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119)화 (119/300)

달의 황홀경

119화

어디서부터 사이가 틀어지게 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정무가 바빠 보러 오지 못하시는 것이겠거니, 생각하긴 해도 사실 속으로는 다 알고 있다. 우찬이 초저녁만 돼도 태금궁으로 돌아가 아침까지 꼼짝하지 않는다는 것을.

“피곤하시면 침수 준비 먼저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서책도 좀 볼 게 있고 해서.”

“그럼 우선 머리라도 말려 드리겠습니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이설이 피곤해 보였는지 주 상궁이 물었다. 하루가 똑같이 반복되고 혼자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도 늦은 저녁의 이때뿐이라 바로 잠드는 게 아까웠다.

주 상궁이 깨끗한 면포를 들고 이설 뒤에 섰다. 아직 젖어 있는 이설의 머리카락을 면포로 꾹꾹 눌렀다가, 탁탁 털었다가를 반복하며 물기는 뺐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들어올 때마다 이설은 나른한 기분에 눈이 감겼다.

오늘 서책은 건너뛰고 우선 잠부터 잘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주 상궁이 ‘마마’ 하고 불렀다.

“오늘 태금궁에 태의가 급히 다녀갔다 합니다.”

주 상궁이 꾹꾹 짜내며 물기를 말리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옆으로 휙 날아갔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린 이설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주 상궁은 태연히 놓친 머리카락을 다시 잡았다.

“그제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 하시더니 오늘 오후부터 갑자기 열이 심하게 오르셨답니다.”

“지금은? 지금은 괜찮으신가?”

잠자코 듣던 이설이 주 상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물었다.

“다행히 탕약을 드시고 많이 나아지셨다 합니다. 태의께 직접 들었으니 걱정은 마시지요.”

“아……. 다행이네.”

어깨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을 빼며 이설이 긴 숨을 내쉬었다. 며칠째 그림자도 보지 못한 우찬이라 아프다는 건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황제가 태의를 만나는 것이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것을 우려해 본래 황궁에서 쉬쉬하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설이 요즘 유독 정신이 없기는 했다.

머리앓이를 한다 하시니, 혹시 또 밤에 잠을 못 이루시는 건 아닐까 염려된다. 그때는 탕약으로도 별수 없고, 이설 너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니…….

“하오니 마마. 태금궁에 한번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태금궁을?”

“예. 폐하를 뵈옵신 지도 오래되지 않으셨습니까.”

다시 고개가 휙 돌아간 이설 때문에 주 상궁이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놓쳤다. 주 상궁은 젖은 면포를 가볍게 털고 반으로 접어 이설의 앞에 섰다. 주 상궁이 움직이는 대로 고개가 따라 움직이는 이설은 갑자기 걱정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명하시면 채비하겠습니다.”

“갑자기 찾아뵙기에는 벌써 시간도 늦었고…….”

“이제 막 해가 진 정도입니다. 폐하께서도 아직 침수에 드시지는 않으셨을 거고요.”

“목욕도 방금 마치지 않았는가.”

“폐하를 만나 뵈러 가시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래도…….”

방금 전까지 그토록 우찬의 걱정을 했지만 직접 태금궁으로 찾아가는 것과는 얘기가 다르다. 찾아오지 않는 이를 먼저 찾아갈 수 있는 용기가 없다. 저를 보고도 시큰둥하게 본체만체할 우찬이 눈에 선하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자신이 없다.

속마음을 있는 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는 터라 이설이 오랫동안 침묵했다. 가지 않을 핑계거리를 찾는 동안 주 상궁이 먼저 포기했다.

“원치 않으시면 찾아뵙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자네 생각에는 폐하께서,”

“예.”

“폐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은가?”

간신히 낸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리니 태연한 척을 하기도 힘들었다. 살짝 치켜 올려 뜬 눈이 주 상궁과 마주쳤다. 대답 전 주 상궁이 고개를 먼저 끄덕였다.

“폐하께서도 마마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나직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가 위안을 주었다. ‘그래도’라는 말로 다른 변명을 만들기도 이제 지쳤다. 우찬이 보고 싶고 걱정되는 마음이 여태껏 스스로를 괴롭히던 불안함을 넘어섰다.

“오늘은 폐하께서 쉬고 계실 테니 내일 찾아뵙는 게 좋겠어.”

“그럼 내일 아침 일찍 태금궁으로 기별 넣겠습니다.”

“내일은 좀 늦을 것 같다 양찬궁에도 기별하게.”

이설의 결정이 만족스러운지 주 상궁의 무뚝뚝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올랐다. 다른 궁녀들처럼 대놓고 티 내지는 않아도 비운궁에 발길을 끊은 우찬 때문에 걱정이 많았던 눈치다.

제법 용기를 내긴 했어도 며칠 만에 만날 우찬 생각에 긴장이 되긴 마찬가지라 입맛이 싹 사라졌다. 아직 잔뜩 남은 다과상에서 사과 두어 조각을 남기고 모두 물리라 했다. 나무그릇에 담긴 사과는 잘게 쪼개서 밖에 있는 삼설이에게 주었다. 우찬의 발길이 뚝 끊어진 탓에 삼설이가 금원에 못간지도 한참이 됐다.

주 상궁이 침소를 나간 것을 확인하고 삼설이에게 이런저런 속마음을 털어놓은 뒤 아주 약간이나마 후련해진 마음으로 일어났다. 이설은 요즘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일이 생기면 삼설이를 무릎에 앉혀 두고 얘기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나마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던 기연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니 삼설이라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본체만체하고 조각난 사과를 먹느라 열심인 삼설이를 두고 침소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사이에 날이 더 어두워져 있었다.

“마마, 단향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침상 끝에 멍하니 앉아 있던 이설의 대답에 단향이 들어왔다. 양손에 옷 두 벌을 들고 싱글벙글인 걸 보니 무슨 일인지 알 것도 같았다.

“내일 태금궁에 입고 가실 옷 두 벌을 골라 봤습니다.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둘 다 색이 좀…….”

단향이 손에 들린 두 옷을 번갈아 본 이설이 결국 난색을 표했다. 이설 기준으로는 색도 너무 진하고 자수가 크고 화려해 입기 부담스러운 옷이었다.

“마마께서 물론 백의가 잘 어울리는 것은 맞지만 가끔은 이런 색이 고운 옷들도 입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도 이건 수도 너무 화려하고……. 내 옷은 아닌 것 같다, 단향아.”

“주안에서 제일 실력이 좋다는 이에게 맡기고 달포를 기다려 받은 옷입니다. 마마가 아니시면 이 귀한 옷을 누가 입습니까?”

이제는 울상까지 되어 옷을 들이미는 단향을 달래려 그나마 색이 참한 쪽빛색의 옷을 고른 뒤 피곤하다는 핑계로 단향을 내보냈다. 단향은 나가기 전 들뜬 얼굴로 벽 한쪽에 이설이 고른 옷을 펼쳐서 잘 걸어 두었다. 펼쳐 보니 자수가 더 화려한 것이, 이설은 머리가 더 찡하게 울렸다.

서책을 보다가 밖에 나가 배가 불러 곤히 자고 있는 삼설이를 구경하다가 들어와 다시 서책을 봤는데도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다. 궁에 돌아가셔도 연습은 꾸준히 해야 한다는 우 미인의 말이 떠올랐지만 검무 연습을 할 정신은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빈둥거려도 시간이 빨리 흐를 것 같지가 않아 이설은 아직 시간은 이르지만 자리에 누웠다. 걱정이 많은 밤이라 쉬이 잠들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불이 꺼진 듯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얼마나 잠들었을까. 며칠을 내내 해 왔어도 아직 검무에 적응하지 못한 몸이 자고 일어나면 유독 뻐근했다. 잠이 덜 깬 정신에 어깨를 주무르며 잠에서 깨어난 이설이 눈을 깜빡이며 어둑한 시야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아직 침소 안이 어두운 걸 보니 해도 뜨기 전이다.

갑자기 잠에서 왜 깼는지도 모르고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는데 멀리서 탁, 하는 문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리고 빨라지는 걸음 소리.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설은 걸음 소리가 제 침소 장지문 앞에서 멈췄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조심스레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잠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목을 타고 내려간 소름이 손끝까지 찌릿하게 긴장시켰다. 주위를 둘러봐도 무기는커녕 손에 휘두를 만한 것도 없었다.

드르륵―

장지문이 양옆으로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한 발 내디뎠다. 아직 어둠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두 번째 발이 안으로 내딛는 순간 포단을 꽉 쥔 두 손에 맥이 탁 풀렸다.

“……폐, 하?”

잠에 잠긴 목소리가 갈라지며 숨소리 가득히 방을 울렸다. 이설은 긴장으로 움츠렸던 어깨에도 힘을 풀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등불 하나 없는 어둠에 숨겨진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이설은 한눈에 우찬을 알아봤다. 숨만 크게 들이셔도 익숙한 향 냄새가 몸속 깊이 채워 들어왔다.

미동도 않고 서 있는 우찬을 두고 이설은 급히 꺼진 등불에 불을 밝혔다. 기름에 다한 등불의 밝기가 미미하여 방 전체를 환하게 비추지는 못했지만 형체만 흐릿하던 우찬의 모습은 가늠이 될 만큼 선명하게 빛을 밝혔다. 그렇게 드러난 우찬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이설은 반가움 뒤에 찾아오는 불안함에 숨이 턱 막혔다.

“이 시간, 에…, 갑자기 여긴 무슨… 일로……?”

등불이 비추는 빛에 아른거리는 우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보이는 무표정과는 다르다. 눈빛만으로 우찬의 기분을 세밀하게 알아채기는 어려울 테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우찬이 좋은 마음으로 이설을 찾아온 게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이설이 다시 포단을 손에 꽉 쥐었다.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는 제가 들어도 겁먹은 티가 났다.

우찬이 아무 말 없이 침상 가까이 다가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우찬을 맞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예의도 생각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본 우찬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웠고 마치 위압감으로 이설을 침상 위에 묶어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설은 엉덩이를 밀어 머리맡에 허리를 더 딱 붙였다. 겁이 나 이가 딱딱 부딪힐 것 같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폐하 이 밤중에 여기까지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

“편치 않으시다 들었는데 어찌 여기까지 직접,”

“너는 내 천명이 아니다.”

얼핏 술에 취하신 건 아닐까 들었던 생각이 허무할 만큼 우찬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름 또한 네 것일 수가 없다.”

“…….”

“내 이름도 가지지 못한 너 따위를 도대체 내가 왜,”

낮게 읊조리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다 이내 말을 맺지 못하고 끊어졌다.

이설이 처연히 가라앉은 눈으로 가만히 우찬을 올려다봤다. 노여움이 가득한 눈에 실린 경멸을 마주한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