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28화
“그래도…….”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이설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황제 무섭기가 바다 건너 해국까지 유명한데 심지어 저한테 화까지 나 있는 황제를 먼저 찾아간다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흡사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심정일 테지.
게다가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정황은 몰라도, 환각에 취한 황제가 한밤중에 이설을 찾아갔었다 하니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이설 역시 다시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닐 것이다. 그걸 고스란히 떠안고 황제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사정이야 어찌 됐든 지금 이설이 황제를 만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다. 길게 끌어 봐야 황제의 화만 돋울 뿐이고, 그렇게 되면 이설뿐만 아니라 황궁의 모두가 위험해진다. 특히, 황제를 가장 측근에서 모시는 선량한 신하들이.
“폐하께서 요전번 합궁 일로 초간궁에 가시기 전 마마를 뵈러 오셨다지요?”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아직 마음을 못 정하는 이설을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설은 합궁 얘기가 나오자마자 낯빛이 눈에 띄게 변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날의 기억을 꺼낸 게 분명했다.
“어떤 마음으로 마마를 먼저 찾아오셨는지 부디 한 번만이라도 헤아려 주십시오.”
황제의 이유야 확신하고 있지만 제 마음도 아닌 것을 경솔하게 지껄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을 하다 만 느낌이 드는 것이 영 께름칙하긴 했어도 제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야 이설이 스스로 알아차리는 게 더 나을 성싶다.
건너 듣기만 해도 그날 황제가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기대하며 이설을 먼저 찾아갔는지 단박에 알겠는데, 정작 당사자는 이걸 왜 그렇게 눈치채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여기까지 일러 줘도 영 깨달은 게 없는 이설은 입술을 오므라트리며 뭐든 생각해 내느라 애를 쓰는 게 훤히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제 입으로 알려 주고 싶기도 했지만 주제넘게 나서는 것도 여기까지가 한계선이다.
알아차리는 데 오래 걸리려나.
참을성이 많은 황제라지만 요즘 보면 모든 일에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으니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폐하께서는 술시(오후 7시부터 9시까지)쯤에는 궁으로 돌아가실 예정입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질질 끌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 황제는 한 시진 단위로 기분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하문하십시오.”
“차란 님께서는 어째서 제게 이런 것들을 말해 주시는 겁니까?”
기껏해야 황제 일을 물어볼 줄 알았던 이설의 질문이 좀 신선하기는 했다. 여기서 웃으면 상대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까스로 참기는 했지만 만면에 떠오르는 미소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저는 마마가 좋습니다.”
이설의 눈썹 앞머리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선하고, 욕심 없고, 아랫사람을 따뜻하게 돌보시는 그 마음씨가 정말 좋습니다.”
“그런 물러터진 됨됨이로는 황궁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 거라던데요.”
누구에게 들었을지 뻔한 말이었다. 이설 정도의 마음씨면 그럴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그래도 면전에 대고 할 말은 아니었다. 차란은 황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촌철살인 날린 것을 전해 들을 때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처음 들었을 때는 꽤 상처였겠지만 시간이 지나 무뎌진 건지, 이설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차란도 그 앞에 대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제가 도와드리는 겁니다.”
“제가 황궁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요?”
“예 뭐, 그런 셈이죠.”
슬쩍 고개를 뒤로 젖힌 이설이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러다 뚝 분질러지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날 정도로 목이 길고 가느다랗다.
“말씀만이라도 항상 고맙습니다.”
“말씀만인지 아닌지는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슬슬 금위대장을 만나러 가 봐야 할 것 같아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위대장도, 호위군도 모두 요즘 신경이 예민해져 잘못 건드리면 자신만 피곤하다. 칼 찬 무뢰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리도 야박하다.
그래도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면 제 일을 분담하여 부려먹을 수 있었다. 근데 이 쉬운 걸 왜 이설은 못 할까. 딱 한 명, 황제의 기분만 맞춰 주면 되는 것을.
장지문 앞까지 배웅을 나온 이설을 저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는지 이설이 왜 그리 보시느냐 물었다. 오늘따라 태가 고우시다 대충 얼버무리니 수줍게 웃으며 볼이 발그스름해졌다. 이렇게 감정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 황제에게는 얼마나 꽁꽁 숨겼길래 이 사달이 난 걸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두 사람이다.
*
“외출 채비요? 이 밤중에 어딜 가신다는 겁니까?”
술시가 조금 넘은 시간. 해가 막 지고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외출을 하겠다며 이설이 주 상궁을 불렀다.
“태금궁에. ……볼일이 있어서.”
태금궁에 볼일이 있다는 말에 주 상궁의 표정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차라리 폐하를 뵈러 간다 솔직히 말씀하시지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아 괜히 머쓱해졌다.
“갑자기 찾아뵙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아닙니까?”
“용기가 생겼을 때 가야 할 것 같거든.”
무슨 말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주 상궁은 별 궁금한 티도 내지 않고 그럼 새 의복을 가져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차란이 다녀간 후 종일 안에 틀어박혀 생각의 생각을 또 해 봐도 답은 하나였다. 혼자 여기 처박혀 우찬이 와 주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이제 비운궁에 홀로 남아 기다리는 것도 한심했다.
주 상궁이 새로 가져다준 의복을 입고 새 비녀도 꺼내 꽂았다. 좀처럼 몸치장을 하지 않는 이설이 먼저 나서서 이것이 잘 어울리느냐, 저것이 잘 어울리느냐 물으니 궁녀들은 신이 나 죽을 지경이었다. 발이 불편해 신지 않던 새 비단신도 큰맘 먹고 신었다.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플 테지만 태금궁까지 먼 길은 아니었다.
새 신이 낯설어 불편하게 걷자 주 상궁이 가마를 부르겠다 했지만 이설이 만류했다. 해가 져도 아직 오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지라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날이 어두운데 태금궁까지 걸어가는 걸 다들 걱정했다. 주 상궁은 꼭 필요할 때 호위무사가 없는 게 말이 되냐며, 점잖은 어투로 야행 훈련을 나간 기연을 비난했다.
주 상궁의 염려스러운 얼굴은 태금궁 대문을 들어서고 나서야 풀렸지만 이설은 이제야 슬슬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태금궁 궁인들은 이설을 보고 하나같이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쭈뼛거리는 모양새를 보이기 싫어 신경 쓰이지 않는 척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당겨 떳떳하게 걸음을 내디뎠지만 오면 안 될 곳을 왔나, 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차란이 말했던 것처럼 본궁으로 들어서는 이설을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폐하를 뵈러 왔네.”
“폐하께서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당연히 지금쯤이면 침소에 계실 줄 알았다. 막 안으로 더 들어서려던 이설이 당황하여 내디뎠던 발 한쪽을 슬그머니 제자리로 가져왔다.
돌아가야 하나.
갑자기 축 가라앉은 기분으로 갈 방향을 잃은 이설에게 태금궁 궁인이 물었다.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혼자 기다릴 생각은 없었던 이설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내내 이설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궁인이 자연스레 이설을 안으로 안내했다. 함께 온 주 상궁은 본궁 안까지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전에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우찬 없이 혼자 본궁 복도를 걸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찬에게 안기면 은은하게 풍기던 향냄새가 복도에 가득했다. 홀린 듯 멍하니 걷다 보니 우찬의 침소 앞이었다.
“안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안내를 마친 궁인이 어서 들어가라는 듯 장지문을 열고 이설을 쳐다봤다. 이설은 주인 없는 침소를 사전에 허락도 구하지 않고 먼저 들어가 있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기다리면 안 되겠는가? 폐하의 침전은 좀…….”
“루 소의 마마께서 오시면 언제든 본궁의 가장 좋은 곳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예.”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지?”
궁인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이내 또박또박 대답했다.
“우장절이 끝난 무렵입니다.”
“…….”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설이 그 앞에 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주위에 있던 궁인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진 궁인들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복도가 텅 비고 나서야 우찬의 침소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그리 자주 왔던 곳도 아닌데 익숙한 것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 모습에 안정감이 들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은 좀 낯설었지만 아마 우찬의 숙면을 돕는 향이지 싶다.
제 침소도 넓기로는 어디 못지않겠다마는, 황제가 기거하는 곳에는 비할 바가 안 됐다. 하지만 이 넓은 곳 어디에도 제가 편히 있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안으로는 더 들어가지 못하고 문 가까이에 덩그러니 섰다.
마을 어귀 장승처럼 마냥 가만히 서 있기를 한참. 새로 신은 신이 불편하기도 하고, 지난번 우찬과 있을 때 다친 발목이 아직 욱신거렸다. 어디 좀 앉아 있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남의 침소에 멋대로 들어와 자리까지 함부로 앉을 수는 없어서 말아 쥔 주먹으로 다리를 두드리며 참았다.
그러고서 또 잠깐. 눈치 없이 이제는 잠까지 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일 다시 온다 할 것을, 날을 잘못 잡았다. 이제 와서 그냥 돌아가기도 시간이 늦었다. 이설이 입을 가려 하품을 하며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으니 잠이 솔솔 더 잘 왔다.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잠이 들 듯 말 듯 몽롱한 정신에 혹 비라도 오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 혼자 풉, 하고 웃었다. 비 같은 게 지금 올 리가 없지.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 소리와 함께 흩어 사라졌다. 정신이 번쩍 든 이설이 놀라 눈을 뜨며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이 아프기도 하고, 오래 접혀 있던 다리가 저려 엉거주춤하는 사이 창가에 서 있던 검은 인영이 인기척 없이 다가왔다.
“뭘 하고 있는지 물었잖아.”
기억했던 것과 똑같은 화난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온다. 자리에서 선 이설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다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