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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10)화 (110/300)

달의 황홀경

110화

“제가…… 아니, 신첩이 경솔하였습니다.”

씁쓸하게 번지는 미소가 안쓰러운 것도 잠깐이다. 그간 이설이 창화군과 함께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느꼈던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진 이설을 굳이 달래 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둘 사이에 어딘가 어긋난 기류가 흐르는 게 확실했지만 정확히 짚어 끄집어낼 수는 없었다.

“피곤하구나.”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대화도 없다 차만 홀짝이던 가운데 우찬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운궁에서 자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럴 기분이 아니다. 이설이라도 나서서 붙잡아 준다면 못 이기는 척 다시 앉은 생각은 있지만, 말없이 따라 일어나는 걸 보니 그럴 의도는 없는 것 같다. 하기야, 언제 이설이 저를 먼저 붙잡아 준 적이 있나 싶다.

“따라 나올 필요 없다.”

제 뒤를 따라 나오는 침울한 얼굴을 다시 침소 안으로 들여보냈다. 한참 늦게서야 비운궁에 도착한 궁인들이 뒤를 쫓아 걸었다. 복도 끝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장지문 앞에 이설이 멀거니 서 있었다. 마주친 눈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

황제가 떠난 침소에서 이설은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녁상을 들이겠다는 단향을 물린 게 바로 조금 전이었다. ‘끼니 굶으시면 상궁 마마께 다 이를 겁니다’ 하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단향은 무표정으로 제 말에 고개만 젓는 이설의 기분을 눈치채고 잽싸게 침소를 나갔다. 어차피 주 상궁에게 말해 봐야 적어도 오늘은 제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할 터였다.

하루 동안 머리 아픈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그렇게 열심히 밀어내던 손조익이 궁으로 찾아왔고, 그 대문을 열어 준 게 주 상궁 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저는 몇 해 전 하늘로 돌아가신 혜서 황후 마마를 모시던 궁녀였습니다.’

마주 앉아 한참을 뜸 들이다 꺼낸 첫마디에 대충 주 상궁과 손조익의 관계를 눈치챘다. 혜서 황후가 운명 후에도 궁에 남아 어린 나인들을 교육하는 훈육 상궁으로 일하던 중 손조익이 찾아왔다고 했다. 살아생전 혜서 황후에게 받은 은혜를 제게 갚으라는 그 말을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었고, 손조익의 요구가 아주 못할 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만약 이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보고하라 하였다면 주 상궁도 쉬이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손조익이 원한 것은 단 한 번 이설과의 대면. 그게 전부였다.

우찬에게 이미 언질을 받았던 이설이 손조익과의 독대를 열심히도 피해 다닌 탓에 결국 주 상궁의 선택한 자리가 사냥 대회였다. 어떻게 해서든 이설을 말에 태워 적당히 산 깊은 곳으로만 보내 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사고가 일어났고 주 상궁의 계획도, 손조익의 계획도 모두 틀어지며 일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뒤 잠잠하던 손조익이 다시 주 상궁에게 접선한 게 최근 일이라고 했다. 주 상궁도 제 탓으로 변을 당한 이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몇 번이나 거절을 했지만 이미 그쯤에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주 상궁이라고 손조익의 속내를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이설에게 직접적으로 해가 될 법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예고 없이 찾아온 손조익을 결국 궁 안으로 들였다.

‘모두 제 불찰이옵니다. 모자란 제 결정으로 마마께 누를 끼쳐 드렸습니다. 하오나 맹세컨데, 태부 손조익의 명으로 마마를 감시한 적은 추호도 없습니다. 마마를 처음 뵙던 순간부터 저는 루 소의 마마만을 모시고 있습니다.’

주 상궁이 그리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침착한 얼굴로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거짓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설도 잘 알고 있다. 주 상궁이 그동안 자신을 얼마나 헌신적으로 모셨는지.

그래서 이번 일은 일단 덮어 두고 넘어가기로 했다.

금국에 온 뒤로 만나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열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소중하고 쉽게 내칠 수 없다. 주 상궁이 스스로를 제 사람이라고 했고, 이설 역시 그 말을 믿었다. 그럼 된 거라고, 이설은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마마, 저녁상을 정말 들이지 말까요?”

문 너머로 연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향의 말이 못 미더워 이설에게 한 번 더 물으러 온 것일 거다.

“생각 없으니 오늘은 준비할 필요 없다. 혼자 있고 싶으니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낮게 깔린 목소리의 이상함을 감지한 연화가 군말 없이 알았다며 물러갔다. 이제 제 목소리만 듣고도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주 상궁은 이제 손조익에게 마음의 빚이 없다고 했다. 설령 이후에도 주 상궁의 행동거지가 의심스럽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다. 더 큰 고민은 손조익과 주 상궁이 아니다.

*

“마마, 오늘도 그림 그리러 안 나가세요?”

“오늘은 날이 흐려서 다음에 가는 게 좋겠어.”

“구름도 없고, 해도 밝고, 날이 이렇게 좋은데요?”

잡초를 뽑다 말고 슬쩍 와서 말을 건 단향이 고개를 위로 번쩍 올려다보며 말했다. 단향의 말대로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맑고 해는 밝다. 농담이래도, 날이 흐리다 소리를 하면 안 되는 화창한 날이었다.

말없이 멋쩍게 웃기만 하는 이설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단향은 이내 시무룩해진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며칠 동안 창화군을 보지 못한 실망감이 이설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설은 며칠 전부터 창화군은커녕 궁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있었다. 서책을 읽고, 수를 놓고, 화초를 가꾸는 하루가 반복된 게 몇 번이 흘렀다. 궁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설이 다시 독수공방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비운궁의 귀한 손님이었다.

우찬의 말이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다. 그날 황제가 던져 놓은 돌에 적잖게 충격을 받기는 했다. 그저 좋은 말동무 겸 그림 스승을 만났다고만 생각했지 제 행동거지에 규범이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늘 신경 쓴다고는 하는데, 매번 우찬이 지적해 주기 전까지는 그저 무지몽매할 뿐이다.

화가 난 채로 침소를 떠났던 우찬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건 모두 기우였다. 다음 날 아침 우찬은 평소같이 이설을 찾아와 식사를 하며 이설의 모난 젓가락질을 놀렸다.

모든 게 평화로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는 하루가 줄다리기하듯 아슬아슬하게 계속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제는 알 수도 없다.

“소봉궁에서 기별이 왔는데, 태자 전하께서 일다경쯤 후 찾아뵙겠다 전하라 하셨답니다.”

“그래? 그 전에 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구나.”

멀리서부터 총총총 뛰어온 연화의 말에 이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흙을 만질 때는 제발 회백색의 옷을 입지 말아 달라 부탁의 부탁을 거듭하는 아이들의 말을 또 깜빡했다. 소매와 옷자락에 흙이 잔뜩 묻었다.

환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가 왔다. 제 궁인들 앞에서는 의젓하더니 장지문이 닫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이설에게 뛰어와 안겨 들었다. 안부 인사를 하며 못 본 새에 더 고아해지신 듯하다는 맹랑한 소리를 하기에 이설도 웃고 말았다.

“태자 전하께서도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소자야 항상 무탈하지요. 그나저나 마마께서는 언제쯤에나 소자의 이름을 불러 주실 생각이십니까?”

잊을 만하면 제 이름을 불러 달라 청하는 태자의 요구는 들을 때마다 난감하다. 적당히 넘겨 상황을 무마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태자는 생각보다 고집이 있었다.

“소자도 해도원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전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좀…….”

“마마가 아니시면 누가 제 이름을 불러 주나요? 아바마마조차도 저를 ‘태자’라고 불러 주시는걸요.”

“…….”

“소자는 이름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운 빠진 목소리로 돌아선 태자가 터덜터덜 걸어 의자에 앉았다. 제 키로 편히 앉기에는 너무 큰 의자라 바닥에 닿지 않은 발이 허공에 달랑달랑 흔들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귀엽고 말았을 것을 축 늘어진 어깨를 보니 그마저도 안쓰러워 마음이 불편했다.

“하물며 아명이지 않습니까? 뭐 그리 대단한 이름이라고 아무도 부르지 못하게 하는지.”

“아명이라 한들 천지명관에 적을 올린 귀한 이름입니다.”

“어차피 아명은 천지명관에 등록해 봐야 천명의 증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마마께서는 그런 것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겸연쩍게 웃는 이설에게 태자가 놀라 물었다.

이설은 대체적으로 천지명관이니 천명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제대로 된 상식이 없었다. 연국은 천명을 받은 백성들의 비율이 현저히 낮다 보니 이를 미신처럼 여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마마는 정말 모르시는 게 너무 많아 소자와 스승님이 없었다면 아주 큰일이 나셨을 겁니다.”

이설에게 저와 소운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큰 행운이기라도 한 것처럼 태자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연스레 대화 주제가 넘어가나 싶었는데 오늘은 태자가 좀 끈질겼다.

“그래서 소자의 이름은 언제쯤 불러 주실 생각이십니까?”

“아 그게…….”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은 이설이 끝까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밀어붙이는 영악함의 뒷면이다. 태자를 오래 본 이설은 이제 그 양면성을 구별할 수 있게 됐지만 그걸 알아차렸다고 해서 쉽게 거절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데 태자까지 나서서 저를 곤란하게 하니 사고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제가 궁을 나가기 전에는 그래도 꼭 한 번 전하의 이름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궁을 나가기 전이라고요?”

별안간 웃음기가 사라진 아이의 얼굴에서 익숙한 모습을 보았다. 보통의 촌수로 따지면 조카가 되는 사이에 닮은 구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역시 한 핏줄은 한 핏줄이다. 날카롭게 올려다보는 눈빛을 본 순간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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