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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52)화 (152/300)

달의 황홀경

152화

황제가 다녀간 날 이후 시들어 가는 꽃처럼 풀이 죽어 궁인들의 걱정을 한 몸에 샀던 이설은 이제 틈만 나면 비운궁 여기저기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짧은 거리로는 후원을 왔다 갔다 반복하여 걷기도 하고 길게는 궁의 담벼락을 따라 몇 번이고 같은 길을 맴돌았다.

넋이 나간 얼굴보다야 낫다지만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 내려앉은 근심이라고 봐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절뚝이는 다리를 보고 있노라면 감히 없던 동정심도 생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이설에게 먼저 다가가 무슨 일이 생기신 거냐 물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설이 딱 잘라 그런 일은 없다고 말한 이상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제와 어제 밤사이 기연과 단둘이 긴 담소를 나누었던 것으로 보아 아무 일도 없다는 말은 거짓임이 분명했다.

“마마는?”

“후원에 계셔. 왜?”

“홍옥 좀 드셔 보시라고 하려고.”

“어디서 났는데?”

“아는 저쪽 궁녀에게 몇 개 얻었다.”

“우리가 거지도 아니고, 왜 먹을 걸 얻어 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되묻는 화홍을 보고 연화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간 아침이면 앞뜰에 쌓이곤 했던 목적이 음흉한 진상품들 때문에 못된 버릇이 들었다. 하기야, 그런 목적으로 들어온 홍옥이라면 이설은 입에도 대지 않고 돌려보내라 말했을 것이다. 이설이 비운궁 궁인들에게 청이 아니라 단호하게 명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드시려나 모르겠네.”

“안 드실걸. 조반도 다 남기셨던데.”

“도대체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지? 진짜 모를 일이야.”

“왜긴 왜야. 폐하 때문이지.”

울상을 짓는 화홍에게 연화가 톡 쏘아붙였다. 못마땅하게 흘겨보는 눈은 화홍을 향했지만 실은 황제를 향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허구한 날 우리 궁에 오셔서 큰 소리로 화내시고, 이것도 부수고, 저것도 부수고, 마마 울리시고.”

“연화 너 말조심해. 잘못하면 끽- 이거 몰라?”

앞뒤 없이 말을 쏟아 내는 연화에게 놀란 화홍이 손가락으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죽을 수도 있다, 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것이라며 최근에 배운 것인데 연화는 도통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뭐야, 난 그런 거 몰라’ 하고 인상만 찌푸리더니 계속 말을 잇는다.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다고 말조심을 해?”

연화가 턱을 치켜들어 보이며 말소리를 좀 더 높였다. 앞뜰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는 확실히 연화와 화홍뿐이었다.

“아무튼 내가 뭐 틀린 말 했니? 우리 마마가 연모하는 거 뻔히 아시면서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 내가 다 억울하다, 얘.”

“그래도 우리는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니까…….”

“그걸 우리가 알 게 뭐니? 뭐가 됐든 잘못은 폐하께서 하신 거야!”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 화홍에게 화가 난 연화가 별안간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자 화홍이 깜짝 놀라서는 ‘아, 알았어!’ 하고 덩달아 소리를 지르며 몸을 쌩하니 돌렸다. ‘어휴, 저 성질머리!’ 하고 치를 떠는 혼잣말을 연화도 들었지만 달려가서 머리끄덩이를 잡는 철딱서니 없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혼자 남은 연화는 곧 차분해진 표정으로 후원 쪽을 향해 섰다. 화홍은 물론 누구에게도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설이 갑자기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까닭은 아마 자신이 전해준 차란의 서신 때문이 분명했다. 눈칫밥으로 살아온 서글픈 인생은 이런 일에 쓸모가 많았다.

서신은 연국에서 온 것일 거다. 이설이 연국에서 가져온 물건들에 연의 인장이 찍힌 것들이 많았다. 천자는 모르지만 눈에 익은 같은 글자가 서신을 감싼 비단에 찍혀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일 뿐이다. 서신의 내용을 모르니 이설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이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다. 연화는 제 무능함에 갑자기 짜증이 확 치솟았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우지끈하고 묵직한 뭔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머, 깜짝이야!”

무심결에 위를 올려다본 연화는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굵은 나뭇가지를 발견하고는 옆으로 몸을 냅다 던졌다. 연화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진 바로 다음 순간 나무 저 위에서 나뭇가지가 쿵 떨어졌다. 연화가 서 있던 바로 그 지점은 아니었지만 계속 그대로 서 있었더라면 떨어진 나뭇가지에 난 잔가지에 긁혀 성치는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이게 뭐야?”

흙바닥에서 손을 털며 일어난 연화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떨어진 나뭇가지를 쳐다봤다. 제 허벅다리보다도 굵은 것이, 가만히 있던 게 저절로 부러질 굵기가 아니었다.

연화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원래 간당간당하던 것이었나?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연화는 이내 아무렴 무슨 상관이겠냐는 얼굴로 바닥에 긁힌 손바닥에 퉤퉤 침을 뱉은 뒤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씩씩한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연화가 사라진 뒤 얼마 안 있어 바람도 불지 않은 고목의 잔가지들이 갑자기 파르르 흔들리며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

“어디 갔다 와?”

“…….”

“어디 갔다 오냐니까?”

“알아서 뭐 하게.”

상대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차란이 입술을 삐뚜름하게 찌그러트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어 시커먼 사내가 적당한 사정거리까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완벽한 순간에 들고 있던 홍옥을 냅다 집어 던졌다. 원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홍옥은 차란의 바람과는 반대로 사내의 손에 뚝 떨어졌다.

“잘 먹을게.”

“어디 갔다 오냐고.”

“알면서 대체 왜 물어?”

탐스럽게 익은 홍옥을 한 입 크게 배어 물은 흑영이 한숨을 내쉬듯 물었다. 차란은 버릇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야 내가 그다음에 ‘왜?’ 하고 물을 수 있잖아.”

“…….”

“왜 갔다 왔는데?”

차란이 상체를 쑥 앞으로 내밀며 흑영을 막아섰다. 흑영은 전혀 조심스럽지 않은 손길로 차란의 머리를 세게 밀어낸 뒤 가던 걸음을 계속 걸었다.

“폐하께서 시키셨어?”

“…….”

“마마가 걱정되니 한번 들여다보라 하시든?”

“…….”

“그게 아니면 뭔데?”

흑영은 날이 선선해 모처럼 인적 드문 황궁의 뒷길을 걷고 싶었던 바로 직전의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필 차란을 만날 필요가 있었던 건지. 보아하니 행선지가 같은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담벼락을 뛰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응? 말 좀 해 봐, 흑영.”

“…….”

“대답해 보라니까.”

“…….”

“도대체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아는 게 있으면 뭐라도 말해 보라고 이 빌어먹을 개자식아.”

자꾸만 붙어 오는 차란을 밀어내며 걷던 흑영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천천히 돌아가는 고개가 드디어 차란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해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싸늘한 표정의 차란이 조용히 흑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이 더 성가시게 될 참이다.

머리 아픈 대화는 더 이상 늘리고 싶지 않아 잘 피해 다녔던 흑영이 결국 눈 아래를 가리고 있던 복면을 끌어 내렸다. 짜증 섞인 한숨이 그대로 토해졌다.

“넌 또 왜 그렇게 심기 불편해진 건데.”

“…….”

“뭘 하다 온 거냐고.”

황제가 이해 못 할 황명을 내리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무슨 심사가 틀어져 차란이 이리 역정을 내는지 모르겠다. 황제의 존체를 보위하는 일보다 사사롭게 신경을 거슬리는 이런 일들이 흑영을 더 지치게 했다.

“무암궁.”

“거기는 왜.”

“뭘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게 뜻대로 안 돼서 지금 심기가 어지러워졌다 이거지?”

차란이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왜. 걸려 드는 게 전혀 없어?”

“……없어, 젠장.”

정곡을 찌르는 흑영에게 차란은 잇새로 욕지거리를 씹어 뱉었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도 아니었던 흑영은 심드렁히 홍옥 한 입을 더 베어 물었다.

“평범해. 모든 진술은 일관되고 아귀가 딱딱 들어맞아.”

“근데 그게 널 더 신경 쓰이게 했고.”

“누가 물어봐 주길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대답에 막힘이 없었어. 신원을 증명해 줄 사람 하나 없는 것도 너무 본인에게 유리해.”

“뒤가 너무 깨끗하긴 하지.”

“폐하께서는 그런 여인에게 정1품 첩지를…….”

정리해 보자면 차란이 지금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까닭은 여러 일이 복합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인 거다.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여인의 입궁, 그런 여인에게 정1품이라는 파격적인 신분 상승을 밀어주는 황제의 속내, 그리고 당장은 언급이 없었지만 황궁 밖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

여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비운궁은 개인적으로 알아볼 게 있어서 갔다 오는 거야.”

“황명이 아니고?”

“폐하께서는 비운궁에 별 관심이 없으셔.”

“비정도 하시지…….”

바싹 마른 입술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주군을 비난했다. 이번에는 부러뜨릴 나뭇가지가 없어 먹다 만 홍옥을 얼굴에 던지는 것으로 대신했다.

자주 들락날락한다 싶더라니, 그새 이설에게 정이 든 차란은 사서 마음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그 덕에 신경 쓸 일이 늘어 피곤해지는 건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각보다 사람이 그리 매정하지 못했다. 흑영은 그게 안쓰러운 대신 그냥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매복 중이던 호위군도 모두 철수시키셨어.”

“하.”

“내가 들은 황명은 여기까지다. 폐하의 생각은 네가 알아서 고민해 봐. 난 그런 거 별 상관없으니까.”

그 말을 뒤로하고 담벼락 위로 막 뛰어오르려던 흑영의 옷자락이 붙들렸다.

“충신은 군주가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쉬지 않고 간언으로 모셔야 하는 거 몰라?”

오래 가지 않을 줄 알았던 차란의 화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누그러졌다.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타박하는 차란과 달리 흑영이 차란의 손을 거칠게 툭툭 털어 냈다.

복면으로 다시 얼굴 아래를 가리며 한껏 작아진 목소리가 무뚝뚝하지만 분명하게 말을 전한다.

“충견은 군주의 모든 길을 따르며 명령에 복종할 뿐.”

“…….”

“차란 너와 나는 자리의 목적이 달라.”

그 뒤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는 차란을 남겨 두고 흑영은 담벼락 위로 훌쩍 뛰어올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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