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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48)화 (148/300)

달의 황홀경

148화

숨 막히는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화가 가라앉은 우찬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대체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어.”

저 역시 폐하께서 대체 저를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눌러 삼키며 이설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관절 갑자기 찾아와 모두 알고 있었음에도 이리 태평한 이유가 뭐냐며 언성을 높이는 우찬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한달음에 태금궁으로 쫓아가 우찬의 발치에 엎드려 싹싹 빌기라도 해야 했던 걸까? 빌어야 했다면 도대체 뭘? 저를 내쫓지 말아 달라고?

태금궁이 아니라면 무암궁이라도 찾아갔었어야 했나. 아직 얼굴조차 모르고 이름 세 글자만 알고 있는 그 여인을 만난다면 제까짓 게 무어라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당신이 나의 연심을 망쳤다며 따져 들었어야 했나.

이것도 아니라 하시면 결국 양 소원의 말을 따라야 했던 것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랬다면 애초에 달 밝은 이 밤, 술잔을 기울이는 이 시간이 이렇게 악몽 같지는 않았으리라.

“너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한 내 시간이 우스워졌다.”

“고민을 왜 하셨습니까.”

모진 말을 할 준비를 갖춘 우찬이 뻔히 보였다. 귀담아듣지 말고, 대꾸하지 말자 다짐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그라져 버렸다.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느라 날카로운 목소리의 언성이 높아졌다.

“저까짓 게 폐하의 귀중한 시간을 들여 고민할 만큼 중한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폐하의 이름도 가지지 않은 제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어차피 때가 되면 황궁을 떠날 처지인데, 그 시기가 조금 달라지는 것밖에……!”

한번 터진 삐뚤어진 마음이 그대로 입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갔다. 그동안 삭여 왔던 서럽고 답답한 마음을 토해 내는 심정마저도 취기가 살짝 오른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붉으락푸르락 얼굴빛이 변하는 우찬을 눈치채지 못했다. 술상이 창 반대편으로 엎어질 거라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술기운 탓인지 화들짝 놀라기보다는 눈을 질끈 감아 보지 않는 것으로 대신했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엉망이 된 자리에 우찬과 이설 두 사람만이 견고한 자세로 빳빳하게 앉아 있었다.

“때가 되면 황궁을 떠날 처지라고?”

직전의 난폭한 행동을 후에 하는 말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한 태도로 황제가 물었다. 흡사 밥을 먹었는지 물을 때처럼 다정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오래전 우찬이 스스로 했던 약조를 잊었다 생각한 이설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분명 폐하께서 그리 약조해 주셨습니다.”

“그랬지. 그리고 넌 그 약조를 잊지 않았구나.”

“제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저를 완전히 내치시겠다며 하신 약조를.

가까스로 뒷말을 삼킨 이설은 바싹바싹 말라 가는 입안을 독주로라도 채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우찬과 아무리 사이가 가까워졌다 한들 상황으로 물러난 우찬과 함께 있을 방법이 없었다. 연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우찬에게 곁을 내 달라 애원할 강단도 없었고, 진짜 정인도 아닌 자신이 우찬의 안위 탓을 하며 옆에 남을 염치도 없었다.

그래도 태자가 즉위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찬의 연심까지는 추호도 바라지 않는다 하면 거짓이겠지만 곁에 둘 좋은 벗이 되는 것이라도 바라며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언제라고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순간 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향 땅이 그리워 어떤 밤에는 베갯잇을 적시며 잠들기도 했지만 우찬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호수를 그릴 먼 훗날의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직 기다리고 있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내 너를 연국으로 돌려보내 주는 날 말이다.”

“……정녕 저를 돌려보내실 생각은 있으신 겁니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일부러 낮은 소리로 물었다. 달큰한 술에 젖은 검은 비단을 두 손으로 꽉 움켜잡으며 속으로 저를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 간절히 애원했다. 그리고 한참을 무표정하게 있던 우찬이 피식 웃는 순간, 이설은 제 바람과 같은 대답을 듣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직감했다.

“내 약조는 아직 유효하다.”

“…….”

“때가 되면 반드시 너를 연국으로 돌려보내 주지.”

바로 직전에 술상이 엎어지며 냈던 소음이 이제 이설의 마음속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뻣뻣하게 굳은 혀는 말의 기능을 상실한 것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니 그전까지는 얌전히 지내는 게 좋을 것이다.”

얼핏 보기에 우찬은 웃고 있었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호의의 미소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명백한 경고다. 얌전히 지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금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찬이 그저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하는 엄포는 아니란 것이다.

“폐하 뜻대로 하겠나이다.”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며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가상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진짜 정인이, 그것도 사내인 이설보다야 훨씬 구색을 갖출 수 있는 여인인 정인이 나타난 시점에서 무슨 염치로 자신을 계속 품에 안아 달라 조를 수 있을까. 제 쓰임새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했다.

“차란을 시켜 연국에 서신을 보냈다 하던데.”

숨을 죄어 오던 화제를 벗어나며 우찬이 말했다. 차란에게 직접 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암어로 적히기까지 한 후궁의 서신을 황제에게 말도 없이 다른 나라로 보내는 것도 무리겠다 싶었다.

“예.”

“무슨 내용이었느냐.”

“항간에 소문으로 연국 왕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얘기를 들어 진위를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굳이 암어를 쓴 이유가 무엇이냐.”

“보잘것없는 소국의 왕일지라도 병세가 위중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 있다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연국 왕족 간의 서신에 으레 사용하는 암어였습니다.”

서신을 펼쳐 보기라도 했는지 우찬이 구체적으로 물었다. 괜한 의심을 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면서도 방금 전의 대화로 이미 녹초가 되어 있는 상태라 뭔가를 깊이 걱정하는 것도 이제는 다 지겹고 피곤해졌다.

“황궁의 내부 사정을 전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장담할 수 있느냐.”

아니나 다를까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우찬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물었다. 이설은 이제 헛웃음이라도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금의 황궁에 대해서는 무엇도 전하지 않았으니 오해 마시옵소서.”

우찬의 표정으로 보건대 믿는 눈치는 아니다. 혹시 이미 차란에게서 제 서신을 빼앗기라도 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차란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면 다른 방도가 없는 터라, 이건 정말 걱정이었다.

“……일단 그렇다 하지.”

제 말을 믿겠다는 건지 아니면 설령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 하더라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건지 의미가 애매했다.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털어 낸 장포에서 작게 찍어 낸 약과가 투둑 떨어졌다. 이설이 쫓아 일어나기도 전에 우찬이 몸을 돌렸다. 이만 가 보겠다는 인사도 없이 멀어지는 우찬의 뒤를 따르려던 이설이 신을 신지 않고 걷다가 깨진 술잔을 밟았다. 앗, 하고 터지는 짧은 비명에도 우찬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폐하.”

살이 찢어진 고통을 그대로 밟고 쫓을 수가 없던 이설이 이미 멀어진 우찬을 급히 불러 세웠다. 그제야 우찬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이 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대체 무엇이셨습니까?”

어둠에 가린 우찬의 얼굴이 희미하여 표정을 읽지 못하겠다. 잠시 서 있던 우찬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네게 들을 대답이 있었다.”

“원하는 대답은 들으셨습니까?”

잠깐의 정적. 우찬이 대답하지 않고 돌아설 것이라 생각할 무렵 다시 낮은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이제 네 대답은 필요 없다.”

그리고 나서야 우찬이 멀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

늦은 밤 퇴궐을 위해 동보문을 막 지나려던 차란 앞을 호위군이 막아섰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그 체력 좋다 소문난 호위군이 숨을 헐떡이며 저를 붙잡아 세우기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예상하기는 했다.

장사치의 아들이며 한낱 승상에 불과한 자신이 왜 경공법을 배우지 않았냐는 타박을 들어야 하는지 억울해하며 부지런히 뛰어 도착한 태금궁은 이미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뛰는 차란 옆에서 호위군이 대강 상황을 설명해 주기는 했지만 들어도 소용없기는 했다. 듣자 하니 호위군도 정확한 상황을 모르긴 매한가지였다.

“비운궁에서 막 도착하신 참이십니다.”

본궁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궁녀 하나가 귀띔을 해 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대충 눈치는 챘다.

“비운궁의 루 소의 마마께서는 무사하신지 확인해 봤느냐.”

“예?”

“술상을 엎어지기는 했지만 크게 다치신 건 아닌 듯합니다.”

난데없이 이설의 안위를 묻는 차란에게 궁녀가 눈치 없이 되물었다. 다행히 함께 온 호위군이 적당한 대답을 하며 본궁 안으로 함께 들어섰다.

“대체 이게 무슨…….”

황제의 침소까지 길게 이어진 복도가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화분은 깨지고 흙은 흩뿌려져 있는 데다가 귀한 자기들은 형체를 잊고 깨진 조각조각들로 사방에 널려 있었다. 군데군데 벽이 깨진 이유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도리가 없었다.

“안은 더 처참합니다.”

따라 걷던 호위군이 한숨 쉬듯 말했다. 탄탄한 황권과 무난한 정세 탓에 정적이 거의 없는 황제의 호위가 시시했던 한때를 그리워하는 게 분명했다.

“들어가시죠.”

“혼자?”

“예.”

“뭐라도 날아오면 어쩌려고.”

“피하셔야지요.”

“경공법도 못하는 내가 무슨 수로?”

“그간 잘 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같이 들어가 주게.”

“폐하께서 승상 말고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 하셨습니다.”

황명이라면 자기 목도 스스로 베는 자인 걸 알면서도 부득불 우겨 함께 들어가기를 청해 봤지만 허사였다. 이러다 정말 오늘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어깨가 축 늘어지는 차란을 보고도 호위군은 어서 들어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오늘따라 일찍 퇴궐을 하고 싶더라니.

“폐하. 신 승상 비차란이옵니다. 안으로 들어도 되겠나이까?”

아무 대답이 없자 차란이 다시 고했다.

“지금 들겠습니다.”

속으로 다섯까지 센 차란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함께 온 호위군의 말에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 우찬이 앉아 있는 의자 하나를 제외하고 뭐 하나 망가지지 않은 게 없었다. 사방팔방 나무 조각들과 사기 조각들이 널려 있으니 어디를 밟고 안으로 들어서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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