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33화
손톱 끄트머리만 한 초승달이 보이기나 했는지 모르겠는 달구경은 비운궁 대문 앞에서 끝이 났다. 우찬은 궁 앞에 이설을 내려 주며 오늘은 밤 시중을 들 필요 없다 말했다. 이설이 ‘그래도’라며 한번 붙잡아 보기도 전에 우찬은 말머리를 돌려 떠났다. 제대로 인사도 없이 헤어지는 허무한 작별에 넋을 잃었다가 곧 입꼬리가 솟아오른 얼굴이 궁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보는 이가 아무도 없어 다행이었다.
따라나선 주 상궁 없이 혼자 돌아오는 이설을 보고 다른 궁녀들이 허둥지둥 뛰어 마중 나왔다. 단순히 제 걱정이 되어 그러는 줄 알고 괜찮다며 손을 휘이 젓는데, 가까이 보니 그게 문제였던 게 아닌 것 같다.
“안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이 밤늦은 시간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려 묻는 이설에게 단향이 쭈뼛거리며 나섰다.
“밤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 오시라 그리 말씀드렸는데, 저희 같은 것들의 말은 듣지 않겠다 역정을 내셔서…….”
한밤중에 손님을 안으로 들인 것에 대단한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머리를 조아리는 단향을 달래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 물었다. 그래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누구냐고. 단향이 머뭇거리다 장지문 앞에 다 가서야 실토했다.
“손 가의 태부대사 손조익 대감이십니다.”
“…….”
“상궁 마마가 아시면 정말 무슨 사달이 날지도 모르는데…….”
손조익과의 자세한 내막도 알지 못하면서 왜 이렇게까지 겁을 먹었나 했는데 이전번 일이 있고 난 뒤 주 상궁이 단단히 신신당부를 한 게 있었나 보다. 손까지 바들바들 떠는 단향을 달래서 차는 필요 없으니, 명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며 멀리 보낸 뒤 문 앞에 섰다.
만나지 않으려면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허락도 없이 들어온 불청객을 내쫓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딴에는 좋게 타이르고 단호하게 대처하여 돌려보낸 게 불과 얼마 전이다. 한다고 해 봤자 제 태도가 물러터졌다는 것은 알고 있다. 처신을 똑바로 하는 것도 이 자리의 소임이었다.
이설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아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긴 시간 어영부영 망설이는 대신 스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기억 속의 얼굴이, 그때와 비슷한 차림을 하고 같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설을 보고 느긋하게 일어나 예를 갖췄다.
“태부 손조익 루 소의 마마를 뵈옵니다. 늦은 밤에 찾아뵙는 게 결례인 줄은,”
“결례입니다.”
이설은 빳빳하게 세운 고개를 한번 돌려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 손조익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태부께서는 매번 저를 찾아오실 때마다 결례를 범하시니, 다음번에는 어떤 결례를 보여 주실지 심히 기대가 됩니다.”
“…….”
“다음이 있다면 말입니다.”
싱긋 입술만 웃는 이설과 눈이 마주친 손조익은 선 채로 이설을 내려다봤다. 이설이 고개를 까딱 움직이며 ‘앉으세요’하고 명령하듯 말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저는 무척 피곤하고요.”
“폐하의 밤 시중을 드시는 일이 보통 고단한 것은 아니시겠지요.”
“제 노고를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허니 얘기는 짧을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
떠보는 게 분명한 말투로, ‘밤 시중’에 은근한 강세를 두는 손조익의 빈정거림을 이설은 무난히 넘겨 보냈다.
피곤하다는 말은 손조익을 일찍 돌려보내기 위해 그냥 하는 핑계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말을 타느라 경직되었던 몸에 긴장이 풀리니 졸음이 쏟아지기도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요 며칠 동안 우찬의 밤 시중을 드느라 잠을 못 자 피로가 쌓였다.
손조익은 점잖은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지만 전과는 분명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무리 입을 꽉 다물고 있어도 초조하고, 불안한 눈빛은 숨기기 어려운 법이었다.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더 뜸 들이지는 않겠습니다.”
일일이 대꾸해 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 이설은 대답도 않고 무시했다.
“마마께서는 정녕 황후가 되고 싶은 염이 조금도 없으십니까?”
날카롭게 선 눈빛과 목소리가 마치 자신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전 같았으면 어깨가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르는 상대의 태도였지만 지금은 별다른 타격도 없이 그저 성가시기만 했다. 이런 얘기가 또 나오게 되다니.
“제 대답은 이전과 같습니다.”
“…….”
“저는 폐하께서 바라시지 않는 한 황후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뻔한 물음에 내쉴 한숨도 없이 이설의 대답은 미리 정해 놓았던 것처럼 완고했다.
“소의로 살든 황후로 살든 제 황궁 생활은 달라질 게 없습니다.”
“달라질 게 없다니요.”
퍽 기가 차 코웃음을 치는 손조익에게 일순 불쾌한 기분이 치솟았지만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황후와 소의는 앉은 자리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
“하늘의 권력을 손에 쥐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번에는 이설이 기가 차 코웃음을 쳤다. 풉, 하고 한 번 터지고 말았을 웃음이 뜻대로 멈추지 않아 잠시 동안 마음껏 웃은 뒤에야 사그라졌다. 이설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위로 넘겨 모양을 잘 만진 뒤 두 손을 탁자 위에 포개 놓았다.
언제 웃기라도 했었냐는 듯 웃음기 가신 마른 눈이 손조익을 직시했다.
“황제 폐하를 배신하고 반목하여 얻은 권력은 무익하고 유해합니다.”
보통 때에는 내 본 적이 거의 없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손조익의 귓전을 때렸다.
“그대는 나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대감께서 저를 두 번이나 직접 찾아오셔서 이런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황권을 향한 명백한 반기입니다. 폐하를 모시는 후궁은 물론, 신하된 도리로서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대쪽 같으십니다, 마마.”
“…….”
“믿는 구석이 남다르시니 어디 세상 무서울 게 있으시겠습니까?”
말의 수위가 조금 지나치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부러 말을 끊지는 않았다. 드러낼 듯 말 듯 묘하게 감추는 비웃음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십시오. 폐하의 총애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얘기를 꺼내려고 그리 자신만만하게 오만했던 건가. 이설이 씁쓸하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황손을 잇지 않겠다는 약조를 위해 마마를 데려오신 겁니다.”
“…….”
“마마께서야 말로 황손을 이을 수 없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니까요.”
몰랐던 얘기도 아니고, 일일이 대답해 줄 필요도 없었다. 이설은 말로 대답하는 대신 태연하게 눈만 깜빡이며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러 주었다.
“잠깐 지나쳐 가는 관심을 얻었다고 착각하여 충의를 지키지 마십시오. 폐하는 마마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냉혹하십니다. 필요 가치가 없어진다면 지금 이 자리도 보전하기 어려워지실 겁니다.”
“……태부.”
“황궁에 변변찮은 권력도 없는 마마께서 폐하의 총애 없이 얼마나 버티실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생각 잘해 보십시오, 마마.”
“태부야 말로 믿는 구석이 남다르신가 봅니다. 폐하의 신하된 자로서 어찌 이리 불충하고 방자하게 행동한단 말입니까?”
내심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역모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황제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행동하는 손조익의 동향이 너무 노골적이다. 심지어 우찬조차도 그 의중을 모두 파악하였는데, 손조익은 몸을 사리기는커녕 대놓고 찾아와 속을 다 드러내고 이설을 회유했다. 믿는 구석이 보통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저도 마마와 같습니다.”
손조익이 음험하게 웃었다. 이해되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캐묻고 싶지는 않아 침묵했다.
이 와중에 자꾸 하품이 나고 머리가 무거웠다. 더운물에 얼른 몸을 씻고 내일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 싶다. 역시 그냥 돌려보낼 것을 잘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손조익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마마께서는 결국 저와 뜻을 같이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태자 전하께서 무사히 보위에 오르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손조익이 말하는 뜻이 그런 게 아님을 알았지만 이설이 모르는 척 그 말을 넘겨짚었다. 손조익도 이설의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아마 같은 바람이실 겁니다.”
“그러실 겁니다. 태자 전하야말로 폐하께서 진심으로 아끼시는 유일한 분이시니까요.”
“…….”
“그래서 그 유일한 혈육인 제게도 모질지 못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손조익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활개를 칠 수 있는 이유가 고작 그런 것 때문이라고? 허허 웃는 손조익과 달리 이설은 생각이 깊은 얼굴로 조용히 정면만 응시했다.
“마마.”
“…….”
“언젠가 오늘 일이 크게 후회가 되시는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손조익을 올려다봤다. 무례하게 내리깐 시선이 이설을 비웃는 듯했다.
먼저 고개를 돌려 외면한 이설에게 적당히 인사를 갖추고 손조익이 돌아갔다. 물이 다 데워졌다는 단향의 말도, 얼마 안 있어 이제 막 돌아왔다는 주 상궁의 말도 무시하고 이설은 앉은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
돌판을 밟고 올라가 담장 밖을 내다보는 이설은 오늘 아침부터 쭉 기분이 안 좋은 참이었다.
비운궁 담벼락에 능소화가 하나둘 지기 시작했다. 샛노랑과 다홍 그 중간 어디쯤 되던 고운 색의 꽃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위를 궁인들이 밟고 다니며 짓이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만개하여 있던 터라 이 꽃도 한철이 끝나고 나면 다른 꽃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지게 된다는 걸 잊고 있었다.
“꽃이 피는 때가 있으면 지는 때도 있는 법이지요. 그래야 또다시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소자가 다 마음이 아픕니다.”
돌판을 놓고도 담장 밖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태자가 짐짓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이설을 위로했다. 담장 턱에 팔을 걸치고 그 위에 턱을 얹어 한숨만 푹푹 내쉬던 이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면목 없이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웃음이 올랐다.
“아끼던 꽃이라 괜히 더 마음이 쓰여 그런가 봅니다. 허나 태자 전하 말씀이 다 맞지요.”
이설이 돌판에서 두 발로 쿵 뛰어 내려왔다. 팔 부분을 털어 내자 흙먼지가 털려 나왔다.
“꽃이 전부 지고 나야 그 자리에 새 꽃이 필 수 있습니다. 어쩜 전하께서는 스무 해를 넘게 산 저보다도 생각이 깊으십니까?”
“잘 보고, 잘 배운 덕입니다.”
겸손은 군자가 가져야 하는 미덕 중 하나라는 소운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었던 태자다운 대답이었다. 그래서 소운은 걱정이 많았지만 이설은 이 맹랑한 자신감이 귀여워 보였다.
“훌륭하십니다, 전하.”
흐뭇한 웃음으로 칭찬해 주는 이설을 보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태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설에게 달려들었다. 허리까지도 안 오는 자그마한 아이가 달려와 미는 힘에 휘청할 정도로 몸 상태가 많이 피곤하기는 했지만 이설은 제게 안긴 태자를 밀어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