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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14)화 (114/300)

달의 황홀경

114화

“초간궁을 가신다고요?”

우찬에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으면서도 이설이 다시금 했던 말을 되물었다. 우찬이 ‘그래’ 하고 대답하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리깔린 눈빛이 영락없이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앉아 있으니 다행이지, 선 채로 이 소리를 들었다면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을 게 뻔했다. 갑자기 가슴이 요동치듯 쿵쾅거리고 손끝이 미세하게 덜덜 떨렸다. 울컥 서러운 마음을 참고 삼키느라 콧잔등에 주름이 졌다.

“왜 갑자기 말이 없느냐?”

“…….”

“경사방에서 패가 뒤집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냐?”

“알고 있습니다. 그저……,”

“그저?”

우찬이 느릿하게 눈을 치켜뜨며 비아냥거리듯 물었다. 이설은 말끝을 흘리며 왜 갑자기 우찬이 제게 이리 매몰차게 구는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장 서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건 다름 아닌 자신인데.

“초간궁으로 바로 가시지 않고, 어찌 제게 들리셨나 해서 그렇습니다.”

옅게 피어오르는 서운한 마음을 간신히 눌러 참으며 태연한 척 대꾸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우찬이 눈치채지 않기만을 바랐다. 우찬이 만약 왜 그리 목소리를 떨고 있느냐 묻는다면 거짓으로도 대답할 변명이 없었다.

“대전에서 초간궁으로 바로 가시는 편이 더 가깝지 않으십니까.”

당황한 탓에 아무렇게나 하는 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제 말이 마치 초간궁으로 바로 향하지 않은 우찬을 질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방금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서서히 변해 가는 우찬의 표정을 보니, 정말이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왜 초간궁으로 바로 가지 않고 너를 만나러 왔느냐고?”

차게 식은 목소리에 담긴 노여움을 알아차린 순간 뒷덜미에 소름이 내려앉았다. 역시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든 동시에 까닭 없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한껏 치솟았다. 실언하였다 적당히 넘어간 뒤 우찬의 기분을 풀어 보낸 뒤 삭혀도 혼자 삭혔어야 할 마음이 엄한 곳에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설은 숨을 고르며 애써 차분한 척 우찬에게 대답했다.

“경사방에서 고심하여 고른 길일에 신첩을 만나 액운이라도 끼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워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내가 초간궁에 무슨 일로 가는지 정녕 알고서 하는 소리인 것이냐?”

“신첩은 갓난배기 어린 아이가 아니옵니다.”

단호한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찬의 실소가 터졌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직감이 강하게 머릿속을 관통했지만 이제와 무를 수도 없는 대답이었다.

“연이설 너는,”

“…….”

“내가 초간궁으로 가기 전 너를 찾아온 연유조차 묻지 않는구나.”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찬이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 했지만 우찬이 손을 저었다.

“네 배웅을 받고 싶지 않다. 내가 이 궁을 나갈 때까지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

바짝 들어갔던 무릎의 힘이 다시 스르르 풀렸다.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건너편의 빈 의자를 멍하니 쳐다보느라 떠나는 우찬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다. 우찬이 문턱을 지날 때까지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게 이상했는지 침소 밖에 대기하던 윤 내관과 주 상궁이 의아한 얼굴로 침소 안을 들여다봤다.

“초간궁으로 간다.”

멀리서 어렴풋이 우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번복되기를 바랐던 결정은 우려했던 그대로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우찬이 이끌고 다니는 긴 무리의 궁인들이 모두 빠져나가며 한적해진 복도에서 주 상궁이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이설이 이상한지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이설의 얼굴을 들여다보느라 애를 썼다.

초점 잃은 이설의 흐릿한 눈동자는 눈꺼풀이 몇 번 깜빡인 후에나 또렷한 시선으로 주 상궁에게 향했다. 앉은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 지킨 채였다.

“피곤해서, …피곤해서 그렇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오늘은 일찍 침수 드시겠습니까?”

“아니야. 목간에 물은 데워 놓았는가?”

“예. 준비할까요?”

“그래. 곧 갈 테니 먼저 나가 있게.”

묵직하게 움직이는 고갯짓을 보고 주 상궁이 조용히 먼저 나갔다. 혼자 남은 이설이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여든 일곱, 여든 여덟, 여든 아홉……, ……일 백.

나직이 떨어지는 입술이 일 백을 토해 내는 순간 꼿꼿하게 세워져 있던 몸이 탁자 위로 스르르 엎어졌다. 팔을 겹쳐 그 위에 이마를 대고 얼굴을 묻었다.

지금쯤이면 우찬도 대문을 나섰겠지. 곧 능소화가 잔뜩 핀 궁 담벼락을 반 바퀴쯤 돌아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을 것이다. 그 길을 한참 걷다 보면 초간궁에 이르리라.

고개를 벌떡 들어 올린 이설이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일어나 곧장 목간으로 향했다. 몸소 목욕 시중을 들겠다며 따라 들어오려는 주 상궁을 만류하며 홀로 목간에 들어섰다. 정신없이 벗은 옷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김이 올라오는 욕탕에 몸을 담갔다. 적당히 데워진 물이 몸을 감싸며 체온을 높였다.

이 참담한 기분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이 있느냐며 목간 앞에서 묻는 주 상궁에게 하마터면 진실로 터놓을 뻔했다. 내가 아닌 다른 여인을 안으러 가는 황제 때문에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다고.

우찬에게 은근한 기대를 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침저녁으로 제 궁에 들려 얼굴이라도 한번 비추고 가는 그 마음을 지레짐작하여 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우찬이 제게 보이는 관심과 친절함을 제게 향한 애정의 척도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설은 그게 자신만의 것인 줄 한동안 착각했다.

우찬은 황제다.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에 따른 책무가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합궁이었다.

손이 귀한 황가에서 우찬이 저와 붙어 있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시간은 없다. 견고한 위치에 앉은 태자가 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우찬이 후세를 남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지 못할 이유 또한 없다. 설령 황후의 배를 가르고 나오는 적통이 아닐지라도.

이해하고 있다. 우찬의 책무와 제 위치를. 이런 투기 따위로 기분이 가라앉아 아랫것들에게 못난 꼴을 보여 주고 욕탕에 들어앉아 궁상을 떨 일이 아니다.

아닌 걸 아는데. 그걸 아는 데도 왜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이설이 몸에 힘을 풀어 상체를 욕탕 깊이 밀어 넣었다. 정수리 끝까지 물 아래로 잠기며 꼬르륵 공기 방울이 수면으로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 젖은 머리가 서서히 물 위로 올라왔다. 물에 젖은 윤기에 평소보다 더 반짝거리는 은사를 뒤로 넘겨 꽉 짜내자 처연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드러났다.

이설이 욕탕 밖으로 두 팔을 쭉 뻗어 보였다. 얼마 전 가지치기를 하다 긁힌 상처가 아물어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매끈하고 깨끗한 팔이다. 여기 이쯤 황제의 이름이 새겨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금우찬’ 이 세 글자만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 밤 우찬은 초간궁에 가지 않았을 텐데. 적어도 우찬에게 가지 말라 청할 수 있는 용기 정도는 가져 볼 수 있었을 텐데.

혹, 평생에 우찬의 이름을 가질 수 없게 된다면 황후의 자리라도……?

더운물에 데워진 몸이 나른해지며 아무렇게나 뻗쳐 나간 생각이 결국 먼 지점까지 닿았다. 몽롱하던 머릿속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 위로 물을 끼얹으며 고개를 흔들자 뒤로 넘겨 놨던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어 헝클어졌다. 주제넘은 제 욕심이 종국에는 불온한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주제 넘은 것을 탐하는 욕망이 진짜 제 마음인지, 아니면 그것을 온당하지 않다고 꾸짖는 것이 진짜 제 마음인지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

“팔을 더 높이 드세요. ……더 높이요 마마.”

“이, 이렇게?”

“손목에 힘을 주고 칼끝을 하늘 위로 향하게 하셔야 다치지 않습니다. 이렇게요.”

우 미인의 궁 앞뜰 한가운데에 이설이 퍽 난해한 모양의 팔다리를 하고 서 있었다. 두세 걸음 옆에 선 우 미인과 비슷한 모양인 듯하면서도 같다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민망하여 연화는 은근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웃전의 부끄러운 모습을 눈감아 주는 것도 아랫것들의 도리다.

이설이 우 미인에게 검무를 배운지 나흘째에 이르렀다. 첫째 날과 하등 달라진 게 없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의욕만큼은 누구 못지않다. 이것만이 연화가 이설의 검무에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칭찬이었다.

“예, 그렇게 제자리에서 돌면 되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저 자태. 비록 자세가 엉성하고 몸이 삐뚤빼뚤 제멋대로 움직일지라도 이설은 자기만의 우아한 몸짓이 있었다. 하기야 걸을 때도 나비가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듯하니 저리 뱅그르르 도는 자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우 미인 만큼의 재능만 있었다면 이번 경연에서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일 텐데. 올해도 이변이 없는 한 우승은 양 소원이 가져갈 게 뻔했다. 가뜩이나 며칠 전 황제가 초간궁에서 밤을 보낸 까닭에 그 궁 궁녀들이 요 며칠 아주 기고만장하게 다니는 게 분해 죽겠는데.

“연화야, 여기 좀 보거라. 우 미인과 내가 달라 보이느냐?”

우 미인과 나란히 서서 묻는 이설에게 연화가 입술을 씰룩이기만 했다. 웃음을 참기도 뭐하고, 웃기도 뭐하고. 대답하기 이리 곤란한 걸 물으시다니,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저 대신 화홍이를 보내야겠다.

웃는 듯 마는 듯 시선을 자꾸 피하는 연화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설은 이설대로 죽을 맛이었다. 오래전 우찬에게 얼떨결에 활쏘기를 배웠던 날 이후로 극복하기 가장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마마, 칼을 위로 번쩍 드셔야 합니다. 팔에 힘을 주시고요.”

“칼이 너무 무거워서…….”

“검무를 추시려면 이 정도는 드셔야지요. 칼끝이 아래를 향하면 마마가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나?”

“어림도 없습니다. 손목까지 힘을 주시고, 팔로 크게 원을 그리시면 됩니다.”

쉽지 않을 거라 각오는 했지만 칼을 들고 손을 뻗는 것마저도 우 미인의 성에 차지 않을 줄은 몰랐다. 며칠 새 잘 먹고 몸을 회복한 우 미인은 활기가 넘쳤다. 쫓아가지 못하는 건 이설의 몸이었다.

“마마께서는 동작도 금방 외우시고 몸의 선도 고우신데, 이 힘이 문제입니다.”

“힘?”

“어찌 이리 기운이 없으십니까?”

나무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 칼 두 자루를 쥐고서 한참 동안 몸을 움직여 댔으니 지치는 게 당연하다. 이설은 오히려 힘든 기색 하나 없는 우 미인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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