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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04)화 (104/300)

달의 황홀경

104화

이설은 무릎을 모아 세워 턱을 올렸다. 제 일도 아니고 그저 타인일 뿐인 두 사람의 사정을 들은 것인데 어쩐지 기분이 울적해졌다. 생살을 불로 지지면서까지 연을 만들고 싶었던 소운이 안타깝지만 달리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직접 말하겠다 하여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인데 괜히 성질이나 돋았나 보구나. 쓸모없는 놈.”

“승상께서야 말로 지금 가장 속상하실 분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씀 마시옵소서 폐하.”

보통 때 같았으면 우찬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찬은 삐딱한 시선을 멀리 차란에게 보내며 코웃음을 쳤다.

“속이 상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일을 이렇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기껏 승상 자리에 앉혀 놔 줬더니 하는 짓거리 좀 보거라. 소운이 태감이 되겠다 고집을 부린 것도 다 비차란 때문이다. 애꿎은 소운 출셋길만 막막해진 게지.”

우찬이 항상 차란을 무시하고 하대하긴 하지만 지금만큼 진심을 다해 신랄하게 비난한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잠자코 우찬의 말을 듣고 있던 이설은 고개를 갸웃했다. 소운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차란이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구나.”

무릎에 턱을 괴고 있던 이설이 고개를 돌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신첩이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요.”

더는 캐묻지 않겠다는 듯 이설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우찬도 뒤따라 일어나 차란과 소운을 등지고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 옆에 이설이 함께 걸었다.

“담장에 꽃이 제법 봐 줄 만하더구나.”

“능소화입니다. 사실 이맘때쯤이면 지고 없어졌어야 하는데 그럴 기미가 안 보여 걱정입니다.”

“꽃이 지지 않아 불만이라는 말이냐?”

“불만인 것은 아닙니다만, 꽃이 피는 때가 있으면 지는 때도 있어야지요. 그래야 다음 꽃이 제때 필 수 있습니다.”

이설도 오랫동안 지지 않는 능소화를 보며 내심 기분이 좋았을 때가 있었다. 탐스럽게 만개한 능소화가 어찌나 보기 좋은지, 아침저녁으로 담장을 돌며 꽃구경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도 능소화가 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처음 활짝 피어났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선명한 다홍색의 꽃잎은 어제 갓 피어난 꽃처럼 생기가 넘쳤다. 이설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한철 아름답게 피어나 결국에는 지고야 마는 게 꽃이다. 지는 그 순간이 아쉽기는 해도 내년 이맘때쯤에는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 위로가 된다.

그런데 비은궁 담장에 능소화는 도무지 질 생각을 안 한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궁 안에 심어 놓은 꽃들이 다들 이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오래 자라고 개화 시기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능소화만큼 오랫동안 피어 있는 꽃은 아직 없었다.

“오래 볼 수 있으니 좋다 생각하면 그만인 것을, 별걸 다 걱정하고 사는구나.”

나란히 걷던 우찬이 이설을 가까이 당겨 안았다. 며칠 전 담장에 턱을 괴고 서서 짐짓 심각하게 고민 중이던 때에 주 상궁이 했던 말을 우찬에게 똑같이 들어 버렸다. 두 사람이 틀린 말은 한 것은 아니다. 한창 예쁘게 핀 꽃을 감상할 수 있는 때는 길지 않으니 피어 있는 동안 그저 한없이 기분이 좋으면 되는 것이다.

“내친김에 같이 꽃이나 구경하러 가겠느냐?”

“두 사람은 어찌하고요?”

“두 사람 때문에 언제 질지도 모르는 꽃구경을 놓칠 수는 없지.”

“꽃은 이미 보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너와 본 적은 없지 않으냐. 헌데 왜 이렇게 내 말에 토를 다는 거지? 나와 꽃구경을 가는 게 싫거든 싫다 말하거라.”

우찬은 말을 그리하면서도 이설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더 단단히 주었다. 이설은 아무도 보지 않을 얼굴이 부끄러워 우찬의 팔에 묻고 웃음을 지었다.

*

궁 안쪽에서 담장에 팔을 걸쳐 턱을 괸 이설은 벌써 한참을 자리에 서서 고민 중이었다. 흰 소매에 흙이 묻는다며 성화인 화홍에게 손을 저어 휘이 물린지도 한참 지났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도 키가 한참 모자라 밖에서는 보이지 않을 연화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가까이 왔다.

“아직 이러고 계십니까 마마?”

“쉿, 목소리 낮추거라 연화야.”

“그냥 궁으로 불러 그림이 보고 싶다 속 시원하게 말씀하세요. 이 능소화도, 담장도, 궁도 다 마마의 것인데 따지고 보면 저 그림도 마마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담장 밖으로 눈 한번 못 떼던 이설이 연화의 말을 듣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어찌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담장 너머를 쉬이 보기 위해 함 위에 올라가 있던 이설이 아래로 폴짝 뛰어 내려왔다. 그 옆에서 꾸벅꾸벅 졸던 삼설이가 깜짝 놀라 일어나더니 나무 뒤로 재빨리 사라졌다.

“내 능소화를 그렸다고 해서 어찌 저 그림이 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연화야 그런 생각하면 못쓴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요. 마마께서 며칠째 구경만 하시고 보여 달라 말도 못 하시니까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보여 달라 청하는 건 굉장히 실례가 되는 일이라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아직 완성도 안 된 그림 그리는 모습을 몰래 구경하는 건 어떻습니까?”

가끔씩 연화가 이렇게 당돌하게 허를 찌르면 이설은 대꾸할 말이 없다. 틀린 말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설이 되도 않는 고집으로 일단 우기고 보는 성정도 아니었다.

말문이 막힌 이설이 괜히 소매에 묻은 흙먼지를 터는 둥 마는 둥 하자 옆에서 흙을 고르던 단향이 까르르 웃었다. 놀란 이설이 쉿, 하고 검지를 입에 댔다.

“정 마음이 불편하시면 그림 얘기는 빼고 안으로 들어와 차나 한잔하자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창화군께서는 인품도 바르고 온화하다 소문이 자자하시니 거절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것보다도 마마께서 권하시는 차를 황궁 안에 누가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연화 말에 단향이 잽싸게 끼어들며 다시 까르르 웃어 댔다. 이번에는 연화까지 합세하니 그 소리가 담장 밖으로 넘어갈 듯 컸다.

며칠 전부터 이설은 우찬과의 조찬 후 일과 하나가 생겼다. 도국에서 왔다는 창화군이 담장 밖에서 능소화 그리는 모습을 몰래 구경하는 것이었다. 첫날에는 그저 ‘그림을 그리고 있구나’ 하고 잠깐 들여다보고 넘어갔는데 생각할수록 그게 신기한 일인 것이다.

글씨는 제법 정갈하게 잘 쓰는 편이긴 해도 그림만 그렸다 하면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지경인 이설에게 그림은 하늘이 내려 준 재능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림에 소질이 있는 이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담장에 턱을 괴고 창화군을 몰래 구경했다. 연화 말대로 안으로 불러 볼까 생각도 했지만 완성되지 않은 그림을 보여 달라 청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들었다. 이설은 아직 제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예의가 바른 편이었다.

“그런 말 말거라. 아무래도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해서 너희들에게……, 앗!”

“루 소의 마마!”

며칠 내내 괜한 짓을 했다 후회되던 참이었다. 옆으로 밀어 놓은 잎사귀들을 다시 잘 정리하려 담장 밖을 내다본 순간 깜짝 놀라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다행히 연화가 재빨리 등을 받쳐 주며 엉거주춤 자리에 다시 섰다.

“괜찮으십니까?!”

“에구, 깜짝이야!”

담장 위로 삐죽 솟은 얼굴에 연화가 꽥 소리를 지르며 이설의 옷자락을 힘껏 움켜잡았다. 놀란 마음을 겨우 추스른 이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누가 아래에 돌을 가져다 놓았기에 궁금하여……, 송구하옵니다.”

담장 안을 훔쳐보기 위해 궁인들이 돌단을 쌓아 놓았던 게 있었나 보다. 눈에 띄는 대로 치운다고 치우는데 매번 담장 순찰을 돌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멀끔하게 생긴 젊은 사내다.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져 전체적인 인상이 순해 보인다. 누구인지 모르고 봤어도 아마 금국인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닙니다. 제가 괜히 이 앞에 서 있어서……,”

몰래 쳐다보던 것을 들킨 걸까 싶어 이설이 당황했다.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창피해 죽을 지경이다. 속도 모르고 제 아래에 쪼그려 앉은 단향이 자꾸만 이설의 가죽신 앞코를 콕콕 찔러 댔다. 이설과 눈이 마주치자 차 마시는 흉내를 낸다.

“주인 되시는 분께 허락도 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찾아뵙고 청을 드릴 생각이었는데 이제야 뵙게 되었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리시는 일이라면 제 허락이 필요치는 않으시지요.”

이설이 멋쩍게 웃어 보이며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하온데…….’ 하며 흘리는 목소리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실례가 안 된다면 안으로 모셔 차 한잔 대접할 수 있을까요?”

*

조례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가당치도 않은 상소라면 본 척 없이 무시를 하면 됐었는데 근래에 올라오는 상소들은 하나같이 골치 아픈 것들뿐이다. 사냥대회 때 습격 사건 때쯤 이후로 황궁 안팎의 상황이 복잡해졌다.

우선 우찬과 이설을 습격한 무리의 행방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산 반대쪽의 민가를 조사하여 목격담을 듣게 되는 듯했지만 특별히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황제를 습격한 사건도 모자라 요즘에는 국경선 여기저기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는 터라 골머리를 꽤나 썩는 중이었다. 금국의 국경을 침범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국의 국경 수비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각 나라와의 협약을 지키는 의무는 둘째 치고, 이민족 침략의 최후는 결국 금국이 될 게 자명했다. 모든 일의 화근은 미리 밟아 없애야 했다.

황제 습격의 배후로 가장 의심스러운 손조익은 눈에 띄는 움직임 없이 자택에서 요양 중이다. 항간에는 기력이 쇠약해져서 바깥출입을 삼가는 중이라고 하지만 근처에서 잠복 중인 측근에 따르면 노쇠한 기미는 전혀 없다고 한다. 뚜렷한 목적 없이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분명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건 맞다고.

나라 안팎의 일도 이리 어지러운데 주변 사람들이라도 제 본분 지키며 살아 주면 좋으련만. 당장 태자만 하더라도 요즘 학문을 게을리하고 틈만 나면 비은궁에 찾아가서 어리광을 실컷 부리고 온단다.

사냥에 데려가 주겠다는 우찬의 약조가 지켜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하면서부터는 활 쏘는 연습도 하는 둥 마는 둥이다. 학업이고 무예고 하도 개판이다 보니 소운의 소식을 듣고 우찬을 직접 찾아와 떼를 쓰지 않는 것만으로 기특하다 여길 지경이다.

차란은 오른쪽 턱에 반 뼘쯤 되는 상처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풀고 다녀서 꼴 보기가 싫다. 소운은 못 본 지 오래다. 아마 황궁으로 발길을 아예 끊은 듯싶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하루하루다. 예전 같았으면 태자가 빨리 장성하여 황위를 물려받고, 황궁을 떠나기만 바랐을 하루가 매일 반복됐다.

하지만 최근의 우찬은 그런 바람을 잊은 지 꽤 오래다. 즉위 이래로 나라 안팎의 사정이 지금만큼 안 좋았던 적이 없었는데, 그래도 우찬은 기분이 제법 좋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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