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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03)화 (103/300)

달의 황홀경

103화

“네가 보기에는 오직 차란 만이 소운의 뒤를 쫓는 것처럼 보이더냐?”

“두 분이 함께 있는 걸 몇 번 본 적 있습니다. 그때마다 소운 님의 표정이 좀…….”

요전 번 대련장에서 봤던 모습을 상기하며 이설이 애매하게 말끝을 흘렸다.

“그 표정이라면 나도 알지. 벌써 몇 년째 보고 있지 않겠어.”

“하온데도 제가 틀렸단 말씀이십니까?”

틀렸다 혼이 난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혼자 토라진 이설이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며 되물었다. 우찬은 그 모습에 헛헛하게 웃고는 흐음, 하고 턱을 문질렀다.

“소운이 차란에게 화가 난 것은 맞다. 어찌나 단단히 화가 났는지, 요즘은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무시를 하고 있지.”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차란을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첩은 폐하의 말씀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설은 조금 억울해졌다. 우찬의 하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설이 눈치가 없거나 배움이 더뎌서라기보다는 우찬의 말이 그냥 앞뒤가 없었다.

또 저를 놀리시는 것 같기도 하고.

“소운의 집안에 대해서는 일전에 들은 바가 있지?”

난데없이 소운의 집안 얘기를 꺼내는 우찬에게 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운의 끝없는 학구열과 방대한 지식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이설에게, 우찬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소운의 집안과 어린 시절을 얼추 알려 주었다.

“금국 개국공신 가문들 중에서도 가장 권세가 높다는 나단성 단 가의 직계 혈족이라 들었습니다. 머리가 총명한 건 그 집안 내력이라며…….”

“그래. 손 귀한 권세가의 셋째 아들이지. 그에 반해 차란은 일개 상단의 아들이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일개 상단의 아들인 차란이 어쩌다 권세가의 아들도 모자라 당시 황자였던 우찬과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지금과 다를 바 없을 성정에 심지어 황자이기까지 했던 우찬이 도대체 왜 차란을 참고 견뎌 주었을지.

“귀족은커녕 그 조부가 평민 신분을 돈으로 샀다는 얘기가 돌 정도야. 물론 헛소문이지만 소운에 비하면 형편없는 출신이라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다.”

혹 소운이 신분 격차를 운운하며 차란을 멀리하는 것일까 생각도 해 봤다. 하지만 여태껏 봐온 소운은 무뚝뚝하고 사리 분별이 확실할 뿐 그런 냉담한 모습은 없었다.

이설은 소운과 제법 많은 담소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소운의 사적인 얘기를 들은 적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소운은 하다못해 손목에 난 상처조차도 이설에게 보이기 싫은 듯 그 위를 검은 천으로 칭칭 동여매고 아픈 티도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소운에게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지.”

“……”

“그 한참이나 모자른 차란에게 소운이 연정을 품은 게 화근이었다.”

“예?”

예상치도 못한 우찬의 말이 이설의 멍한 머리를 세게 후려치는 듯했다. 이설이 화들짝 놀라며 내는 소리가 후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도 덩달아 놀라 하늘로 날아가며 귀 따가운 소리로 울었다.

우찬은 이설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사내 간의 연분을 나누는 것이 흔한 일이라지만 신분의 격차는 무시하기 힘든 법이지. 게다가 서로 이름을 나눈 천명도 아니지 않느냐. 나단성의 단 가가 발칵 뒤집어진 게 예삿일도 아니었다.”

우찬은 덤덤하게 얘기했지만 사실 당시에는 보통 일이 아니었을 거다. 사내 간이든 여인 간이든 동성 간에 연분을 나누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지만 신분을 뛰어넘는 연정은 여전히 드물다. 이름을 나눠 가질 정도의 강한 천명이 아니고서는 혼인을 하는 경우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질질 끌다 결국 이 꼴이 난 게지.”

“그럼 소운 님께서는 아직……, 아직 비 승상을 그……,”

연모하시는 겁니까?

이설은 이 한마디를 입안에 한참 굴릴 뿐 우찬에게 묻지 못했다. 누군가 애틋하게 품은 연심을 당사자가 아닌 타인에게 묻는 게 실례일 줄 알면서 이 얘기의 끝이 궁금했다.

우찬은 대답 대신 갑자기 이설에게 손목을 내어 보였다. 버릇처럼 고개를 피하려던 이설은 제 것과 같은 이름이 새겨진 반대쪽이라는 걸 알고 머쓱하게 볼을 긁었다. 우찬은 얼핏 표정이 굳어지는 듯했다.

“소운의 손목에 난 상처를 기억하고 있느냐?”

“예. 얼핏 본적이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손목에 흐릿한 흉터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다시 봤을 때는 같은 위치를 다시 다친 듯 상처가 선명했다. 그날이 아마 우찬이 소운을 데리고 일찍이 자리를 떠났던 그때였을 거라고 기억한다.

“그 상처는 소운이 품은 연심의 증표다.”

“……폐하, 신첩은 폐하의 말씀이 너무 어렵습니다.”

이설이 처진 눈으로 한숨과 함께 말을 토해 냈다. 한껏 진지한 얼굴이었던 우찬이 옅게 웃으며 이설의 손목을 살며시 붙잡았다. 우찬의 단단한 손목과는 뼈의 종류마저 다른 듯 한 손에 휘어 잡히는 하얀 손목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소운이 이 위에,”

“……”

“차란의 이름을 억지로 새겼다.”

우찬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며 이설의 손목 위를 손톱으로 아프지 않게 쓰윽 긁었다. 생각도 해 본 적 없던 소운이 상처에 대해 알게 된 이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금세 살이 붉어지는 제 손목만 멍하니 쳐다봤다.

“불에 달군 대못으로 생살을 지져 차란의 이름을 적었어.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는 그 짓을,”

말을 하면서도 다시금 드는 생각에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우찬이 말을 끊고 돌연 허탈하게 웃음소리를 냈다.

“벌써 네 번이나 했지.”

“어떻게 그런…….”

이설은 차마 말도 잇지 못했다.

“어떠냐 설아. 네가 보기에는 소운이 아직 차란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것 같으냐.”

우찬이 쥐고 있던 힘이 빠지며 손목이 슬그머니 다리 아래로 내려왔다. 손톱으로 긁어내린 살갗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워졌다.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유년기를 함께 보낸 친우 사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아 매번 궁금하기는 했었다. 대련장에서 의도치 않게 둘을 보고 난 뒤에는 혼자 있던 시간에 둘 사이를 어림잡아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모든 관계에는 그만의 비밀이 있고 상처가 있는 법인데, 괜한 호기심으로 그 속을 알아 버렸다.

“왜 그렇게까지…….”

“소운이 처음으로 그 이름을 억지로 새긴 날 나도 그리 물었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소운 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이설이 중얼거리는 말에 우찬은 고개를 저었다.

“연모해서 그랬다 대답하더구나. 다른 변명도 없었어. 그저 연모해서 그랬노라, 그리 대답했다.”

우찬이 씁쓸히 웃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설은 가늠할 수 없었다. 옆에 둘 수도 없는 이에게 연정을 품은 그 마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심하다 여기는 것인지 드러난 얼굴의 표정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

멀리 아직 창 안으로 두 사람이 보인다. 어렴풋이 보이는 차란은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있는 듯했고 얼굴 너머 감정의 균열은 보이지 않는다. 늘 그렇듯 적당히 태연하고 적당히 뻔뻔하다. 차라리 소운을 봤더라면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대충 가늠이라도 하였을 텐데.

“헌데 폐하.”

살랑거리는 소운의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설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우찬은 뜬금없이 제게 농을 치거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기는 하지만, 아끼는 친우의 속사정을 터놓기에는 기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설은 몰랐어도 되는 얘기였다. 도리어 이제 두 사람을 대하는 이설은 늘 마음이 불편할 것이고 안절부절못할 소심한 성정을 황제가 예상하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눈치가 있는 듯하기도 하고, 없는 듯하기도 해.”

황제는 이설이 꼭 들으라는 듯이, 또박또박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한 연유로 소운을 곧 금국에서 내보낼 것이다. 허니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고, 소운에게 더 이상 정을 주지도 말거라.”

‘이러한 연유’라고 하니 대단히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연모하는 이의 이름을 억지로 새겼기로서니 그 때문에 나라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말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듣지 못한 다른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황제가 소운에게 이렇게까지 냉담할 리 없었다.

이설이 머릿속을 정리해 보려고 애쓰는 사이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운 님을 추방,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믿을 수 없다는 그 얼굴에 희미하게 깔린 원망이 고스란히 우천을 향했다. 그 눈을 내려다본 우천이 미간을 팍 구기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추방이라니? 내 무슨 명분으로 소운을 추방하겠느냐?”

“폐하께서 방금 소운 님을 금국에서 내보낼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찬이 눈썹 한쪽을 찡그리며 했던 말을 곱씹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정정하마. 소운을 기약 없이 도국 외교 사신으로 보낼 생각이니 소운에게 너무 정을 주지 말라는 말이었다. 또한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소운이 황명에 불복할 경우 내가 내리는 어떤 결정에도 나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

“나 역시 소운을 아끼기에 내리는 결정이다.”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어쨌든 우찬이 이설에게 변명하기 위해 덧붙이는 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우찬이 소운에게 한없이 관대하다는 건 이설뿐만 아니라 황궁의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황제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설은 황명에 반기를 들 수 없다. 원망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이 곁에서 떠난다는 사실에 서운하고, 떠나는 이유를 알기에 조금 안타까울 뿐.

“폐하의 결정에 여부가 있겠습니까. 원망치 않사옵니다.”

“그럼 작은 산은 하나 넘겼고, 이제 큰 산이 하나 남았구나.”

짐짓 심각하게 오가던 대화의 긴장이 그제야 슬쩍 풀어졌다. 황제가 내쉬는 긴 한숨에 장난 섞인 과장은 없었다.

저도 이렇게 서운한데 태자는 오죽할까. 황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제 스승 아끼는 마음이 말도 못 할 지경이다. 소운이 손목에 검은 천을 두르고 나타난 다음 날에는 직접 의원까지 데려왔을 정도다. 황제가 곤란해할 만했다.

쿵―

서로 마주 보며 웃는 사이 멀리서 묵직한 소음이 들렸다. 이설이 놀라 벌떡 일어나고 그 뒤를 따라 우찬이 느릿하게 일어나 섰다. 멀리 한 지점을 함께 바라보는 시간이 잠시 지난 뒤 우찬이 이설의 손을 잡아 함께 자리에 앉았다.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운이 그 성질머리를 못 이기고 화병이라도 던졌나 보지. 신경 쓸 것 없어.”

“소운 님이 도자기를 던졌다고요?!”

오늘 정말 소운의 갖은 얘기들을 다 듣는다. 남의 얘기를 더 듣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이 이상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 놀란 눈을 본 우찬이 별로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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