야 하는 걸까. 난감해진 이설이 음, 하고 소리를 냈다.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사오나……,”

“그냥 얘기하면 된다.”

“비 승상께서 소운 님을 굉장히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에 반해 소운 님은 좀……, 음……,”

“비차란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보다도 못한 놈처럼 무시를 하고 있다?”

우찬의 표현이 과격하긴 했지만 이설의 생각이 딱 그렇긴 했다. 어쩌다 마주치면 똥 묻은 개라도 만난 듯 불쾌한 얼굴인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차란의 얘기만 나와도 굳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냥 좀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했다.

이상한 건 차란도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이런 취급을 받으면 같은 반응을 보이기 마련인데, 차란은 거의 매번 소운에게 태연했다. 부러 친절하고 상냥하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무시를 하고 자리를 피한 적은, 이설이 느낀 바로는 없었다.

우찬이 완성한 문장에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은 이설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찬은 맞다, 아니다 대답 없이 이설의 목에 살짝 입을 맞췄다.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제가 맞았사옵니까?”

“아니 틀렸다.”

우찬의 눈빛은 다정할지언정 말투는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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