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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53)화 (153/300)

달의 황홀경

153화

차란은 흑영과 헤어진 뒤 한참을 걸어 태금궁에 도착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깨지고 부서진 것들투성이로 난장판이었던 복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익숙한 향내에 벌써부터 압박감을 받는다. 자신은 궁에서 오래 버틸 재목이 아닌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터덜터덜 힘없이 걷는 차란이 황제의 집무실 앞에 다다른 것과 동시에 흑영이 안에서 나왔다. 같은 자리에서 함께 출발했는데 이리 다르다니 새삼 억울하다. 역시 머리를 쓰는 일보다는 몸을 쓰는 것을 배웠어야 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복도에 칸칸이 늘어선 궁인들을 의식해서인지 흑영이 제게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심기는 어떠하신지……?”

지난 며칠간의 경험으로 보아 묻지 않아도 대강 알 법도 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차란이 물었다. 그러나 흑영은 묻는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들어가 보시지요.’ 하고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일말의 기대를 버린 차란이 문 앞을 지키는 궁녀에게 기별하라 전한 뒤 비장한 각오로 자리에 섰다. 나른하게 흩어지는 목소리가 들어오라 입실을 허락했다. 두 번에 걸쳐 열리는 장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황제가 비단 방석에 앉아 장죽을 물고 있었다.

“신 승상 비차란.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

“……장죽을 피우시옵니까?”

“왜. 또 건강에 해롭다 잔소리를 할 참이냐?”

“아닙니다.”

“앉아라.”

차란이 어색하게 웃어 부정하며 황제의 앞에 앉았다. 금방 흑영이 앉았던 자리인지 방석 위에 온기가 남아 있어 상당히 불쾌했다.

“무암궁에 다녀왔다 하던데.”

“예. 흑영에게 들으셨습니까?”

“성과는.”

“흑영이 다 말씀드리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성과 없는 하루 일과를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만큼 모욕적인 일이 없다.

흑영에게 마음속으로 저주의 화살을 날리며 차란이 대답했다.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신이 짧은 시간 만나 뵙기에 별다른 이상한 점은 찾지 못하였습니다.”

“…….”

“진술은 모두 일관되고 이름이 발현된 시점이나 증상도 특별히 의심스러운 구석은 없습니다.”

“글자가 모두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 모양인데.”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으니까요. 이설……, 아니 무암궁 안주인 같은 경우에는 상처가 아물며 서서히 이름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황제가 장죽을 입에 물었다 빼자 입술 사이로 뿌연 연기가 새어 나왔다. 황제는 빨아 드린 연기를 입안에 잠시 머금고 있다가 밖으로 뱉었다. 익숙한 엽초 냄새와 뒤섞인 역한 꽃냄새가 난다. 한층 부드러워진 황제의 분위기는 단순히 약초의 효과일 뿐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는 황제는 지금 어쩌면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일 수도 있다. 갑작스레 선황이 죽고 하루아침에 황위를 이은 황제는 즉위 직후 거의 매일 밤 저런 모습이었다. 보다 못한 차란과 윤 내관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장죽을 숨기고 환각을 일으키는 향초를 모두 없앨 때까지는 매일이 그랬다.

“새겨진 이름은 확인해 봤나?”

“어찌 제가 감히 그 이름을 확인해 보겠다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알아보려면 일을 제대로 했어야지.”

황제는 팔꿈치로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뱉어 낸 연기 뒤로 아련하게 나타나는 황제의 얼굴은 극심한 압박감이나 근심보다는 권태로운 일상에 지친 무료함만 가득했다. 하루는 불같이 화를 냈다가 하루는 얼음처럼 냉랭했다가 또 다음 하루는 한없이 너그러웠다가. 대장간의 쇠붙이처럼 종일 담금질 당하는 심정이란 겪어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얼핏 봤습니다. 얼핏.”

“어떻더냐?”

“폐하의 것과는 좀 달라 보였습니다,”

“…….”

“듣기로는 이름이 보이기 전부터 피부가 가렵고 따가워서 벌레에 물렸거나 병이 난 줄 알았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약초를 쓴 모양인데 그 탓에 흉이 진 것 같다 하십니다. ……근데 이게 제법 일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의심이 걷히더냐.”

슬쩍 비소를 깔고 묻는 황제에게 차란이 고개를 저었다.

“더 의심스러웠지요.”

“…….”

“무엇 하나 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더이다. 마치 누군가 물어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차란은 아까 전 무암궁의 안주인과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때를 생각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간 차란은 던졌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심문이라도 하는 태도로 질문 공세를 퍼붓는 차란에게 여인은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이런 순간이 올 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했다.

“폐하가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

“신이 과민하게 생각하는 것이라 여기십니까?”

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장죽의 연기만 들이마시고 뱉기를 반복했다. 엽초 타는 냄새를 질색하는 차란은 최대한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숨을 가느다랗게 쉬었다. 그걸 눈치챈 황제가 차란의 얼굴로 연기를 후 내뱉었다. 흩어지는 연기에 가려진 차란이 연신 콜록이며 손을 휘저었다.

차란이 괴로워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장죽을 차란에게 향하도록 내밀었다. 장죽 끝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걸을 보고 차란은 잔기침을 삼킨 뒤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차란 네 놈은 이 엽초 냄새를 무척 싫어하지.”

“알고 계셨다니 놀랍습니다.”

황제 가까이 다가가자 역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뒤로 뺐다가 그럴 자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몸을 바로 했지만 충심이 후각의 예민함을 잠재워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맡아 봐서 그런지 기억했던 것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났다. 아무래도 함께 섞인 꽃냄새 탓이렸다.

“폐하. 신의 잔소리로 듣지 마시옵시고, 이리 독한 엽초를 태우시면,”

“비슷한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 말이십니까?”

차란이 손가락을 코에 갖다 대어 살짝 막으며 물었다. 무암궁에서부터 들고 다녔던 홍옥의 옅은 풋내가 다행히 아직 남아 있었다.

“무암궁에 갔을 때. 장죽을 피우는 향이 났어.”

“신이 갔을 때도 향내가 나긴 했습니다만 엽초를 태우는 것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래?”

“환각초라도 피웠던 걸까요?”

“그럴 수도.”

황제가 장죽 끝을 바닥에 툭툭 두드렸다. 환각초를 피웠다 한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신이 더 면밀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내 직접 알아볼 테니.”

눈 깜짝할 새에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른하게 휘청일 것 같던 몸은 자리에 곧게 섰다. 차란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며 그 앞을 막아섰다.

“지금 무암궁에라도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한데.”

“폐하의 정신을 미혹케 하는 곳을 직접 찾아가신다니요.”

“내 정신을 미혹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알아보러 간다는 것 아니냐.”

“신이 있고, 흑영이 있고 이 궁에 믿을 만한 이가 얼마나 많은데 폐하께서 직접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너를 보냈는데 여전히 알아낸 게 없잖느냐.”

“…….”

“네 쓸모없음은 여기까지만 하지. ……비키거라.”

역시 오랜만에 장죽을 피시고 정신이 혼미해지신 게 틀림없다. 뻔히 의심스러운 곳을 제 발로 찾아가 보겠다는 황제가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차란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황제가 장포를 어깨에 둘렀다.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르는 차란만 죽을상이었다.

*

“마마,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그냥 좀 몸이 으슬으슬하구나.”

평소처럼 목욕을 마치고 물기를 닦은 뒤 얇은 옷자락만 걸치고 나온 이설에게 연화가 다가오며 물었다. 이설은 스멀스멀 한기가 도는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 이제 슬슬 욕탕도 안으로 들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그나저나 금에도 겨울은 오는 모양인가보다.”

불 밝힌 복도를 걸으며 이설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여름이 다소 길뿐, 저희 금에도 가을과 겨울은 있는걸요.”

아직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떨어지는 나뭇잎도, 이른 아침 뿌옇게 생기는 입김도, 하물며 흩날리는 눈도 없다. 하지만 그간 금의 날씨를 몸소 체험해본 결과, 이른 새벽의 한기가 이 정도만 느껴져도 겨울이라 하는 데에는 크게 무리가 없을 터였다.

“헌데 이른 새벽부터 갑자기 목욕이라니, 고뿔이라도 걸리실까 걱정입니다.”

“이리 건강한데 고뿔 따위 걸릴 리가 있겠느냐?”

“건강이라니, 마마와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이설의 실없는 농담을 연화가 불퉁하게 받아쳤다. 이설은 겸연쩍게 웃으며 침소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매년 이맘때가 되면 고뿔이 역병처럼 황궁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몸조리 잘하셔야 해요, 마마.”

“연화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탈이다.”

걱정을 달고 사는 연화가 더는 잔소리를 하지 못하게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밖으로 내보냈다. ‘마마께서 아프시면 저희는 상궁마마께 목이 잘려 죽을 거란 말입니다’라는 우는 소리가 농담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목욕을 하러 가는 때까지만 해도 어둑했던 밖이 지금은 어슴푸레하게 빛을 냈다. 요즘은 해도 부쩍 일찍 지고 있다. 밤이 길어졌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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