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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25)화 (125/300)

달의 황홀경

125화

“설아 지금 네가,”

“…….”

“저자를 보호하려 내 앞을 막아선 것이냐?”

퍽 다정한 어투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에 지레 겁을 먹고 이설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우찬은 미간을 찌푸려 언짢은 심기를 드러내는 대신 이설에게 성큼 더 가까이 다가갔다. 코앞에 선 우찬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거리를 벌리기 위해 한 발 더 뒤로 물러나기 전 우찬이 손목을 움켜잡았다.

“어디까지 가려고?”

“…….”

“이 황궁에 네가 내 손을 벗어나 도망칠 곳이 있을 것 같으냐.”

“도망, 칠 생각은 없습니다. ……폐하, 신첩의 손목을 놓아주시옵소서.”

이설의 애원과 달리 우찬은 움켜쥔 손목에 더 힘을 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참던 고통이 결국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며 이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픕니다.”

아프다는 말을 듣고서야 우찬이 손에 힘을 풀었지만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설이 당겨 빼 보려고 했지만 쉽게 놓아줄 우찬이 아니었다.

이설은 붙들린 팔을 포기하고 침착하게 우찬을 어르기 위해 애썼다.

“신첩은 폐하께 사실을 고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폐하를 막아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너는 나를 보지 않고 있느냐?”

아래로 향해 있던 고개가 다른 사람의 힘을 통해 위로 치켜올려졌다. 턱에 슬쩍 닿은 손을 그저 위로 올렸을 뿐인데 이설은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잠시 우찬과 눈이 마주쳤을 뿐 다시 시선을 옮겨 아래로 빗겨 내렸다.

“너는 내게 거짓을 고할 때면 늘 내 눈을 피해.”

“그렇지 않습니다.”

“보아라. 또 나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지 않아?”

우찬이 다시 턱을 당겨 고개를 움직이는 바람에 당황한 눈동자가 움직이며 우찬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이설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우찬이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척하며 잘 손질된 손톱으로 살살 긁어내렸다. 작지만 그 날카로운 감각으로 생겨난 소름이 목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길게 내려갔다.

“오늘도 네 거짓을 그냥 넘어가 주길 바라느냐?”

“신첩, 하늘에 맹세코 폐하께 거짓을 고한 적 없습니다.”

역시나 우찬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이설이 완강하게 말했다.

턱이 고정되어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눈만 대각선으로 빗겨 깔았더니 우찬의 소매가 반대편으로 흘러내리며 손목에 이름이 보일 듯 말 듯 눈에 들어왔다. 우찬의 손목에 새겨진 이름에 이제는 거의 강박적으로 ‘절대 보면 안 되는 것’처럼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설이 눈을 질끈 감아 시야를 차단했다.

우찬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 보는 사이 이설의 뒤에서 안절부절 두 사람의 눈치만 보던 창화군이 이설의 옆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루 소의 마마께서는 정녕 어떠한 거짓도 고하지 않으셨습니다. 소인이 마마를 찾아온 연유는 떠나기 전 인사라도 드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소인의 경솔함을 꾸짖어 주시옵소서.”

말을 마친 뒤 바닥으로 이마를 쿵 내려찍는 소리가 귓전에 울릴 정도로 소리가 컸다. 얼떨결에 눈을 뜬 이설이 놀라 창화군을 보고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우찬에게 붙잡혀 있어 옴짝달싹도 못 했다.

“꾸짖는 걸로는 어림도 없지.”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는 말이었는데 바짝 붙어 서 있던 이설은 똑똑히 들었다.

우찬이 창화군에게 어떤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하지? 수년 만에야 마침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날을 코앞에 둔 창화군에게 변고가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건 전적으로 다 제 탓이었다.

순간 불안감이 음습하며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간 봐 온 우찬은 성미가 급하고 이유 없이 남을 헤치는 몰인정한 폭군이 아니라는 건 알면서도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찬이 창화군을 가만히 노려보는 가운데 갑자기 이설이 몸을 틀어 탁자 위를 가리켰다.

“창화군께서는 신첩에게 그림을 가져다주기 위해 들르신 것입니다.”

우찬의 시선이 이설을 따라 탁자 위로 향했다. 이설이 조금 전에 반쯤 말아 놓아 어깨 아래의 모습만 보이는 족자가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림?”

붙들렸던 턱과 손이 동시에 자유로워졌다. 이설을 놓아준 우찬이 느긋하게 탁자로 걸어가 족자를 집어 올렸다. 말린 부분이 펼쳐지며 그림 한 폭이 모두의 눈앞에 드러났다.

“신첩의 부탁으로 그리시던 것입니다. 떠나기 전 완성된 그림을 주시려……,”

이설의 설명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우찬은 유심히 그림을 들여다봤다. 금국 출신 화공들의 흔한 화풍과는 다르게 종이 위에 붓의 표현이 매우 부드럽게 나타나 있었다. 그림에 소질이 없는 이설이 보기에도 무척 잘 그려진 그림이라는 걸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찬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이유가, 그 때문은 아니라 더없이 불안했다.

“저자가 여태 너를 그려왔던 것이냐.”

“예. 신첩의 청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저 때문에 창화군이 우찬에게 큰일이라도 날까 싶어 이설은 자신의 청이었음을 첨언했다.

이설과 창화군, 그리고 그림을 번갈아 보던 우찬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싸늘함이 내려앉은 얼굴을 감히 쳐다보기가 겁났다.

“금군은 안으로 들어오라!”

난데없는 고함에 채 당황하기도 전에 활짝 열린 문으로 금군 여럿이 일사불란하게 들어와 우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태자의 정체가 밝혀지던 날 이후로 제 궁에 이렇게 많은 금군이 들이닥친 것은 처음이다. 어깨의 붉은 장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우찬은 어째서 이 많은 금군을 데리고 제 궁에 찾아왔던 것일까.

“저자를 당장 끌어내라.”

“존명.”

금위대장의 대답과 동시에 금군들이 일어났다. 그중 두 명이 창화군의 양쪽에 서서 팔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당황한 얼굴로 금군에게 끌려가는 창화군이 고개를 돌려 ‘폐하!’ 하고 외쳤지만 우찬은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이설만 가만히 쳐다봤다.

이설이야말로 누구보다 당황하여 얼이 빠진 채로 속절없이 끌려 나가는 창화군을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금군이 침소를 나가며 장지문을 닫자 어수선했던 주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탁―

우찬이 손에서 놓은 족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적막을 깼다. 하염없이 장지문만 쳐다보던 이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로……, 창화군을 어디로 끌고 가시는 겁니까?”

힘 빠진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며 물어왔다.

“지금 네가 그걸 걱정할 때겠느냐? 외간 사내를 들여 저런 그림을 그리게 한 네가?”

“그저 그림이옵니다.”

“네 그림이지!”

예고 없이 침전을 울리는 고함에 움찔하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소리에 놀란 것보다도 성큼 제 앞으로 다가온 우찬이 더 위협적이었다.

“저자가 너를 그린 그림이지 않느냐!”

“…….”

“나는 분명 네게 주의를 주었다. 네가 황궁에 온 이유와 네 위치를 기억하라 했어. 헌데 너는 또 이렇게 내 앞에 서 있구나.”

우찬이 이토록 노여워하는 까닭을 이해는 한다지만 당장 끌려 나간 창화군만 생각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림의 목적이든 일의 자초지종이든 뭐든 설명은 뒤로 미루고 일단 창화군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예, 전부 신첩의 잘못입니다. 그러니 창화군이 아니라 저를 벌하셔야 합니다. 내일이면 고국으로 돌아가실 분을 어찌…….”

답답함에 목이 다 멘다. 화를 내도 정작 제 쪽으로 향했어야 할 화살이 어떻게 창화군에게로 돌아갔는지 모를 노릇이다. 그렇다고 우찬이 저를 너그럽게 넘어가 줄 요량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창화군은 무사해야 했다.

끝내 울먹이려고까지 하는 이설을 보고 우찬이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내 너를 끝없이 의심하게 하는구나.”

“신첩과 창화군은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입궁 후 처음으로 우찬에게 큰 소리를 내보았다. 우찬이 그러했던 것처럼 침전을 울릴 만큼 큰 소리를 아니었지만 우찬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설산의 호수처럼 꽁꽁 얼어붙어 작은 변화도 없던 우찬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처럼 인상이 쓰였다.

“황궁에 사는 처지가 비슷하여 마음이 잘 통한 것은 사실이나 폐하께서 의심하실 만한 일은 추호도 없었,”

“……처지가 비슷하여 마음이 잘 통해?”

“폐, 폐하!”

팔이 붙잡혔다 생각한 순간 휘청거린 몸이 질질 끌려 침상 위에 그대로 내팽개쳐졌다. 포단이 두껍게 깔린 침상이라 하더라도 그 위에 살포시 쓰러질 수 있을 만한 힘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눈 한 번 감았다 뜨니 탁자 옆에 서 있던 몸이 침상 위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쓰러진 채로 하-, 하고 숨을 짧게 내뱉은 뒤 팔을 짚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며칠 전 날의 밤처럼 우찬이 그 앞에 서서 이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지가 비슷하다 하였느냐?”

여태껏 보인 노여움은 그저 화를 참아내는 정도에 그쳤다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우찬은 당장에라도 자신을 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네가 아무리 황궁 돌아가는 사정에 어둡다 하여도 이조차 모르지는 않을 텐데.”

“폐하 신첩의 말은,”

“조약의 대가로 끌려와 황궁에 감금 중인 볼모와 네 처지가 비슷하다?”

“그런 의미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설이 서둘러 몸을 세워 침상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끌려오며 의자 다리에 다리를 부딪친 모양인지 왼쪽 발목이 얼얼했다.

“고향 땅을 떠나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사는 처지가 비슷하다 여겼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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